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콜로세움의 회귀자-39화 (39/205)

39화. 피의 여명(3)

세상엔 숙명이란 걸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는 대신에, 그 숙명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하이엘프.

모든 엘프들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

단 다섯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엘프들의 수호자.

아르웬 세레스피로도 그런 숙명을 지고 태어났다.

“아르웬, 내 딸아. 넌 우리 엘프들의 보물이다.”

그리고 아르웬은 그런 하이엘프들 중에서도 더 특별한 존재였다.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다니!”

“무려 5천 년 만에 등장한 정령왕의 계약자!”

모든 엘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 친화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정령들은 엘프들에게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영혼의 동반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령왕이란 존재는 아무나 소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간계의 조율자라 불리는 드래곤과 비견되는 초월적인 존재였으니까.

“보거라, 아르웬. 참 신기하지 않니? 이 세상은 저마다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단다. 우리 엘프들 역시 자연에 속한 일부분임을 잊어선 안 된단다.”

“느껴보렴. 바람의 시원함을, 불의 포근함을, 물의 깨끗함을, 땅의 단단함을. 이곳이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집이란다.”

고요하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엘프들의 세계.

생명의 어머니, 거대한 세계수는 엘프들에게 보금자리와 먹을 것을, 그늘을, 마실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아르웬은 그 헌신에 감사해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로운 숲속에 전운의 불꽃이 불어닥쳤다.

황폐해져 가는 인간들의 땅.

그들은 식량이 부족해지자, 풍요로운 엘프의 땅을 노리고 쳐들어왔다.

“바람의 정령이여! 나와의 계약에 따라 저들에게 바람의 매서움을 보여주세요!”

“물러서지 마라! 방패병! 마법에 대비하라! 엘프들의 숫자는 기껏해야 10만.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집에서 굶주리고 있는 처자식들을 생각하라!”

그렇게 시작된 10년간의 전쟁.

대다수의 인간들은 엘프보다 약했지만, 극소수의 강한 인간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번쩍거리는 검을 휘두르며 엘프들을 휩쓸었다.

“아르웬, 내 딸아. 네가 저 인간들을 상대해주어야겠구나. 너에게 너무 큰 짐을 맡겨 미안하다.”

“아니에요, 아버지. 저에게 맡겨주세요.”

그렇게 갓 200살, 엘프들의 나이 기준으로는 막 성인이 된 아르웬이었지만, 그녀는 전쟁 속 가장 치열한 곳에 몸을 던졌다.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타고난 정령 친화력 덕분에 그녀는 최상급 정령도 우습게 소환할 수 있었으니까.

“마녀다!”

“정령왕의 화신이 나타났다. 모두 퇴각하라!”

전선의 가장 치열한 곳에 참전한 그녀는 강해 보이는 인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죽였다.

그녀에게 찍힌 강한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럼에도 전쟁은 인간들에게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동반자로서 참전한 호인족 왕의 딸이 죽었다고 하는구나······.”

“하이엘프인 가엔님 마저 인간들의 검에······.”

“숲이, 숲이 불타고 있습니다! 숲이!”

“인간들이 세계수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엘프뿐만이 아니라 숲에서 함께 공존해오던 호인족, 드워프, 낭인족, 묘인족까지 모두 인간들에게 맞서 싸웠으나 전쟁의 화마는 모두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아르웬의 얼굴에서는 표정이란 것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결국.

10년간의 대전쟁, 그 마지막에는 결국 아르웬밖에 남지 않았다.

“후후, 정령왕을 불러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그런 초월적인 존재를 불러내는 대엔 많은 마나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지.”

“정령왕의 화신도 마나가 없으니까 별거 아니군. 그 포동포동한 엉덩이를 흔들며 재롱을 부린다면 살려줄 수도 있는데. 어때, 재롱 한번 부려 볼 텐가?”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들은 여전히 너무 많았다.

대전쟁의 끝은 결국, 엘프들의 패배였다.

마구잡이로 베여지는 나무들. 불타는 숲. 피비린내로 가득한 연못. 그리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가는 더러운 인간들.

‘다시 태어난다면, 너희 인간들을 반드시 깡그리 죽여버리고 말겠어.’

아르웬은 남은 마나를 끌어모아 최하급 바람의 정령을 소환했다.

그리고 살아생전의 마지막 마법을 시전했다.

서걱-

바람의 칼날이 아르웬의 목을 깔끔하게 갈랐다.

살아남아 인간들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치열한 전쟁에서 일생의 마지막을 보낸 아르웬은 원한에 사무치며 안식에 들었다.

하지만.

[콜로세움의 챔피언이 되면 소원을 한 가지 이루어드립니다.]

[콜로세움에 입장하시겠습니까?]

그녀에게 아직 기회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들어온 콜로세움.

그 안에는 그녀가 증오해 마지않는 인간들로 득실거렸다.

하지만 강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10년 대전쟁의 여파 때문인지 아르웬은 본능적으로 강한 인간들만 찾았다.

새로운 팀에 적응하며 맞이하게 된 첫 경기.

아르웬은 최상급 물의 정령을 소환해 아레나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을 난도질해버렸다.

[최초의 업적!]

[콜로세움에서 피의 잠식전이 시작된 이래 최초로 혼자서 모든 플레이어들을 죽였습니다.]

[‘퍼포먼스 오브 더 블러드’ 보너스로 7,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절망’ 수수료 3,000 P 차감)]

[‘파이트 오브 더 블러드’ 보너스로 7,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절망’ 수수료 3,000 P 차감)]

[플레이어 ‘아르웬’ 에게 컨텐더(도전자)의 자격을 부여합니다.]

그 압도적인 강함을 인정받은 아르웬은 고작 한 경기 만에 컨텐더의 자격을 획득했다.

그리고 맞이하게 된 두 번째 경기.

―네임드 vs 네임드! 블러드나이트 200에서 격돌한다!

강한 인간이 출전한다는 소식에 그녀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네임드라고 불리는 인간부터 찾아 나섰다.

하지만 막상 마주친 강한 인간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미, 미친! 캐스팅도 없이!”

인간은 고작 단 한 번의 격돌만으로도 전의를 상실한 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녀보다 훨씬 빠르고, 훨씬 강했지만 그뿐이었다.

강한 인간이라고 불리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지금까지 만났던 강한 인간들은 눈빛만으로도 찌르르 울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아르웬은 그다지 큰 힘을 들이지도 않은 채 도망치는 강한 인간을 잡아 죽일 수 있었다.

‘더 강한 인간이 필요해.’

약한 인간을 아무리 많이 죽여도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 스며든 증오는 씻겨지지 않았다.

오직 강한 인간을 죽일 때에만 그 증오가 조금씩 사라졌다.

그래서 또 다른 강한 인간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려 할 때였다.

강한 인간을 죽인 자리에 또 다른 인간이 하나 숨어있었다.

‘특이한 마나의 파장이네.’

선천적으로 타고난 마나 감응력 덕분에 이상함을 눈치챌 수 있었다.

코까지 내려오는 이상한 가면을 쓴 채 특이한 마나의 파장을 가지고 있는 사내.

잃었던 흥미가 다시 새록새록 솟아났다.

특이한 마나를 가지고 있다는 건 강한 인간일 가능성이 컸으니까.

거기다가 쓰고 있는 가면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분명 강한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아르웬의 기대를 배반했다.

‘도망쳐?’

그녀에게 덤빌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전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약한 인간이었어.’

그런 사내의 모습에 아르웬은 상대를 약한 인간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는 최상급 물의 정령으로 사내에게 마법을 난사했다.

사내를 빠르게 죽이고 다시 강한 인간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때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발생했다.

‘피해?’

사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마법들을 피한 것이다.

아르웬은 다시 한번 마법들을 뿌렸다.

콰광! 콰과과광! 콰광! 쾅!

하지만 마법은 이번에도 사내를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그녀는 사내를 빠르게 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들이 그녀에게서 도주를 시도했다.

그리고 아르웬은 단 한 번도 도망치는 인간을 놓친 적이 없었다.

‘강한······ 인간······?’

아르웬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내가 마법들을 피하는 모습을 보니까 강한 인간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리송하달까.

하지만 이어지는 모습에서 아르웬은 사내가 강한 인간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크아악!”

“이놈! 윽!”

길을 막아서는 플레이어들을 단숨에 찢어버리며 돌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내는 처음 상대했던 강한 인간보다 훨씬 센 것 같았다.

‘강한 인간이 맞았어.’

아르웬은 몸이 달아올랐다.

어서 사내를 죽여 증오를 조금이나마 씻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더 강한 마법들을 쏘아대며 사내를 쫓았다.

‘저 인간은 어떻게 정령 마법을 잘 피하는 걸까.’

하지만 사내와의 거리는 멀어지면 멀어졌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령 마법은 분명 감지하기가 힘들 텐데.

그렇게 7시간을 쫓았지만, 사내를 잡지 못했다.

결국 아르웬은 최하급 물의 정령을 불러 사내를 먼발치에서 감시하게끔 하고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체력을 완벽히 회복한 아르웬은 사내를 죽이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와 같은 방식으론 안 돼.’

결정적인 한 수를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최하급 물의 정령이 전해준 정보를 통해 사내가 이동하는 방향을 알아낸 아르웬은 삥 돌아서 사내를 앞질러 갔다.

이동해 보니 숲의 중심부였다.

‘오늘에야말로.’

아르웬은 최상급 물의 정령을 불러 미리 마법을 시전했다.

그리고 그 마법들을 곳곳에 숨긴 채 사내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사내를 잡기 위해 놨던 덫에 엉뚱한 인간이 들어왔다.

무척 약해 보이는 인간이었다.

아르웬은 약한 인간이 덫을 빠져나가길 기다렸지만, 약한 인간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나무에 기대 쉬기 시작했다.

‘죽여버릴까.’

순간 빠르게 약한 인간을 죽여 땅의 정령으로 묻어버릴까 생각했지만, 하필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강한 인간이 덫에 거의 다 도착한 것이다.

그래서 아르웬은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다행히 강한 인간은 덫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됐어.’

아르웬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얼마 만에 지어보는 미소인지 몰랐다.

강한 인간이 약한 인간을 먹잇감으로 삼은 채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헉!”

충분히 다가왔다고 생각한 강한 인간이 약한 인간을 죽이려고 도약했다.

‘엘레스트라.’

그와 동시에 아르웬이 최상급 물의 정령을 불렀다.

그걸 신호로 숨겨두었던 수많은 얼음 화살들이 사내를 향해 쏘아졌다.

사내가 피하고자 몸을 날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럴 줄 알고 일부러 광범위하게 범위를 설정해 뒀으니까.

그때였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사내 주변으로 강한 뇌전이 퍼져나가더니,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마법의 범위를 벗어났다.

‘저건 뭘까.’

그 광경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아르웬은 본능적으로 사내를 뒤쫓았다.

거리가 벌어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젠장!”

아르웬이 쫓아오는 걸 본 사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엘레스트라, 바닥을 얼음으로 얼려 줘.’

뒤따라오는 최상급 물의 정령이 사내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얼음 구체를 쏘았다.

얼음 구체는 흙바닥에 닿더니 싸늘한 냉기로 퍼지며 바닥에 빙판을 만들었다.

‘이 틈에 따라잡자.’

아르웬이 속도를 올렸다.

그때였다.

사내가 당연히 빙판에 미끌려 넘어질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빙판을 건너기 시작했다.

사내의 발바닥이 은은하게 빛났다.

‘와, 마나로 성질 변환을 시킨거야?’

사내는 아르웬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수였다.

그러자 아르웬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서 죽이고 싶어. 저 강한 인간은 죽이면 어떤 느낌이 들까?’

일단 자신을 고생시켰던 저 허벅지를 자르면서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사내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결국 그날도 아르웬은 사내를 잡지 못했다.

포기한 척한 다음 다시 몰래 다가가 기습했는데도.

‘아, 빨리 죽이고 싶은데!’

아르웬이 온몸을 배배 꼬았다.

자꾸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으니 안달이 났다.

[현재 생존자 수 : 1,824 명]

[킬 수 현황]

[1위. ‘렌’ 157킬]

[2위. ‘빅터’ 61킬]

[3위. ‘아이젠’ 48킬]

[4위. ‘아론’ 40킬]

[5위. ‘한소호’ 39킬]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23:33:42]

남은 시간은 23시간.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강한 인간은 잡힐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마법을 날려도, 바닥에 빙판을 깔아도, 얼음의 벽을 쌓아놔도 모두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죽이고 싶은데.

잡히기만 하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르웬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기습도 못 해.’

강한 인간은 그녀와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아르웬이 휴식을 취하는 곳에서 불과 100미터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몇 번 기습한 이후로 곁에서 아예 그녀의 움직임을 하나부터 열까지 확인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아르웬은 100미터 밖에서 쉬고 있는 강한 인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강한 인간도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 마주친 눈빛.

그의 눈빛은 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찌르르 떨리게 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죽이고 싶게 만드는 인간은.

그때 정찰을 나갔던 최하급 물의 정령, 운디네가 날아오더니 아르웬에게 속삭였다.

운디네의 귓속말을 듣는 아르웬의 눈빛이 반짝였다.

‘앗, 정말 좋은 방법인데?’

왠지 내일은 강한 인간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잡히기만 하면.

마구 예뻐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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