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빛의 이면(3)
남은 시간을 힐끗 살펴보니 11시간 14분이 찍혀 있었다.
제대로 미션이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반이나 죽었다.
‘역시 함정이었어.’
문제는 제물 구출조가 함정임을 인지하고 갔는데도 모두 죽었다는 거다.
그들의 전력이 성물 파괴조와 큰 차이가 없는데도.
만약 이곳에도 그런 함정이 존재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군.’
사제와 마법사들은 우리가 들어올 때부터 마법진을 향해 영창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규모 마나의 유동이 느껴졌지만 우릴 향한 공격 마법을 준비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갑자기 마법 공격이 들어올지 모른다.
일단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곧장 자리를 피해야 한다.
‘그래도 이곳에 성물과 제물이 함께 있어서 다행이야.’
만약 제물이 이곳에 없었다면, 우리는 몰려드는 경비병들을 뚫으며 제물이 어디 있는지 찾아다녀야 했을 것이다.
“침입자다!”
“교단의 의식을 방해하려는 저 이단들을 죽여라!”
우리의 등장에 내부에 있던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있던 성기사들이 검을 뽑은 채 우리에게 달려왔다.
다행히 케일이 금세 정신을 차리고 우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게빈! 그대가 고건무와 도로시를 지킨다.”
“알겠소.”
“렌! 그대가 제물이 있는 곳까지 뚫고 들어가서 제물을 구출하라!”
“알겠습니다.”
“고건무는 나를 엄호, 도로시는 광역 마법을 준비한다.”
“옛.”
“알겠어요.”
“나는 성물을 파괴하겠다. 서둘러!”
케일의 지시에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회장 한가운데에는 빨간 머리에 하얀 로브를 쓴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둘이 완벽하게 똑같이 생겼다는 것.
‘어떻게 저기까지 가지?’
내부에 있는 성기사의 숫자는 대략 4, 50 명.
뚫고 들어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정면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은 보류.
차라리 외곽으로 최대한 돌아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마침 케일이 놈들의 시선을 끌어주고 있기도 하고.’
케일은 전략이고 뭐고 일단 한가운데로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기사 출신이라서 그런가, 나아가는데 거침이 없었다.
물론 그가 당당하게 정면 돌파를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엔 그의 실력이 뒷받침 되어 주었기 때문인 것도 있을 것이다.
케일의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성기사가 한 명씩 쓰러졌고, 그의 방패는 무척 견고해서 성기사들의 공격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뒤쪽에 있는 도로시와 고건무를 노리고 달려들던 성기사들도 이내 방향을 바꿔 케일에게 몰려들었다.
‘빈틈!’
나는 재빨리 연회장의 외곽 쪽으로 빠져나와 크게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외곽에는 주로 사제와 마법사들이 몰려 있었다.
“어딜!”
내가 그들을 향해 달려가자 케일에게 몰리던 성기사들이 급하게 방향을 틀어 내게 달려들었다.
‘충분히 파고들 수 있어.’
무거운 중갑을 입은 채 쿵쾅거리며 달려오는 성기사들.
그들이 속도는 빠를지 모르지만, 무거운 중갑으로 인해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은 굼뜰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나는 얇은 가죽 갑옷 위에 로브만 걸친 상태. 무게중심의 이동이 그들보다 훨씬 수월하다.
나는 지그재그로 녀석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나를 잡기 위해 움직이던 성기사들이 역동작에 걸리며 빈틈이 생겨났다.
“안 돼!”
내가 그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가자 성기사들이 절규하며 급히 쫓아오기 시작했다.
마법사들과 사제들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피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서걱-
칼질 한 번에 마법사 두 명의 목이 떨어졌다.
“젠장, 저놈부터 죽여! 아니, 이 병신들아! 다 같은 방향으로 가면 어떻게 해? 몇 명은 저 쥐새끼가 향하는 방향의 사제님들을 지키러 가야 할 거 아냐!”
성기사 한 명이 악다구니를 쓰며 나를 쫓아왔고,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던 다른 성기사들은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나를 몰아서 사냥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이런 몰이사냥이라면 이골이 나 있다는 거지.’
바로 얼마 전에 12시간 동안 몰이를 당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초감각으로 인해 섬세하고 넓어진 시야 덕분에 급박한 와중에도 내가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찾을 수 있었다.
서걱-
그 사이 몇 명 더 목을 베어주고.
“이놈! 신을 모시는 사제를 그렇게 죽여대다니. 빛의 진노가 두렵지 않은 게냐!”
“그쪽으로 빠져나간다! 어서 거리를 좁혀! 젠장!”
마법사나 사제들은 육망성 마법진을 향해 영창을 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전투 불가 상태다.
그들의 숫자를 아무리 줄여도, 당장 우리가 싸워야 할 성기사의 숫자는 그대로.
하지만 나는 집요하게 마법사나 사제들만 죽이면서 돌아다녔다.
내 행동은 내게 몰려드는 성기사의 숫자를 더욱 늘어나게 만들었고.
덕분에 그들의 진형이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엄청 세네.’
케일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돌아다니며 성기사들을 각개격파하고 있었다.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성기사의 숫자만 스물이 넘을 정도.
나는 사제와 마법사들을 죽이러 다니기 여념이 없었고, 도로시는 여전히 영창 중.
고건무는······.
팅!
마침 성기사의 플레이트메일을 튕겨 나가는 화살.
‘쯧.’
중갑을 입은 성기사들에겐 통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 마법사나 사제들이라도 좀 줄여 주지.
‘상황 판단 하고는.’
여하튼 말하자면 케일 혼자 20명이 넘는 성기사들을 쓰러트렸다는 뜻이었다.
‘슬슬 제물을 구해야겠어.’
이 정도면 충분히 육망성 내부로 파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하얀색 빛이 흘러나오는 여인 쪽으로 방향을 틀자 성기사들이 외쳤다.
“어차피 녀석의 목적은 성녀님과 제물이다! 모두들 가운데로 모여!”
아주 살짝 방향을 틀었을 뿐인데 제법 눈치가 빠르군.
하지만 상관없다.
왜냐하면 내가 더 빠를 테니까.
“안전하게 구해줄 테니 얌전히 있어.”
“꺅!”
순식간에 도착한 나는 제물을 어깨에 들쳐메고 다시 외곽 쪽으로 달렸다. 로브 너머로 잘게 떨리고 있는 그녀의 몸이 느껴졌다.
“젠장! 녀석이 제물을 탈취했다! 어서 잡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나를 쫓는 성기사를 뒤로하고 나는 주위를 살피며 전황을 확인했다.
이미 절반 가까이 되는 성기사들이 쓰러져 있었고, 케일도 성물까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더 이상의 도주는 의미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적들의 숫자를 줄여야 할 때.
나는 제물을 연회장 구석에 내려놓고, 그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눈에 불을 켠 채 달려드는 성기사들.
“이 쥐새끼 같은 놈. 죽어!”
챙!
연회장의 구석진 곳이기에 공간이 좁다.
덕분에 한 번에 두 명 이상의 성기사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됐다.
‘이제부턴 버티기만 하면 돼.’
지금도 케일이 종횡무진하며 적들을 쓰러트리고 있는 상황.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급변했다.
“제길! 제물을 빼앗겼소! 모두들 캐스팅을 멈추고, 적부터 상대하시오!”
단상 위에서 영창을 하고 있던 사제의 외침에 모든 마법사와 사제들이 캐스팅을 멈춘 것이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사제와 마법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멈추다니, 상황 판단이 느리네.’
성기사들은 여전히 스물 이상 살아있는 상태.
여기서 마법사와 사제들까지 가세를 한다?
전황은 순식간에 우리에게 불리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우리도 마법사가 있거든.’
심지어 그 마법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마법을 쓰지 않은 채 영창만 했다.
엄청난 대단위 마법이 펼쳐질 거라는 뜻.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성기사들 사이로 도로시를 힐끗 봤다.
그녀의 영창이 어느덧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마법 주문.
【폭렬하는 붉은 꽃잎!】
도로시의 손에서 작은 구체 하나가 빠르게 중앙으로 향하더니 이내 바닥에 팍, 하고 떨어졌다.
순간 엄청난 열기와 함께 불꽃이 화르륵 퍼져나갔다.
갑작스러운 마법 공격에 연회장 내부에 있던 적들이 움찔했다.
“별것 아니군. 그대로 계속 공격하라!”
마법이 퍼지는 걸 본 성기사 하나가 외쳤다.
뜨겁긴 하지만 그렇게 위력적인 마법은 아니었기에.
다른 성기사들도 잠시 곁눈질로 마법의 위력을 가늠하더니 이내 다시 등을 돌려 검을 휘둘러왔다.
그때였다.
【퍼져라!】
이어지는 도로시의 손짓에 퍼져가던 불꽃이 강하게 회전하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아름다운 빨간 꽃잎이 바람에 날려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끄아아악!”
“살려줘어!”
“보호막! 으아아아!”
하지만 그 위력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마법은, 순식간에 화염 토네이도가 되어 범위 안에 있던 적들을 집어삼키더니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허······.’
그동안 수많은 마법을 봐왔던 나로서도 놀라움을 숨기지 못할 정도의 위력.
항상 개인 PvP만 뛰었던 나로서는, 긴 시간 제대로 마음먹고 영창해서 펼쳐진 마법을 사실상 처음 봤다.
개인 PvP에서 만나는 마법사들은 대개 정통 마법사라기보단, 전투 마법사에 가까웠으니까.
‘만약 내가 저 범위 안에 있었다면?’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이곳까지 범위가 미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제물을 지키지 못했을 테니까.
물론 제물이 있는데 그 위에 마법을 뿌릴 만큼, 도로시가 멍청하진 않았겠지만.
“으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미리 보호 마법을 펼친 몇 명의 사제와 마법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법에 의해 잿더미가 된 상태였다.
애초에 두 발로 서 있는 사람 자체가 몇 명 되지 않았다.
‘케일은?’
다행히 케일은 성기사들의 시체를 쌓아두고, 방패 뒤에 숨은 채 마력을 펼쳐놓고 있었던 덕분인지 갑옷이 검게 그을린 것을 제외하곤 멀쩡해 보였다.
나는 서둘러 성물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아쉽게도 붉은 머리에 하얀색 로브를 쓰고 있는 여인은 보호 마법 아래에서 성물과 함께 무사한 상태였다.
‘아마 저 여인이 이 교단의 진짜 성녀겠지.’
전황이 불리해지자, 성녀가 성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성물을 들고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케일! 성물부터!”
내 외침에 케일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성녀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그사이 나는 제물의 손을 잡고 게빈 일행과 합류했다.
케일이 성물만 되찾으면 이 안의 상황도 거의 끝나가는 상황.
이제 탈출로를 이용해 벗어날 생각을 해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가가고 있는데, 고건무가 케일 쪽 방향을 응시하더니 순간 움찔했다.
‘뭐지?’
고개를 돌려보니 케일이 이미 성기사들을 모조리 죽이고, 마침 성녀의 목을 베고 있었다.
정말······ 압도적인 무위였다.
케일은 목이 떨어져 나간 시체를 치우고, 그 아래에서 성물을 챙겼다.
“도로시, 이쪽으로!”
내부에 더 이상 적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
도로시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케일에게 다가갔다.
“이 성물을 마법으로 없애라.”
“네.”
케일의 말에 도로시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나는 제물을 데리고 연회장 바깥의 복도를 살폈다.
그러자 엄청난 숫자의 적들이 연회장 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중 몇명은 이미 코 앞에 도착해 있었다.
고건무도 그 소리를 들은 것인지, 케일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장! 적들이 오니 일단 피한 다음에 성물을 파괴하는 걸로 하시죠!”
“아니. 아무리 급해도 성물을 먼저 처리한 다음에 움직이는 게 맞다. 도로시, 서둘러 다오.”
도로시가 영창을 시작하고, 케일은 한숨 돌릴 겸 방패를 바닥에 내린 채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나는 내부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려는 세 명의 병사를 가볍게 죽였다.
그때였다.
고건무가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고 있었다.
알게모르게 녀석이 신경 쓰였기 때문에 미리 알아차릴 수 있었던 행동.
내부의 적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화살을 꺼낼 이유가 없었다.
‘이 새끼!’
고건무가 화살을 시위에 걸지도 않았지만 내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검을 뽑아 든 채 고건무에게 달려들었다.
뿌드득-
그 사이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있는 고건무.
겨냥하는 목표물은.
영창을 하고 있던 도로시.
【사그라드는 연홍 눈물!】
‘안 돼!’
서걱-
나는 곧바로 고건무의 목을 쳐버렸다.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날아가는 세 발의 화살.
피웅!
푹! 푹! 푹!
내 귓가로 소름끼치는 세 번의 피륙음.
띠링!
[플레이어 ‘도로시’가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도로시의 사망 콜.
‘아······ 젠장.’
피를 뿌리며 목이 잘려 쓰러지는 고건무.
녀석의 목이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뭐지?’
알 수 없는 불안감.
하얀 가면의 체력 회복 콜이 뜬 것만 봐도 고건무가 죽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고건무의 사망 콜이 뜨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씨발. 고건무가 아니라는 뜻이잖아.’
나는 서둘러 굴러떨어진 고건무의 머리를 들었다.
그곳엔,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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