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안정화(2)
블러드나이트 195 경기 이후, 나는 신입들의 교육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더 이상 내가 가르칠 것은 없었다.
이제는 본인들이 스스로 무기를 휘두르고, 몸을 굴리며 깨달음을 얻어야 할 때였다.
“앞으로 저희 교육을 안 하신다고요?”
“예. 저에게 배울 것들은 모두 배웠습니다.”
“아직 저희는 형님과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약한데요?”
“저와 지금까지 했던 것들은 모두 큰 틀을 만들기 위한 훈련이었습니다. 이제 큰 틀이 만들어졌으니, 그 안을 채워 넣는 건 오롯이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내 말에 사인방이 무척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내가 교육을 끝낼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주창범이 앞으로 나섰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그래도 막히는 게 있으면 여쭤봐도 되죠?”
“물론입니다. 그리고 경기가 잡히면 제가 따로 붙어서 도와주기도 할 겁니다. 그러니까 아예 끝이라기보단, 필요에 따라 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그런 관계라고 보면 되겠군요. 그리고 어차피 서로 간에 대련은 계속해서 진행할 겁니다.”
대련은 무조건 필수였다.
그래야 스스로에게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체크하고, 보완해 나갈 수 있으니까.
나 또한 새로운 무기들을 단련하며 신입 사인방을 상대로 실전 경험을 해 볼 수 있으니 얻는 게 많았고.
“그리고 앞으로 당분간은 여러분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겁니다. 새로운 신입이 들어올 거거든요.”
신입들이 블러드나이트 195 경기에서 무사히 돌아온 날, 아세리안에게 말했다.
이제 새로운 신입들을 받아도 될 것 같다고.
그러니까 아마 오늘 아니면 내일쯤에 새로운 신입들이 대거 들어올 것이다.
“신입이 들어온다고요? 그럼 우리 이제 막내에서 벗어날 수 있겠네요!”
주창범이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을 가르쳤던 것처럼, 여러분도 새로 들어오는 신입들을 가르치게 될 겁니다.”
“오오!”
“마구마구 예뻐해 줘야지.”
다른 사인방들도 새로운 신입이 들어온다는 것에 무척 들떠 보였다.
글쎄.
꼭 좋은 것만은 아닐 텐데.
“미리 말씀드리죠. 절대 쉽지 않을 겁니다. 누군가를 관리한다는 것은. 평소보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을 거고,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압박감도 짓누를 겁니다. 서로 간에 가르친 신입들을 비교하며 필요 이상의 경쟁의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합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분이 배우는 게 제법 많을 겁니다.”
나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그러자 잔뜩 흥분했던 사인방의 기분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 진심이 느껴진 것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와 여러분이 곧, 이곳 팀 투지의 초석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초석은 제법 기틀을 잡았습니다. 지금부터 들어오는 신입들은 앞으로 초석 위에 세워지는 기둥이 될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최선을 다해 주세요. 내가 여러분을 가르쳤던 것처럼.”
“알겠습니다.”
“예, 형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인방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앞으로 사건 사고가 자주 생기겠지만.
분명한 건, 이전보다 팜이 훨씬 더 활기 넘치고, 커질 거란 것이었다.
팜에 새로운 가족이 들어왔다.
총 19명.
16명은 신입 플레이어였고, 3명은 사용인이었다.
플레이어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사용인의 증가도 필수였다.
이세연 혼자서는 21명의 인원을 감당할 수 없을테니까.
“자, 모두 쭈욱! 쭈욱! 스트레칭은 무척 중요합니다! 이건 단순히 몸을 푸는 작업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강해지려면 무조건 해야 하는 훈련입니다, 훈련! 집중하세요!”
이전보다 훨씬 더 커진 체력 단련실.
네 개의 그룹이 각자의 자리에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훈련을 시작했다.
“스읍, 후우. 스읍, 후우.”
저주 아이템을 주렁주렁 단 채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보니, 내가 들고 있는 바벨의 무게는 고작 320킬로그램.
그런데도 불구하고 새로 들어온 신입들은 나를 동경의 눈초리로 엿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라고 설명한 거야.’
그 눈빛은 이어지는 대련 시간에 더욱더 진해졌다.
이후 대련 훈련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시범도 보일 겸 나와 사인방이 4 대 1 로 대련을 펼친 것이다.
스윽-
나는 날아오는 루치아노의 창을 피하며 채찍을 휘둘렀다.
텅!
채찍 끝에 달린 동그란 추가 주창범의 방패에 부딪히며 거친 쇳소리를 만들어 냈다.
‘후우. 쉽지 않은데.’
현재 사인방이 쓰는 작전은 개미 마수들을 사냥할 때 잡은 진형이었다.
앞에서 주창범이 내 공격을 막아내고, 그 빈틈을 지그가 찌르고 들어오며, 그 뒤에서 루치아노와 제이스가 대검과 창을 휘두르는 식이었다.
오늘 내 무기는 유성추.
엄청난 속도와 예측할 수 없는 공격 방향, 긴 리치가 특징인 무기였다.
직접 사용해 보니 장점이 무척 많았다.
‘문제는 숙련도를 올리기가 무척 어렵다는 거지.’
신입들을 상대하며 벌써 한 달 넘게 사용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중급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초감각이 있는데도.
‘일단 주창범부터 치워야 해.’
앞에서 방패를 내민 채 내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주창범이 가장 문제였다.
예측하기 쉽지 않을 텐데도, 거의 완벽에 가깝게 내 공격들을 막아내고 있었으니까.
그와 반대로 나머지 세 명은 아직 유성추의 궤적에 익숙해지지 않은 상황.
주창범만 무너트릴 수 있다면, 나머지 세 명을 쓰러트리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체를 공략하자.’
나는 머리 위에서 크게 돌리고 있던 유성추를 주창범의 안면부로 쏘아 보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들리는 방패.
‘지금!’
순간적으로 날아가는 채찍의 끝부분을 살짝 잡아당겨 유성추의 궤적을 틀었다.
그러자 유성추가 뱀처럼 휘며 떨어지더니 주창범의 발목을 강타했다.
“끄악!”
무게 중심을 잃은 채 쓰러지는 주창범.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폭풍처럼 유성추를 휘둘렀다.
텅! 텅! 텅! 텅! 텅!
방패가 사라지자 유성추가 물 만난 물고기마냥 펄떡거리며 남은 삼인방을 두드려댔다.
결국 지그와 루치아노, 제이스는 내게 변변한 공격 한번 시도해보지도 못한 채 주창범과 함께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후우.’
녀석들의 수준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상대도 되지 않던 녀석들인데, 요즘 부쩍 애를 먹고 있었다.
물론 저주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크, 크흑. 고,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오늘도 대련에 감사드립니다.”
사인방이 쓰러져 피를 흘리면서도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는 것으로 대련장을 나섰다.
―봤어? 혼자서 네 명을 그냥 압도해 버리네. 지그님이 괜히 조심하라고 한 게 아니었구나.
―심지어 유성추는 연습 중인 무기라고 하시더라. 연습한 지 한 달도 안 됐대.
―아, 그건 나도 들었어. 창을 들면 자기들은 단 한 번의 공격도 막아내지 못할 거라고 하시던데.
―아무튼 조심하자고. 괜히 심기를 잘못 건드리면 웃으면서 팔다리를 잘라버린다니까.
등 뒤로 새로 들어온 신입들이 귓속말을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마지막에 나눈 대화에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들. 도대체 날 뭐라고 설명하고 다니는 거야.’
단련장을 나온 나는 아세리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서오세요, 안우진님.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예.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련 중에 아세리안의 호출이 도착했던 상태.
그래서 평소보다 더 급하게 대련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던 것도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아세리안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엔 큰 글씨로 첫 줄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블러드나이트 200 코메인 이벤트 ‘렌’ 참가 제안서
‘내 지명 오퍼.’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종이를 올려놨다.
드디어 들어왔구나.
블러드나이트 187 이후 어느새 2달이란 시간이 흐른 상황.
티는 안 냈지만, 그동안 알게 모르게 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나는 단숨에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일단 가장 중요했던 부분, 승급샷 경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참여 인원이······ 5천 명?”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천 명만 참가해도 대형 경기로 분류되는데, 5천 명이 참여한다고?
“깜짝 놀라셨죠? 저도 보는 순간 얘네가 숫자를 잘못 썼나 의심했을 정도였다니까요. 근데 안우진님이 놀라는 표정은 또 처음 보네요. 후후.”
“그럼 이 5천 명이 진짜입니까? PvM도 아니고, 개인 PvP인데?”
“네. 듣기로는 조만간 하위리그에서 초대형 이벤트가 열릴 거라고 하더라구요. 뭐, 하위리그의 관객 수를 어떻게든 늘려보겠다고 게임 메이커가 발악하는 거죠. 그거 때문에 관심을 끌기 위해서 초대형 경기를 기획했다고 하네요.”
아세리안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오래 기다렸어.’
하위리그에 소속된 모든 플레이어들이 뛰는 경기.
성계 대항전이 곧 열린다는 뜻이었다.
성계 대항전은 소속 팀과 무관하게 각 성계별로 모여 대항전을 펼치는 경기였다.
그리고 내가 상위리그에 늦게 올라가려고 발버둥 쳤던 이유였기도 했다.
‘성계 대항전에서 반드시 성계 특전을 얻어야 해.’
아이러니하게도 성계 대항전은 하위리그에서만 열린다.
그 이유는 무척 간단했다.
‘상위리그 이상 올라가면 지구 출신이 없으니까.’
지구 출신이 무시당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네임드가 없는 성계.
열두 성계 중 최약체 성계.
그게 지구에 대한 평가였다.
물론 2회차에는 다를 것이다.
“초대형 경기라 고민이 많으시죠? 시간 좀 드릴까요?”
“시간······? 아.”
내가 종이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자 아세리안이 착각한 것 같았다.
나는 종이를 내려놓으며 아세리안을 바라보았다.
“이 경기, 뛰겠습니다.”
블러드나이트 179 이후, 나는 급성장을 이뤄낸 상태.
참여 인원이 5천 명이라고 해서 내가 쫄 것도 없었다.
“알겠어요. 앞으로 4주 남았으니까, 그동안 저도 최선을 다해 볼게요.”
“저도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나는 아세리안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다시 대련장으로 향하려 할 때였다.
“형!”
주창범이 대련장에서 나를 부르며 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불안감이 치솟았다.
주창범이 팜 안에서 저렇게 다급해 보이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기에.
‘신입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라도 터졌나?’
“무슨 일입니까?”
“중개 거래소에 어떤 가면이 올라와서요. 형이 전에 혹시 가면의 파편 같은 거 올라오면 얘기해달라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주창범의 얘기는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가면!’
나는 서둘러 중개 거래소를 열었다.
어디 있는 거야.
설마 그사이에 팔린 건 아니겠지?
물론 가면의 파편이라고 해서 꼭 블라디미르 가면에 합성할 수 있는 아이템인 건 아니다.
하지만 가면의 파편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보기 어려운 아이템인 만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빠르게 중개 거래소를 내리다 보니 주창범이 얘기했던 가면의 파편이 보였다.
[<소모 아이템:가면의 파편(빨강)>]
[어떤 가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온 파편. 어떤 가면인지는 알 수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착용하면서 주인의 능력 일부가 깃들어 있다.]
[가면의 원본이 있으면 합성이 가능한 아이템입니다.]
[등급 : 알 수 없음]
[판매가 : 5,000 G]
‘내가 찾던 게 맞아!’
파편의 정보를 보는 순간 나는 곧장 구매 탭을 클릭했다.
[<소모 아이템:가면의 파편(빨강)>을 5,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내 손바닥 위에 나타난 빨간색 바탕의 가면.
그걸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어났다.
설마 중개 거래소에서 가면의 파편을 얻게 될 줄이야.
심지어 가격도 5천 골드밖에 하지 않았다. 그냥 잡템인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이게 형이 찾던 게 맞나요?”
“아, 예.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제가 열심히 찾던 아이템이 맞네요.”
생각해 보니 가면을 구입한다고 주창범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감사를 표하자 주창범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쑥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아니에요, 형. 형이 저에게 얼마나 많은 걸 해주셨는데. 근데 그 가면 조각을 형님 가면에 덮어씌우는 거예요? 가면에 문양이 하나씩 추가 돼가는 것 같던데.”
“예, 맞습니다. 한번 볼래요?”
“오, 그래도 돼요?”
“안 될 것도 없죠.”
나는 빨간 가면의 파편을 블라디미르 가면에 가져다 댔다.
띠링!
[<가면:블라디미르의 가면>과 <소모 아이템:가면의 파편(빨강)>을 합성하시겠습니까?]
[한번 합성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Yes(선택) / No]
띠링!
[<가면:블라디미르의 가면>과 <소모 아이템:가면의 파편(빨강)>을 합성을 성공했습니다!]
[<가면:블라디미르의 유희>를 획득합니다!]
[<가면:블라디미르의 유희>]
[고위 악마, 블라디미르가 착용하던 가면이다. 오랜 시간 동안 착용하면서 주인의 능력 일부가 깃들어 있다.]
[착용 시 <피의 회복>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착용 시 <악마의 눈>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착용 시 <피의 강화>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피의 회복>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체력이 1% 회복된다.]
[<악마의 눈> ― 대상의 상태창을 일부 엿볼 수 있다. 상대의 거짓말을 알아챌 수 있다.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볼 수 있다.]
[<피의 강화>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모든 스텟이 일시적으로 1% 상승한다.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스텟 상승이 초기화되며, 최대 30%까지 상승한다.]
[등급 : 전설]
알림창과 함께 손에 있던 파편이 블라디미르 가면 속으로 스르르 흡수되었다.
그런데 상태창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미친.’
한 명 죽일 때마다 1%씩, 최대 30% 상승?
아이템 정보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건 완전 밸런스 파괴 아이템인데?
도대체 블라디미르라는 자식은 살면서 얼마나 많이 레이드를 당했길래 이런 괴랄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던 거야?
등급도 희귀에서 곧바로 전설이 되었다.
고귀를 건너뛴 것이다.
“하. 하하······.”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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