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빛의 이면(5)
그렇게 A-2 구역의 출구로 나가기 위해 모퉁이를 돌 때였다.
“저기 있다! 코빈, 어서 이곳에 침입자들이 있음을 알리고 와라!”
A-2 구역 방향에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뛰어오며 어느 정도 숨을 고른 덕분인지, 게빈의 검이 다시 힘차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막아! 버티기만 하라고! 버티기만 해도 우리가 유리하다!”
30명이 넘는 병사들이 앞을 막아섰지만, 게빈의 칼질 한 번에 두세 명씩 목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티기만 해라! 굳이 녀석들을 죽이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사이 성기사들까지 조금씩 합류하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중갑을 착용하고 있어서 좁은 곳에선 뚫기 힘든데.
젠장. 이제부터 내가 뚫어야겠어.
그런 마음으로 앞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마나의 유동?’
기사들의 뒤에서 마나의 유동이 느껴졌다.
씨발.
‘마법사!’
마법사들이 영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 진짜 마법을 쏘려고?
제물도 있는데?
‘진짜로 마법이 떨어지면 루시아를 지켜내기 힘들어.’
최대한 빠르게 뚫고 나가야 한다.
다행히 게빈이 기사들로 이뤄진 벽을 어느 정도 뚫어내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마법사에게 닿을 수 있다.
마침 어느 정도 마법사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게빈! 내가 앞장설······.”
【그림자 잠식!】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뭐지?
분명 전투 중이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한 침묵.
그때였다.
―빛이 강할수록 어둠도 진해지리라.
어디선가 이상한 이명이 들려왔다.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안식처. 힘을 빼고 모든 것을 어둠에 맡기거라.
그 이명은 점점 더 커져갔다.
하.
‘정신 계통 마법이었군.’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리 계열 마법이 떨어졌으면 루시아는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까.
어둠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누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얀색 로브를 입은 채 완드를 들고 있는 모습.
방금 전, 마법을 영창 하던 그 마법사였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부터 그대는 어둠과 한 몸이다. 이제 편안히 쉬어도 된다. 그대를 억누르고 있던 모든 것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으니.
하.
웃기고 있네.
나는 피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정신 계열 마법?
너 번지수 잘못 골랐어.
[정신 : 107(+18)]
내가 손을 맞잡자마자 어둠 속에 스며들어있던 마법사의 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검을 맞대는 소리. 피륙을 찢는 소리. 괴성과 고함.
그것들이 차츰 들려왔다.
‘다시 돌아왔군.’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였다.
내 머릿속에 또 다른 정신이 느껴졌다.
‘이건······ 마법사의 자아?’
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마치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팔다리가 하나 더 늘어난 느낌.
하지만 그 느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 엄청난 양의 정보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크윽.’
정말 엄청난 정보의 양이었다.
‘이건······?’
아덴마하를 점령하는 빛의 교단의 모습.
루시아를 납치하는 모습.
그녀의 몸에 악마를 빙의시키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까지.
‘저 마법사의 기억이었어!’
마법사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실 끊어진 인형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마법사의 기억을 받아들이자 지금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루시아를 죽이지 못했던 거군.’
굳이 엄청난 숫자의 제물을 바치지 않더라도 악마를 불러낼 수 있는, 신이 내려준 생명의 정수. 그게 루시아의 몸이었다.
‘잠깐, 이 정보는······?’
그리고 마법사의 기억에서 고건무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할 때였다.
순간 내 머리가 쪼개지는 느낌이 들었다.
‘크윽!’
어느새 게빈의 검이 마법사의 목을 자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내게 밀려 들어오던 정보가 뚝, 하고 끊겼다.
젠장.
잘하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는데.
“렌! 뭐 하고 있소! 어서 오지 않고!”
마법사까지 죽인 채 앞서 달리던 게빈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지금 우리는 사방으로 적들에게 둘러싸인 상황.
나는 서둘러 게빈의 뒤를 쫓았다.
미처 처리하지 못한 녀석들을 죽여 체력을 회복하며.
띠링!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다수를 상대로 한다면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싸울 수 있다는 것.
하얀 가면의 능력은 진짜 언제 봐도 사기급 능력이었다.
덕분에 저택을 들어온 이후 한 번도 쉬지 못했는데도 여전히 체력이 70% 가까이 남아있었다.
“으읍.”
그나저나 얜 왜 이렇게 꼼지락거려?
제물, 루시아가 자꾸 버둥거렸다.
그녀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몸의 균형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왜 그래?”
“으읍, 속이 안 좋아요.”
젠장.
내가 그녀를 안은 채로 계속 뛰어다니다 보니, 멀미를 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까 그녀의 얼굴이 제법 창백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상태를 봐가며 움직일 순 없는 상황.
“그렇게 괴로우면 기절시켜 줄게.”
“아, 아니에요. 최대한 버텨, 으읍.”
솔직히 내 몸에 토를 해도 상관없긴 한데.
문제는 토를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렇게 데려갈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잠깐 자고 있으라고.”
“아, 아니요. 괜찮아요. 어어, 괜찮다니까요오! 앗!”
루시아의 목을 손날로 가볍게 내리치자, 그녀가 축 늘어졌다.
무척 과격한 방법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컨디션을 신경 써가며 움직이기엔, 상황이 너무 급박했으니까.
나는 축 늘어진 그녀를 들쳐멘 채 빠르게 이동했다.
“헉, 헉. 출구일세.”
“조금만 더 고생하시죠.”
게빈이 빠르게 뚫어준 덕분에 A-2 구역의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케일 : 어디까지 갔지?
―렌 : 현재 저택 출구. 곧 있으면 영주성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듯.
―케일 : 알겠다.
케일에게서 여전히 메시지가 오는 걸 보니, 그도 아직까진 잘 버티고 있는 듯 싶었다.
저택을 나오자 쌀쌀한 밤공기가 우릴 맞이했다.
그런데 게빈이 오른쪽으로 틀지 않고, 계속해서 직진하기 시작했다.
“게빈! 그쪽 말고. 동쪽 성문으로!”
북쪽 성문으로 빠져나가는 것 역시 고건무가 짰던 탈출 루트.
지금으로선 이유야 어찌 됐든 배제해야 할 루트였다.
“헉, 허억, 헉, 헉.”
게빈의 숨소리가 무척 거칠었다.
빠르게 저택에서 벗어나는 것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체력 배분에 실패한 것 같았다.
“다시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저택의 바깥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모두 케일이 있는 내부 연회장으로 몰려 들어간 것 같았다.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영주성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조용하네.’
아덴마하의 밤은 무척 고요했다.
길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게빈의 숨소리만이 골목골목 퍼져나갈 뿐이었다.
‘다행이야.’
피범벅이 된 채 무기를 든 두 명의 괴한이 길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면 누구라도 소리를 질러댔을 테니까.
그렇게 달려가길 5분 여.
“저놈들이다! 잡아라!”
골목을 나서려는데 아덴마하를 순찰하고 있던 병사들이 우릴 발견하곤 소리쳤다.
피웅! 파바바바박!
“저쪽에서 신호용 폭죽이 터졌습니다!”
“그래? 모두 그쪽으로 이동한다!”
폭죽이 터지자 고요함에 잠겨있던 아덴마하가 삽시간에 시끌벅적해졌다.
“게빈, 이쪽으로!”
정보를 모을 겸 아덴마하를 돌아다녔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골목길이지만, 나는 어느 쪽이 막다른 골목인지 체크해 둔 상태였다.
초감각으로 병사들의 소리가 들리는 골목을 배제하며 돌아다니길 한참.
덕분에 전투를 최소한으로 줄인 채 아덴마하의 외곽까지 나올 수 있었다.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잘 닦인 대로변이 나왔다.
그 너머로 동쪽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앞에서 성문을 지키고 있는 적의 숫자는 기사 하나와 병사 열 명.
“내가 성기사! 게빈이 병사들을!”
“맡겨주시게!”
그사이 다시 숨을 고른 게빈이 힘차게 대답했다.
나와 게빈은 각자 상대할 적들을 나누고 성문을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마침 우리를 발견한 적들이 우왕좌왕하며 무기를 꺼내고 있었다.
“이봐! 성문을 닫아! 나머지는 침착하게! 우리가 막아낼 수, 컥!”
성기사가 병사들을 독려하며 검을 뽑아 들었지만, 나는 단숨에 녀석의 목을 날려버리곤 그대로 닫히려는 성문 밖을 빠져나갔다.
게빈 또한 순식간에 병사들을 처리하고 내 뒤를 따라왔다.
성문을 빠져나오자 잘 닦여 있는 길 끝에 산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그 산의 정상 부근에서는 초록색 커튼이 처져 있는 것처럼 빛나고 있는 세이프티 존의 모습이 보였다.
“수문장이 당했다!”
“화살! 화살을 쏴라!”
슈욱! 파바박-
우리가 밖으로 빠져나오자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젠장! 화살을 조심하시오!”
게빈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나대로 화살을 쏘는 궁수들에게 놀랐다.
설마 화살이 날아올 줄이야.
‘루시아의 존재 때문에 화살을 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다행히 우리가 빠르게 사정거리를 벗어난 덕분에 화살 공격은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피웅! 파바바박-
또다시 신호용 폭죽이 하늘에서 반짝거렸지만 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두 번째 큰 관문을 벗어났다.
이제 이대로 세이프티 존까지 가기만 하면 끝.
―렌 : 아덴마하 탈출 완료. 세이프티 존으로 이동 중.
나는 우선 케일에게 현재 위치를 얘기해 주었다.
우릴 위해 미끼를 자처하며 시간을 끌고 있는 중.
적어도 우리가 현재 어디이고, 어떤 상황인지 정도는 알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케일에게서도 곧바로 답장이 왔다.
―케일 : 다행이군. 조금만 더······ 고생해주게.
하지만 케일과의 메시지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띠링!
[플레이어 ‘케일’ 이 사망했습니다.]
순간 한숨이 나왔다.
결국 열 명 중 남은 사람은 나와 게빈.
단 둘뿐.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코메인 이벤트 스토리 미션 치고는 난이도가 그렇게 높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둘밖에 남지 않았다.
‘씨발. 모습을 바꾼 채 우리 사이로 스며들 줄이야.’
혹시 모른다.
슈우사쿠 조에서도 누군가가 모습을 바꾼 채 숨어들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슈우사쿠 조가 왜 그렇게 허무하게 전멸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성물을 파괴하지 않고 고건무가 계속 플레이어인 척 우리 곁에 숨어 있었더라면.
‘상상만으로도 오싹하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10분쯤 달리자 어느새 산의 입구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아덴마하를 빠져나오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거리가 충분히 벌어져서 우릴 따라잡진 못할 것 같았다.
“조금만 더 힘내시죠. 다 왔습니다.”
“헉, 헉. 괜찮소. 근데 체력이 무척 대단하군. 헉, 헉. 숨도 안 헐떡일 줄이야. 잠시 숨 좀 돌리고 가도 되겠소?”
“그럼 저라도 먼저······.”
게빈의 말에 나라도 먼저 세이프티 존으로 가겠다고 말하려 할 때였다.
순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멀리서.
타다다다다-
수없이 많은 말들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씨발.
이런 조그만한 성에 기사단까지 있다고?
게빈 또한 그 모습을 보더니 작게 읊조렸다.
“젠장. 아무래도 이렇게 쉬고 있을 시간이 없겠군. 어서 갑시다.”
나는 축 늘어진 루시아를 들쳐메고 빠르게 산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경사가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오르막길이라고 생각보다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산의 중턱쯤 도착했을 때였다.
그 사이 적 기마대 또한 산의 초입에 다다랐다.
‘젠장. 곧 따라잡히겠는데.’
경사가 그다지 가파르지 않다 보니, 말의 속도는 별로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우리와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질 거란 뜻.
‘어쩔 수 없지.’
나는 게빈이 따라오든 따라오지 못하든, 상관하지 않고 더욱 속도를 올렸다.
세이프티 존까지는 직선거리로 대략 2킬로미터.
오르막길이라고 하더라도, 15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헉, 헉, 헉, 헉.”
다행히 게빈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지만 용케 꾸역꾸역 잘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산의 중턱에 다다랐을 때였다.
‘분지?’
능선을 넘어오니, 움푹 들어간 지형이 보였다.
그리고 세이프티 존의 포탈은 분지에 있는 숲속 너머, 다시 경사가 시작되는 산 위에 있었고.
“일단 숲 안으로!”
게빈에게 소리친 나는 빠르게 숲속으로 질주했다.
나무가 빼곡하게 솟아있고, 바닥에는 뿌리들이 얼키설키 펼쳐져 있었다.
기마대의 속도를 조금이나마 줄여줄 거야.
그런 생각으로 숲 안에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푹-
순간 발이 땅속으로 쭈욱 빠졌다.
나도 모르게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지며 루시아를 놓칠 뻔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발을 빼보려고 했지만 쉽게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해서 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지옥의 무저갱처럼.
그제서야 나는 이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늪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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