49화. 지옥(1)
[7경기. 지옥에서 생존하기]
[경기 시작!]
[03:00:00 이후 맵이 바뀝니다.]
[현재 생존자 수 : 5,837 명]
‘상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이네.’
지옥은 상위 리그에서도 코메인 이벤트 이상의 경기에서나 나오는 맵이다.
그렇기에 지옥을 직접 겪어보는 건 나도 처음이었다.
왜 과학 기술이 발전한 지구가 아직도 남극을 정복할 수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애초에 생명체가 살라고 만들어놓은 땅이 아닌 것이다.
니플헤임 또한 마찬가지였다.
‘북방의 얼음 왕국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겠군.’
1회차 때 그나마 비슷한 맵을 겪어본 적이 있었지만, 전제 조건이 잘못됐다.
그곳은 그나마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맵.
‘여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물론 니플헤임의 추위를 버텨내는 녀석들이 많을 것이다.
이곳까지 올라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존의 물리 법칙에서 벗어난 초인들.
거기에 마력까지 쓸 수 있으니까, 방한용품이 없더라도 잠깐은 버텨낼 확률이 높겠지.
‘뭐, 니플헤임에서만 경기가 진행된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문제는 맵이 니플헤임과 무스펠하임을 번갈아 가며 등장한다는 것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니플헤임의 체감 온도는 영하 60도 정도.
아주 잠깐 느꼈을 뿐인데,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정말 살을 에는 듯한 추위였다.
그런데 추위에 겨우 적응했더니, 갑자기 맵이 어마어마한 열기로 가득한 무스펠하임으로 변한다?
볼 것도 없다.
극심한 온도 변화에 모두들 죽어 나갈 것이다.
‘아마도 저 시간이 지나면······ 어?’
[02:49:57 이후 맵이 바뀝니다.]
[현재 생존자 수 : 5,397 명]
7경기가 시작된 지 10분.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벌써 500명 가까이 줄어들어 있었다.
‘미친 사망률이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이번 기회에 니플헤임이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 제대로 파악해 둘 계획이었다.
상위 리그에 올라가면 언젠가 만나게 될 맵이니까.
슈우우우우우욱!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의 강풍.
로브가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듯이 펄럭였다.
엄청난 눈보라에 눈을 뜨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
‘쯧. 정찰하는 것도 만만치 않겠어.’
달의 메아리가 외부 온도를 차단해주고 있는데도 한 걸음 내딛기가 무척 힘들었다.
흩날리는 눈발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가 않아서 다른 플레이어들도 곤욕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천둥의 숨결 해제.’
나는 곧장 천둥의 숨결부터 껐다.
모두들 극한의 추위에서 생존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체력 소모가 큰 천둥의 숨결을 켜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사냥을 시작해 볼까.’
나는 일단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마력장으로 전방 100미터 정도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지옥의 마수들을 풀어놓진 않았을 거야.’
지옥은 엄연히 상위 리그에서도 최상위권 플레이어들이 뛰는 맵이다.
이런 혹한의 땅을 살아가는 마수들?
당연히 어마어마하게 강하겠지.
그런 마수들을 하위 리그의 경기에서 내보낼 가능성은 많지 않을 것이다.
상대조차 되지 않을 테니까.
‘1회차에서도 급변하는 날씨에 적응하는 게 관건이랬어.’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저 앞에 있는 존재가 플레이어라는 것.
나는 서둘러 적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푹- 푹- 푹-
무릎까지 쌓인 눈 때문에 발이 푹푹 빠져들었다.
‘플레이어가 맞았군.’
상대는 두꺼운 가죽 털옷을 입은 채 주변에 있는 눈덩이들을 모아 추위를 피하기 위한 조그만한 굴 같은 것을 만들고 있었다.
북극의 에스키모들이 사는 이글루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 후면 맵이 무스펠하임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무척 쓸데없는 짓이었다.
슈우우우우욱!
굳이 침묵의 망토를 쓸 필요는 없었다.
내가 바로 뒤까지 다가갔음에도 녀석은 나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칼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놈의 오감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푹!
덕분에 나는 손쉽게 녀석의 뒤로 다가가 목에 창을 꽂아 넣을 수 있었다.
띠링!
[플레이어 ‘그릴스’ 를 처치했습니다.]
녀석의 피가 흩뿌려지며 새하얗던 공간이 빨갛게 물들어갔다.
너무나 손쉬운 사냥이었다.
‘생각보다 맵이 별로 넓지 않은 모양인데.’
곳곳에서 또 다른 플레이어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녀석들을 죽이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을 터.
‘사냥감들이 많네.’
나는 녀석들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00:37:22 이후 맵이 바뀝니다.]
[현재 생존자 수 : 4,021 명]
그 뒤로 나는 한참 동안 플레이어들을 사냥하며 돌아다녔다.
몇 명을 죽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100명을 넘게 죽인 뒤로는 숫자 세는 걸 포기했다.
어차피 많이 죽인다고 해서 보너스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보다 생존율이 높아.’
초반 15분에 500명이나 사망한 걸 생각해 보면, 그 이후의 2시간은 거의 줄어들지 않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맵이 무스펠하임으로 바뀌는 순간 엄청난 속도로 줄어들 것이다.
* * *
팀 ‘불굴’의 주인, 루디악.
그는 성계 대항전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 이번 경기에서도 렌이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군요.
―정말 대단하네요. 환경에 따라 네임드들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픽픽 쓰러지는 일이 다반사지 않습니까? 반면에 렌은 기복이 별로 없어 보이는군요.
―보면 볼수록 놀라운 플레이어 입니다. 다른 네임드들에 비해 스텟이 좀 낮지만, 그 약점을 보완하는 수많은 능력들을 가지고 있네요. 네, 말씀드리는 순간 렌이 가르시아를 처치하며 127킬 째를 이어갑니다.
‘좋았어!’
렌의 활약상에 루디악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현재 팀 ‘불굴’은 당장이라도 파산하기 직전이었다.
몇 주 전에 치러졌던 하이블러드나이트 91 경기에서 팀의 주축인 상위 리그 플레이어들이 모조리 죽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미쳤지.’
도대체 왜 그랬을까.
팀 내에서 고위 리그 승급샷을 받은 플레이어가 나온 상황.
원래대로라면 아직 부족하기에, 조금 더 성장시켜서 고위 리그에 도전했어야 했다.
하지만 욕심이 문제였다.
‘고위 리그 플레이어를 배출한 팀.’
그 타이틀을 너무나 갖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포인트 대출까지 받아 가며 그들에게 엄청난 고가의 장비들을 쥐어 아레나로 내몰았다.
결과는 대실패.
팀의 주축 플레이어들을 잃음과 동시에 엄청난 포인트의 빚까지 지게 되면서 파산 직전까지 온 것이다.
‘제발······! 내가 뭐든 할 테니, 제발 우승만 시켜줘!’
그런 루디악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성계 대항전에서 얼마 안 되는 포인트를 지구에 배팅해 대박을 노리거나, 파산하거나.
어차피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어차피 최악의 상황이란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헛된 꿈이었나.’
하지만 지구는 5경기까지 내리 죽을 쑤며 너무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기대를 접고 앞으로 벌어질 암울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검과 정령 마법의 대결. 그러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별과 별의 싸움. 그 안에서 새로운 별이 탄생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어어?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아르웬을 꺾으며 화려하게 비상하던 플레이어, 렌.
온갖 게시글에서 그가 어디 출신인지 궁금해했으나, 5경기까지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상위 리그로 올라갔나 했는데.
[지구]
그런 네임드가 6경기에서 처음 모습을 보였는데, 그의 머리 위에 지구라고 쓰여 있었으니까.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지구의 우승.
무려 1,000배라는 배당률.
그 0.1%의 확률을 뚫고, 자신에게 대박을 안겨줄 플레이어.
루디악이 렌을 필사적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렌이 티르너노그의 네임드 중 한 명인 빌라드를 처치합니다!
―파죽지세의 렌! 누가 렌보고 운이 좋아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다고 했나요! 눈알을 뽑아 미미르의 샘에서 씻겨주고 싶네요!
마침 대마법사라고 불리던 티르너노그의 빌라드를 렌이 죽이고 있었다.
온몸에서 빨간색 뇌전이 흘러나오고, 플레이어들을 학살할 때마다 붉은 안개가 그의 몸으로 흡수된다.
그 시각적 효과는 렌을 더욱 특별해 보이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강함.
―사실 렌은 이미 한차례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습니다. 바로 일대일 최강자 전에서 말이죠. 그럼에도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이번 경기에서 증명이 되었네요.
―물론 GOAT 언급까지는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제 생각엔 아마 10경기에서 치러지는 역대 네임드들과의 전투에서도 렌의 분신이 포함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콜로세움이 시작된 지 이제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동안 하위 리그를 거쳐 갔던 수많은 네임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뭐, 게임 메이커는 아직 몇 명의 네임드가 출전한다고 확정짓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현재 하위 리그의 최강자라는 건 부정하기 어려워 보이는군요. 렌은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하위 리그의 최강자가 확실합니······ 어어, 말씀드리는 순간 하이엘프, 가엔이 렌을 향해 움직이는군요!
―저 최상급 정령은 원래 아르웬이 데리고 다니던 녀석이군요. 아르웬이 죽으면서 가엔과 계약한 모양입니다.
―가엔 뿐만 아니라 일곱 명의 엘프가 추가로 렌이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정령의 힘 덕분인지 움직임이 무척 가볍네요! 렌의 위기!
순간 루디악의 몸이 움찔했다.
해설자들의 말대로 가엔과 일곱 명의 엘프가 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안 돼!’
저들이 친목 도모를 위해 렌에게 다가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필시 아르웬을 죽인 것에 대한 앙갚음을 하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엘프는 원래 동족 간의 유대감이 끈끈했으니까.
거기다 아르웬은 엘프들의 수호자였던 인물.
분명 렌에게 피의 복수를 할 것이다.
‘저 최상급 정령이 꾸민 일이야.’
저들이 향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렌은 주위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을 사냥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루디악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여기서 1승을 챙겨야 우승할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이후의 경기는 지구 출신인 렌에게 쉽지 않을 것이다.
8경기와 9경기 모두 개인 PvP를 표방하고 있지만, 결국 성계 단위로 단합할 거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제발······!’
그렇기에 루디악은 부디 렌이 이 위기를 무사히 헤쳐 나가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 * *
“끅!”
나는 단말마를 내뱉으며 쓰러진 녀석의 몸통을 밟고 창을 뽑아냈다.
거의 세 시간 가까이 있었더니 어느 정도 니플헤임에 적응된 것 같았다.
더 이상 몰아치는 눈보라가 거슬리지 않는달까.
진행 과정도 순조롭고, 사냥도 수월하게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찜찜했다.
‘뭐지?’
어디선가 익숙한 느낌이 났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아르웬에게서 도망 다닐 때 느꼈던 미묘한 감각이랄까.
마치 누군가 날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
슈우우우우우!
물론 그 시선은 날아오는 삭풍에 의해 금방 지워졌지만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냥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주변을 경계했다.
‘내 예상이 맞았어.’
때마침 내 마력장에 걸려드는 8명의 플레이어.
녀석들은 정확히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사방에서 둘러싼 채.
‘복수인가.’
귀 모양이 인간보다 더 긴 것으로 판단해 보건데, 엘프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날 향해 달려오는 이유는 단 하나뿐.
바로 아르웬의 복수를 하는 것.
‘다른 상황에서라면 조금 곤란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피식 웃었다.
오히려 저들이 지금 이 순간, 내게 다가오는 것에 감사했다.
더 빨랐다면 조금 곤란해질 수도 있었을 테니까.
쐐애애애액!
공기를 가르며 무언가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드름 모양의 뾰족한 얼음 마법들이었다.
콰직! 콰지지직!
나는 피하지 않은 채 뇌전을 머금은 창을 휘둘렀다.
마력 상쇄를 얻은 이후, 굳이 마법 공격들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콰지지지직!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뇌전에 닿은 마법들이 공기중에서 녹아 분해되며, 작은 물방울이 되어 흩뿌려졌다.
그것들은 얼음에서 녹자마자 곧바로 작은 얼음 알갱이로 굳어지며 내 몸을 두드렸다.
‘아무래도 칼을 갈았나 본데.’
눈보라를 헤치며 나타난 엘프들의 눈엔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순식간에 여덟 명의 엘프들에게 둘러싸인 상황.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것이지만, 나는 여유가 가득했다.
왜냐하면.
[00:00:04 이후 맵이 바뀝니다.]
잠시 후에 이 세상엔 지옥의 겁화가 불어닥칠 테니까.
추위를 막아내기 위해 입은 털옷들은 잠시 후 그들을 옥죄는 족쇄가 될 것이다.
‘거기서도 너희가 멀쩡한지 한번 보자고.’
나는 녀석들을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띠링!
[무스펠하임에 입장하셨습니다.]
순간 내 몸이 훅! 하는 느낌과 함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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