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빛의 이면(4)
나는 고건무였던 얼굴을 내팽개치고 한쪽에서 병사들을 상대하고 있던 게빈에게 다가갔다.
내가 멱살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기자 그는 무척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그에게서 향수 냄새가 확 풍겼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당신이 고건무랑 계속 함께 있었을 텐데.”
“그, 그게······.”
말을 더듬으며 끝까지 잇지 못하는 게빈.
나는 그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빨리 말해.”
“아, 아까 휴식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와 헤어졌소. 그가 오랜만에 이런 곳에 왔으면 여자도 푸, 품어 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
씨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플레이어가 아니면 상태창을 볼 수 없을 텐데.
‘고건무는 분명 내 상태창을 읽고 대답했어.’
그럼 저 시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렌 : 이걸 못 보면 넌 죽는다.
“이봐. 내가 지금 상태창에 뭐라고 적었어.”
“그······ 못 보면 죽는다고······.”
후.
내 말에 게빈이 대답했지만, 이젠 이것 또한 신뢰할 수가 없다.
이미 고건무라는 선례가 남아있었기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일단 병사들 좀 막고 있어 봐.”
나는 게빈의 멱살을 풀어주고 제물을 바라보았다.
“이봐. 당신, 원래부터 그 얼굴이었어?”
“네? 저, 저요? 저는 교단이랑 무관한, 평범한 사람이에요. 진짜예요!”
갑작스레 자신을 쳐다보자 제물이 움찔 몸을 떨었다.
“원래 그 얼굴이었냐고. 시간 없어. 빨리 대답해.”
지금도 실시간으로 내부 연회장을 향해 병력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상황이 더럽게 꼬여있다 보니 마음이 급했다.
“제, 제 얼굴이 어떤데요······?”
제물은 자기 손으로 얼굴을 더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젠장.
나는 품속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사각 지역의 적을 볼 때 사용하는 손거울이었다.
내게 받은 거울로 얼굴을 들여다본 제물은 이내 경악했다.
“내, 내 얼굴이······ 왜······.”
하.
딱 보니까 그녀의 본래 얼굴이 아닌 것 같아 심란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행동에 경비병들이 대화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평소에 에밋이랑 안면이 있던 마법사님이 마법을 걸어 주셨다나 봐. 그년 남편이랑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다던데? 이래서 흑마법이 좋다니까.
젠장.
모습이 변한다더니, 이런 뜻이었어.
이건 거의 도플갱어나 마찬가지잖아?
고건무가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아예 다른 사람이었을 줄이야.
이런 상황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어쩐지 전원 생존에, 메시지 교환까지 하게 해준다는 특전까지 주더라니.
‘그럼 진짜 고건무는 어디에 있는 거지?’
그리고 만약 중간에 적들에게 잡혀 억류당한 거라면, 왜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지 못한 거지?
잡아놓고 고문을 한 거라면 메시지를 통해 구조요청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가짜 고건무는 어떻게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던 거고.
현재로선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 집중할 수밖에.
나는 제물의 손을 잡고 도로시를 향해 달려갔다.
또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이제부터 그녀를 내 곁에서 떼어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도로시는 화살에 뒤통수가 관통한 채 쓰러져 있었다.
누가 봐도 즉사.
“크윽.”
설상가상으로 케일의 허벅지에도 화살이 한 발 박혀 있었다.
이 화살은 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고건무가 도로시를 향해 쏜 화살을 몸으로 막아내려다 그중 한발이 허벅지에 박혔다.”
그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방패와 불에 타고 있는 성물의 모습이 보였다.
띠링!
[승리조건 2 : 악마 소환 의식에 사용될 성물을 파괴하라(완료)]
[이제부터 제한 시간이 사라집니다.]
[제물을 세이프티 존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면 미션이 완료됩니다.]
다행히 도로시가 죽기 직전 마법을 시전한 상태였다.
성물 파괴는 완료.
이제 도주만 하면 된다.
‘골치 아프네.’
그런데 문제는 파티장인 케일이 다리를 다쳤다는 것이다.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은 무리.
기동력에 큰 손실이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케일을 버리고 가는 수밖에.
‘젠장.’
그렇게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무거운 입을 열 때였다.
그런 내 표정을 읽은 건지 케일이 내게 지도를 건네며 말했다.
“렌. 이제부터 그대가 파티장이다. 당장 게빈과 함께 탈출로를 이용해 제물을 데리고 빠져나가라.”
“케일 님은······.”
“난 이곳에 남아서 최대한 시간을 끌겠다. 어차피 미션 완수만 되면 모두 부활하게 되니까, 그대는 어떻게든 미션을 완수할 생각만 하거라.”
내가 그에게 잔인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케일이 나를 배려해 주었다.
남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맡기기 껄끄러웠을 텐데.
다행히 케일이 합리적인 판단을 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감사함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예.”
내부 연회장을 향해 몰려드는 적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져 갔다.
게빈 혼자서 막는 것은 더 이상 무리.
‘이곳에서 더 이상 허비할 시간이 없어.’
사실상 이제 남은 인원은 나와 게빈 뿐.
둘이서 어떻게든 제물을 데리고 세이프티 존까지 향해야 한다.
‘진짜 짜증 나네.’
도무지 어떻게 가짜 고건무가 상태창을 읽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나는 게빈 조차도 믿을 수가 없는 상황.
사실, 고건무와 달리 게빈에게는 수상한 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고건무와 함께 붙어 다녔기에 그를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일 뿐.
그 이유 하나가 너무나도 컸다.
‘어쩔 수 없어. 이제부터 살얼음판을 걷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진행할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케일이 잠깐이나마 시간을 벌어줄 것이란 점.
그사이 못해도 이 저택 정도는 빠져나가야 했다.
“게빈! 내가 오른쪽!”
나는 제물의 손을 잡은 채 연회장의 입구로 빠져나갔다. 내가 가세하자 점점 쌓여가던 병사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한동안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더니 입구에 모여든 병사들을 모두 죽일 수 있었다.
“게빈, 이제부터 제가 리딩합니다. B-2 구역으로!”
“알겠네.”
입구를 뚫어놓은 지금이 기회였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게빈이 내부 연회장을 나서는 사이, 나는 케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피우며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한다, 렌.”
“최선을 다하죠.”
나 또한 그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제물에게 손을 뻗어 그녀를 어깨에 들쳐멨다.
“꺅!”
“얌전히 있어. 여기서 빠져나가면 내려 줄 테니까.”
외간 남자에게 몸을 맡기는 게 어색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젠장. 왠지 창을 써야 할 것 같은데.’
게빈과 나, 둘이서 세이프티 존까지 향해야 하는 상황이다.
순식간에 난이도가 수직 상승.
하지만 나는 창을 꺼낼 수 없었다.
한 팔로는 그녀를 들고 있어야 하니까.
창을 한 팔로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제물을 내려놓을 순 없어.’
그녀의 걸음걸이로는 우리를 따라올 수 없을 테니까.
“저기에 마지막 잔당들이 있다! 잡아라!”
“놈! 거기 서라!”
제물을 들고 내부 연회장을 빠져나오자, 복도 끝에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그들의 반대편, B-2 구역 쪽을 향해 달렸다.
등 뒤로, 발을 질질 끌면서 나오는 케일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여길 지나려면 나부터 쓰러트려야 할 것이다.”
케일의 묵직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다리를 다쳤기에 전처럼 엄청난 무위를 보여주진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끌어줄 순 있을 것이다.
‘최대한 오래 버텨 주길.’
미로와 같이 꼬여있는 복도를 내달리자, 곧 앞쪽에서도 병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씨발.
끝이 없네.
“놈들이 뚫고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라!”
“방패병이 앞쪽에서 방패를 들고 벽을 만들어라!”
케일 쪽에서 몰려오는 숫자보다는 확연히 적었지만, 그것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
“게빈!”
“지금부턴 내가 뚫고 가지!”
게빈이 순간적으로 바닥을 박차며 나아가더니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와, 뭐야?’
게빈의 검이 화려하게 춤을 출 때마다 두세 명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지금까지 조용해서 잘 몰랐는데 엄청난 실력.
“놈들은 고작 두 명뿐이다! 물러서지 마라! 그럼 막을 수 있다!”
병사들의 지휘관인듯한 자가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게빈이 뿜어내는 살기가 복도를 잠식하며 병사들이 조금씩 뒷걸음질 치고 있었으니까.
찌릿찌릿.
살기가 얼마나 진득한지, 뒤에 있는 나도 저릿저릿할 정도였다.
병사들이 차츰 물러서기 시작하자 꽉 막혔던 복도에 조금씩 틈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러서지 마라! 빛께서 우릴 인도, 컥!”
게빈은 그 비좁은 틈을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병사들을 뚫어내더니 이내 적 지휘관의 목까지 쳐버렸다.
‘됐어. 이 정도면 창을 쓰지 않아도 가능성이 있어.’
뒤쪽은 케일이 막아주고 있어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앞쪽은 이 복도만 나서면 곧 B-2 구역의 출구가 나온다.
출구를 통해 저택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큰 고비는 넘긴 셈.
한 팔로 거의 40에서 50킬로그램 가량 나가는 여인을 든 채 움직이다 보니 체력소모가 무척 컸는데, 그것 또한 크게 우려할 필요가 없었다.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부족한 체력은 게빈이 흘리고 간 병사들을 죽여서 회복하면 되니까.
오히려 지금 상황에선 병사들이 다가와 주는 게 나에겐 더 이득인 상황이었다.
“힘들지 않소? 교대해 줄 수 있소만.”
게빈이 빠르게 내달리는 중에도 뒤를 힐끗 보며 말했다.
“괜찮습니······.”
“놈들이 저기 있다! 막아!”
젠장.
대답할 시간도 없네.
“체력이 대단하시오.”
병사들의 외침을 무시한 게빈이 감탄하더니 다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선 내가 제물을 들고 다니는 게 맞았다.
괜히 게빈이 제물을 들고 다니다가 체력이 빠지면 전력 공백이 생기니까.
현재 남은 인원은 나와 게빈, 달랑 둘 뿐.
여기서 케일 급의 강자인 게빈이 빠진다면 너무나 뼈 아픈 손실이다.
‘결국 체력을 계속 회복시킬 수 있는 내가 들고 다닐 수밖에.’
게빈이 앞에서 길을 뚫고, 내가 남은 병력을 처리하며 달리길 한참.
어느새 복도 두 개만 건너면 B-2 구역의 출구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점점 몰려드는 병력이 많아지고 있어.’
심지어 우릴 막아서는 병력도 경비병에서 정예병 급으로 수준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후우. 스읍. 후우.”
호흡이 제법 거칠어진 게빈.
움직임 또한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오면서 정신없을 정도로 적들이 몰아친 탓이었다.
“게빈, 이제부터 교대하죠!”
나는 조금씩 속도를 올려 게빈을 추월했다.
그러자 게빈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제물을 내게 맡기시오!”
“내 이름은 제물이 아니라 루시아인데······.”
그리고 이어지는 제물의 조그마한 목소리.
나는 제물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게빈에겐 손을 내저었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게빈에게 제물, 그래 루시아. 얘를 맡기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가면을 통해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상황.
오히려 그에게 잠시라도 쉴 시간을 주는 게 더 낫다.
그가 체력을 회복해야 전력의 손실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러다가 제물이 눈먼 칼에 맞기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게빈이 내게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적들의 지휘관이 대신 해주었다.
“놈의 품에 안겨 있는 제물에게는 절대 검을 휘두르지 마라! 절대! 절대 안 된다!”
적 지휘관의 반응으로 보아 다른 사람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루시아에게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길을 뚫고 나가는 게 더욱 수월해졌다.
내가 다가갈 때마다 병사들이 움찔하며 공격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젠장! 조심하시오! 우리의 목숨도 달려 있으니! 특히 눈먼 칼을!”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지 게빈이 두 번, 세 번 내게 당부했다.
걱정 붙들어 매라고.
공격에 망설이는 적을 상대론.
한쪽 팔밖에 쓰지 못해도 이 정도는 충분하니까.
띠링! 띠링!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빠르게 병사들을 정리한 나는 곧바로 방향을 틀어 B-2 구역에 있는 출구로 나가려 할 때였다.
깜깜한 복도.
‘왜 여기만 불이 꺼져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 때였다.
복도 너머로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평범한 상황인데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가 끼어들어가 있어 거슬리는 느낌.
“헉, 왜 안 가고 멈췄소? 뒤쪽에서 병사들이 오고 있소. 어서 서둘러야······.”
“쉿.”
나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게빈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얼마나 더 대기해야 하는가.
―조금만 더 기다려. 곧 이쪽으로 올 테니까.
그리고 들려오는 아주 작은 말소리.
뭐지? 우리 탈출로를 어떻게 알고 적들이 숨어 있······.
‘아.’
순간 내 머릿속이 번쩍했다.
당장 정신없이 싸우며 제물을 데리고 탈출할 것만 생각하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탈출로를.
고건무가 짰었지.
아무리 급박하다고 이런 간단한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을 줄이야.
‘고건무, 이 개새끼.’
나는 이를 빠득 갈았다.
그때 게빈이 입을 열었다.
“A-2 구역으로 나가는 건 어떻소? 여기서 복도 하나만 건너면 되오만.”
‘거기다!’
마침 슈우사쿠가 탈출로로 적당하지 않겠냐고 했던 곳이었다.
“바로 그쪽으로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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