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빛의 이면(7)
상태창을 보는 순간 몸이 움찔 떨렸다.
“왜 그러세요?”
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검을 들자 루시아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냐.”
하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내가 알아차렸다는 걸 들키진 않았겠지?
이대로 모르는 척 다가가서 기습 공격을 넣어야 하는데.
‘가면을 끼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표정을 가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감정을 숨기는 데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기습 공격을 하려던 내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빈, 아니 레기아의 표정이 기괴하게 뒤틀리고 있었으니까.
“들켰군.”
레기아의 목소리가 걸걸했던 중년 용병의 목소리에서 순식간에 청년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지쳐 보였던 것도 연기인 듯, 구부정하던 자세도 바르게 폈다.
그러자 루시아가 헉, 하며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뒷걸음질을 쳤다.
“후후, 감정을 숨기는 게 어설퍼.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안 레기아가 지금껏 얼굴에 쓰고 있던 가식을 벗어던졌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조그만한 병 같은 것을 꺼내 그 안에 든 액체를 손목에 톡, 톡 떨어트렸다.
내가 녀석에게서 계속 맡아왔던, 향수 냄새였다.
‘여자를 안고 와서 저 향수 냄새가 나는 게 아니었어.’
“후우, 미적 감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을 흉내 내느라 힘들었군. 도대체 천한 것들은 이런 식으로 어떻게 사나 몰라?”
레기아는 향수를 손목과 목에 비비더니 이내 손가락을 탁, 하고 튕겼다.
그러자 중년 용병의 얼굴이 서서히 사라지고, 처음 보는 이십 대 중반 정도의 청년이 나타났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잘생긴 미남자였다.
“줄곧 우리를 속이고 있었군.”
“하하, 그래 맞아. 내 완벽한 연기였지. 케일이란 녀석만 치우면 될 줄 알았는데, 너도 제법 잘 싸우지 뭐야? 그래서 체력이 빠지는 순간을 기다려 기습을 하려 했는데, 내가 너무 신중했군. 아까 그 정신 지배 마법으로 안 건가?”
“······.”
“서둘러 죽인다고 죽였는데, 하필. 거기서 그 마법사의 정신이 네게 먹힐 게 뭐람. 하여튼 맘에 안 든다니까? 고건무를 연기하는 녀석도 그렇고. 이래서 천한 것들이랑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일을 할 수가.”
레기아가 자기 몸에 묻은 먼지들을 탁, 탁! 소리 나게 털었다.
저 여유.
그리고 미리 악마의 눈을 통해 확인한 녀석의 스텟.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인 내 몸 상태까지.
현재 상황은 녀석이 나를 앞에 두고서도 여유를 부릴 만 했다.
“상태창으로 메시지는 어떻게 보낸 거지?”
당장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이지만, 녀석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콜로세움에 참가한, 플레이어들에게만 허락된 힘.
고건무와 녀석이 상태창을 이용할 수 있었던 탓에 녀석들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1회차와는 다르게 앞으로는 다양한 미션 경기들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젠 두 눈이 있으니까.
이후에 또다시 스토리 미션을 진행할 때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거란 법이 없으니, 녀석을 통해 확실히 알아두고 싶었다.
“하하하, 곧 죽을 녀석이 그게 궁금한가? 뭐 알려주는 거야 어려울 것 없지. 흑마법은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힘. 그중 정신 계통 마법에 특출나지. 특히 살아있는 제물을 바쳐서 시전하는 흑마법은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할 정도야. 제물로 바쳐지는 인간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도 해낼 수 있지. 가령, 상대방의 정신과 연결되어, 종속시킨다든가 하는 것처럼 말야.”
“······.”
“너도 그림자 잠식이란 마법을 겪어봐서 알 텐데? 그걸 통해 다른 인격체를 조종할 수 있지. 마음먹는 것 하나만으로도. 처음 녀석들의 정신을 차지했을 땐 좀 놀랐어. 콜로세움이라······ 사후 세계엔 그런 곳이 있군. 아주 좋은 정보야.”
사실 몰랐다.
그때는 마법이 유지되는 시간이 워낙 짧았으니까.
다른 인격체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니.
‘진짜 개 사기네.’
마법에 대한 무지가 불러온 결과였다.
1회차의 난, 거의 개인 PvP 경기만 출전했으니까.
전투 마법사들이나 상대해 본 경험으로 마법에 대한 개념에 접근하려고 하다 보니 생긴 오류였다.
‘돌아가면 마법에 대해서도 공부해 둬야겠어.’
거의 개인 PvP 밖에 뛸 수 없었던 1회차와는 다르게, 2회차엔 앞으로 이런저런 경기들에 많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후 마법사들을 상대해야 할 일들이 많아진다는 뜻.
적어도 마법의 메커니즘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능한지 정도는 알아둬야 했다.
물론 일단 이 경기를 성공적으로 끝내는 게 먼저지만.
“잡설이 너무 많았군.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서 체력을 회복시키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이만 끝내자고.”
레기아가 손목으로 검을 휙휙 돌리며 다가왔다.
젠장. 하다못해 창이라도 쓸 수 있게 동굴 밖으로라도 나가서 상대했어야 하는데.
침착하자.
스텟도 녀석이 위고, 체력도 부족하지만 내가 질 정도는 아니다.
뒤에서 녀석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그의 검술을 지켜봐 왔으니까.
“후우.”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행동을 신호로 레기아가 내게 달려들었다.
휙!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롱 소드.
나는 살짝 뒤로 물러서며 레기아의 공격을 받아냈다.
‘이상할 정도로 기교가 많이 들어있었어.’
검이 보통 그 주인의 성향을 닮아간다지만, 레기아는 유독 비슷했다.
오히려 게빈의 모습일 때 그의 검술을 보면서 의아했을 정도.
숱한 실전을 치르며 갈고닦아 왔을 검술에 화려한 기교?
‘전쟁 나가는 용병이 명품 신발을 신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지.’
그것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이 또 없었다.
그런데 레기아의 본 모습을 보고 나자 이해가 됐다.
과할 정도로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느낌.
‘외모에 대해 결벽증이라도 있는 것 같네.’
“호오, 체력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제법이구나. 어디 이것도 막아보아라!”
레기아의 검이 수많은 잔상을 남기며 날아왔다.
마치 공작새가 자신을 뽐내기 위해 깃털을 화려하게 핀 듯한 모습.
챙! 차앙! 차앙! 차아앙! 챙!
나는 레기아의 공격을 완벽에 가깝게 막아냈다.
“스읍, 후우. 스읍, 후우.”
아무리 화려한 검술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공격할 수 있는 포인트는 정해져 있는 법이다.
그것만 미리 알고 있다면 막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간혹 그것까지 숨기는 녀석들도 존재하긴 하지만.’
그 정도의 고수는 하위리그에서 만나기 쉽지 않다.
빅터 정도의 고수라면 모를까.
챙! 챙! 채앵!
자신의 공격이 번번이 막히자 레기아의 공격이 점점 거칠어져 갔다.
“크윽, 어째서! 어째서 모두 막아낼 수 있는 거지?”
자존심이 상했는지, 무척 화가 난 모습.
‘너 정도 수준의 검객은 상위리그에서 숱하게 상대했었지.’
이런 유형의 검객들을 많이 만나봤기에, 레기아가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알 수 있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아름답게만 가꿔진 녀석들.’
당장 내 체력이 부족하고 스텟이 밀리기 때문에 레기아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테크닉에서도 내가 우위고, 경험에서도 내가 앞선다.
한마디로 내 체력이 충분했거나, 스텟이 조금만 높았다면 단숨에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
“이익! 내가 너 같은 천것에게 질 것 같으냐!”
광분한 레기아가 힘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재 나는 체력이 부족한 상태.
힘 대 힘으로 맞상대해서는 가망이 없었다.
오히려 녀석이 스텟을 믿고 밀고 들어올수록 나는 기술적으로 승부해야 한다.
‘얼추 밑밥은 깔아뒀어.’
레기아 같은 스타일의 상대는 사실 상대하기가 무척 쉽다.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미끼만 던져도 잘 딸려 들어오니까.
레기아의 동작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공격 하나하나에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시작해볼까?’
가슴에 착용한 가죽 벨트를 슬쩍 풀었다.
그리고 레기아의 검에 내 검을 살짝 가져다 댔다.
채앵!
그러자 압도적인 힘에 내 검이 튕겨 날아갔다.
“끝이다!”
내 가슴을 향해 정직하게 날아오는 레기아의 검.
나는 가죽 벨트에서 비수를 하나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날아오는 레기아의 검을 향해 가죽 벨트를 휘둘렀다.
전날 빅터에게 당했던 기술을 따라 한 것이다.
팍!
예상하지 못했던 벨트 공격에 레기아가 손에서 검을 놓쳤다.
그러자 녀석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푹!
미리 쥐고 있던 비수로 레기아의 목을 찔렀다.
내게 체중을 한껏 실어 달려들고 있던 녀석은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컥······ 커헉······.”
목을 부여잡은 채 털썩, 무릎을 꿇는 레기아.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동자의 초점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허억, 허억, 허억, 헉.”
순간 다리가 휘청했다.
레기아를 죽이고 나자 긴장이 풀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허억, 가, 헉, 가자, 허억.”
나는 루시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조금 쉬다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루시아가 만류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세이프티 존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내 체력이 얼마 없긴 하지만, 시간을 주면 적들이 또 몰려올 수도 있었다.
‘10분, 20분 쉰다고 체력이 금세 회복될 것도 아니고.’
반대로 적들에겐 내가 쉬느라 허비할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당장 쓰러져 숨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나는 루시아를 데리고 곧바로 움직였다.
‘부디 세이프티 존 근처에 적들이 없어야 할 텐데.’
방금 전 몰려왔던 성기사들이 세이프티 존을 지키고 있던 녀석들.
그렇다면 정황상 그 근처에는 적이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나아가는 발걸음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안심할 만 하다 싶으면 자꾸 무슨 사건이 터지다 보니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으니까.
‘후, 다행이다.’
하늘 위로 높게 솟아있는 초록색 빛의 장막.
그 근처까지 다가갔지만 느껴지는 기척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안심하고 산을 오를 수 있었다.
‘겨우 도착했군.’
세이프티 존은 웬 동굴 앞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기, 헉, 여기로, 들어가, 허억.”
내가 동굴 안을 가리키자 루시아가 맨발 걸음으로 총총 움직였다.
그런데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세이프티 존 바로 앞에서 몸을 빙글 돌더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저······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의 인사에 나는 손을 들어 가볍게 화답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세이프티 존 안으로 한걸음 들어갈 때였다.
띠링!
[승리 조건1 : 악마 소환 의식에 사용될 제물을 구출하라―하얀빛이 흘러나옵니다.]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승리 조건2 : 악마 소환 의식에 사용될 성물을 파괴하라―자색빛이 흘러나옵니다.]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스토리 미션 <빛의 이면>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귓가로 들려오는 경기 종료 콜.
그 음성을 듣고서야 나는 온몸에 가득했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끝났다······.’
[기본급 x 5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공헌도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공헌도]
[렌 : 33%] [케일 : 20%] [도로시 : 13%] [슈우사쿠 : 10%] [엘론드 : 8%]
[이든 호크 : 4%] [위일정 : 4%] [브란트 : 4%] [고건무 : 2%] [게빈 : 2%]
33%.
생각보다 엄청 높게 나온 수치였다.
말하자면 혼자서 3인분을 했다는 뜻이었으니까.
2위인 케일과 3위인 도로시의 공헌도를 합쳐야 33%가 나오니, 혼자서 엄청나게 뛰어다닌 셈이었다.
띠링!
[스토리 미션의 공헌도 1위를 기록했습니다.]
[공헌도 1위를 달성하셨기 때문에 10,000 포인트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공헌도 1위를 달성하셨기 때문에 추가로 x 2 의 포인트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 179 의 코메인 이벤트 경기를 종료합니다.]
띠링!
[파이트 머니로 28,7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12,300 P 차감)]
[기본급 +3,500 P / 승리 수당 +17,500 P / 추가 보너스 +20,000 P / 수수료 -12,3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4,500 P 로 책정합니다.]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몸을 감싼 하얀 빛이 사라지자, 날 기다리고 있는 한 명의 여신과 다섯 명의 사람이 보였다.
아세리안은 두 손을 가슴께에 모은 채 서 있었고, 신입들과 이세연은 내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안우진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들을 보자 이번 경기가 무사히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내 앞에 다가와 고생했다며 조잘거리는 신입들을 가르며 아세리안이 다가왔다.
“고생 많으셨어요, 안우진님. 정말 멋졌답니다.”
아세리안이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치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다녀왔습니다.”
그날 저녁.
내가 경기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미리 파티를 준비해두라고 지시했던 아세리안 덕분에 곧장 파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띠링!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 179 경기가 모두 끝났습니다.]
[경기에 참가하신 모든 플레이어 분들, 진심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메시지는 그걸로 끝이었다.
퍼오블과 파오블을 하나도 수상하지 못했다는 것.
“아, 너무 아쉬워요. 퍼오블과 파오블 보너스 둘 다 메인 이벤트 경기를 뛰었던 플레이어들에게 돌아갔어요.”
아세리안이 상태창을 보다가 시무룩해졌다.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비록 퍼오블과 파오블 보너스에는 하나도 선정되지 않았지만.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느낌.
이 느낌이 너무 좋았다.
이렇게 앉아서 즐겁게 파티를 즐길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아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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