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붉은 깃발(5)
“후.”
간담이 서늘하다.
앞에는 창술사가 창을 겨눈 채 노려보고 있고, 뒤에서는 검객이 달려오고 있다.
둘 다 수준은 하위리그 준컨텐더 급.
못해도 두세 경기를 더 치르면 컨텐더의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을 정도다.
‘일단 거리를 벌려야 해.’
앞뒤로 쌈 싸먹히는 건 곤란하다.
나는 곧장 방향을 틀어 바다 쪽으로 내달렸다.
“놓칠 줄 알고!”
쐐애애애액!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소리.
그 안에 담긴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미약하게 빛이 나는 것 같기도······.
‘빛?’
나는 서둘러 바닥을 박차고 점프했다.
콰아아앙!
창이 간발의 차이로 내 발밑을 지나 땅에 부딪혔다.
‘씨발!’
벌써부터 창에 오러를 담아 던지는 수준이라니.
핑! 핑! 핑!
빠르게 세 발의 화살을 날렸다.
솔직히 맞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건 말하자면 견제용.
녀석의 속도를 늦추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질주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는가?”
무척 부드럽고 여유로워 보이는 목소리.
하지만 내 귀에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돌려보자 뒤에서 쫓아오던 검객이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렇게 도망치기만 해서는 153명이나 죽일 수 없었을 터. 내게도 그 실력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네만.”
“헉, 헉.”
어떻게 하지?
창술사도 그렇고, 눈앞의 검객도 그렇고 무척 여유로워 보인다.
체력이 충분하다는 뜻.
어쩐지 2위와 3위의 킬 수가 더 이상 오르지 않기에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 순간을 위해 체력을 충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답을 알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하루종일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머리 굴릴 시간이 있었어야지.’
매 순간 다급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내 체력이 얼마나 남았지?’
[남은 체력 : 24%]
현재 나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지금까진 어떻게 정신력으로 버텨왔지만, 슬슬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거리를 벌리는 것은 불가능해.’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검객과 창술사의 민첩은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높은 수준이다.
화살로 견제를 하지 않는 이상 거리를 벌릴 수 없다.
문제는 놈들이 두 명이라는 것이다.
검객에게 견제를 하려고 속도를 늦추면 창술사와 가까워지게 되고, 창술사를 견제하려고 속도를 늦추면 검객이 칼을 들이밀 것이다.
더 이상 도망치는 건 체력 낭비가 될 가능성이 컸다.
‘이럴 때 녀석들은 어떻게 했더라······.’
상위리그에서 만난 궁수들은 거리가 가까워져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거리가 멀면 먼 대로,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날 괴롭혔었다.
‘그때 분명 베일리 녀석이······.’
“후후, 이제야 싸울 마음이 좀 생겼는가.”
내가 속도를 늦추자 검객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녀석이 들고 있는 검에는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래.
베일리 녀석은 화살을 급소에 박아넣는 데에만 사용하지 않았다.
‘먼저 내딛는 발의 허벅지 쪽으로 한 발을 쐈고.’
핑!
내가 쏜 화살에 검객이 허둥지둥대며 몸을 틀었다.
무게중심이 잔뜩 들어간 오른쪽 다리로 화살이 날아가자 저도 모르게 급하게 피한 것이다.
‘이어서 머리 쪽을 겨냥해서 한 발을 쐈지.’
핑- 챙!
검객의 이마로 날아가는 화살을 검객이 서둘러 검으로 쳐냈다.
자세가 흐트러진 상태에서 날아오는 화살까지 막아내느라 그의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빈틈!’
핑!
시위를 떼자 화살이 쏜살같이 검객에게 날아갔다.
목적지는 바로 심장.
푹-
“크윽!”
‘아쉽네.’
화살은 검객의 왼쪽 어깨에 박혀있었다.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 마지막 화살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검객이 몸을 틀어 왼쪽 어깨를 내민 것이다.
“흐흐, 넌 내 거다!”
검객은 화살이 박히자마자 몸을 뒤로 뺏다.
이어지는 화살의 추가 공격에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검객에게 화살을 쓸 겨를이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창술사가 창을 찌르며 들어왔다.
녀석의 창에는 오러가 서려 있었다.
챙!
나는 소매에서 단검을 빼 녀석의 창을 흘려냈다.
내 왼손에는 활이, 그리고 오른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막아? 내 창을?”
정확히는 일점을 찌르고 들어오는 창의 방향을 튼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창술사는 제법 놀란 눈치였다.
아쉽지만.
‘창에 한해선 내게 안 되지.’
“쓰읍, 어딜!”
내가 자세를 낮추고 녀석의 품으로 달려드려는 자세를 취하자 창술사가 순식간에 뒷걸음질을 쳤다.
스텝이 제법이긴 한데, 애초에 나는 달려들 생각이 없었다.
오른손에 들려있는 단검을 녀석의 가슴으로 던지고 바로 화살을 다발로 꺼내 시위를 당겼다.
핑!
화살의 속도가 훨씬 더 빠르다 보니 거의 동시에 날아가는 단검과 화살.
창술사가 몸을 숙이며 화살을 피하고, 창대로 단검을 쳐냈다.
그러다 보니 녀석의 자세도 어정쩡해졌다.
‘잘 가라.’
핑! 핑! 핑! 핑! 핑!
이어지는 다섯 발의 속사.
“흡!”
창술사가 급히 창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내려고 했지만······.
허벅지와 명치, 심장, 목, 이마로 날아가는 다섯 발의 화살을 모두 쳐내진 못했다.
푹.
띠링!
[플레이어 ‘르노바’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그제야 내가 뭘 착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활을 단순하게, 적의 급소로 꽂아 넣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활도 검이나 창이랑 똑같아.’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정직하게 급소에 꽂아 넣을 생각만 해서는 적을 쓰러트릴 수 없었다.
오히려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쏴서 적을 조금씩 무력화시켜야 했다.
띠링!
[<상급궁술>을 각성하셨습니다.]
‘빙고.’
역시.
이게 정답이었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25(+4)] [민첩 : 38(+6)] [체력 : 41(+7)]
[정신 : 105(+17)] [지력 : 14(+2)] [마력 : 0]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중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상급궁술>]
[보유 스킬(0/5) : 없음]
[업적 특전 : 모든 스텟 + 20%]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남은 체력 : 23%]
“정말 대단하군. 과연 처음부터 지금까지 깃발을 지켜낸 이유가 있었어.”
“······.”
“방금 전엔 정말 아찔했다네. 그런 방식으로 화살이 날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단 말이지.”
검객은 왼쪽 어깨에 화살이 박혀있음에도 무척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내 등으로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방금전에 죽은 녀석이 킬 수 2위였던가?
그렇다면 눈앞의 검객이 킬 수 3위였던 빅터일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생존자 수 : 64 명]
[붉은 깃발 소지 플레이어 ― ‘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32:45]
[킬 수 현황]
[1위. ‘렌’ 154킬]
[2위. ‘빅터’ 59킬]
[3위. ‘애커만’ 11킬]
[4위. ‘서문창’ 7킬]
[5위. ‘로렌스’ ······]
이제 강적이라고 할 만한 녀석이 빅터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녀석만 처리하면 돼.’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녀석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 힘이 솟아났다.
녀석만 처리하면······.
12시간의 대장정이 막을 내린다.
“다시 한번 놀아보세!”
빅터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게 쇄도했다.
핑! 핑! 핑!
나는 뒤로 점프하며 연속으로 세 발을 쏜 뒤에 몸을 틀어 바닷가 쪽으로 내달렸다.
녀석에겐 안됐지만, 이 싸움은 이미 내 쪽으로 승부가 많이 기울었다.
녀석은 어깨에 화살을 맞아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상태.
그렇다면 빠르게 달릴 수가 없다. 무게중심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달릴 때 괜히 양팔을 앞뒤로 흔드는 것이 아니다.
‘이대로 녀석과의 거리를 계속 벌리면서 활을 쏘기만 하면······.’
슈우욱-
뭐지?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에 나는 서둘러 몸을 틀었다. 그러자 빅터가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롱소드가 내게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미친!’
지가 들고 있는 검을 던져?
하필 검이 날아오는 위치가 절묘했다.
피하기엔 이미 늦었고.
‘어쩔 수 없지.’
나는 들고 있던 활을 휘둘러 날아오는 검을 쳐냈다.
챙!
파륵!
검과 부딪힌 활시위가 끊어지며 활대가 꼿꼿하게 펴졌다.
젠장.
이제 화살을 쏠 수 없다.
‘인벤토리 오픈!’
나는 활대를 내팽개치고, 바로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들었다.
‘하, 결국 꺼냈네.’
최대한 활의 숙련도를 높이고 싶었는데.
‘넌 죽었어.’
“껄껄, 이런 행운이 있나. 그저 멈춰 세우는 걸로 만족하려 했는데, 하필이면 활대가 끊어지다니.”
빅터가 허리춤에 걸려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길이가 짧고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는 검, 시미터였다.
내 남은 체력은 그새 1% 더 줄어 23%.
아직 팔팔해 보이는 빅터와 다르게 나는 무척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헉, 헉.”
하지만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호오, 도망치지 않고 맞서려는가? 정말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궁수를 만났구나. 어디, 창술 실력 좀 볼까?”
흐읍!
서로에게 무기를 겨눈 채로 천천히 거리를 좁히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서로에게 검과 창을 찔러넣었다.
‘······!’
이렇게 서로가 검을 맞대자마자 알 수 있었다.
빅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수였다.
챙! 채챙! 챙!
‘이런 녀석이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름 고급창술을 가지고 있는 만큼 하위리그에서는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활로 상대할 때는 알 수 없었던 실력이었다.
마치 상위리그 플레이어를 상대하는 느낌.
그의 검은 폭풍 같았다.
몰아치는 공격을 단순히 막는 것에 급급할 정도로.
초감각이 없었으면 진즉에 목이 꿰뚫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생각보다 스텟 차이가 심하네.’
하지만 나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나보다 스텟이 높은 상대를 만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차피 테크닉은 내가 한 수 위야.’
쉭! 쉬익! 쉬쉭!
내 창이 바람을 가르며 빅터에게 쇄도했다.
체력도 부족하고, 속도로 거리를 벌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내 창술로 녀석에게 거리를 주지 않는 수밖에.
“궁수가 아니라 창술사였던가!”
빅터가 뱀처럼 휘어져 들어오는 창을 막아내며 감탄을 터트렸다.
나는 그가 순간적으로 대쉬해서 품속으로 들어오려 할 때마다 하체를 견제하며 거리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내 체력이 너무 부족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발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허억, 허억, 헉, 허억.”
이를 악물고 다가오지 못하게 견제하길 한참. 나는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며 빅터에게 창을 찔러 넣었다.
“하하, 조급했구나! 이런 실수를!”
그러자 빅터가 창을 피하며 내게 파고들었다.
그의 검이 내 심장을 향해 날아왔다.
‘걸렸어.’
나는 앞으로 나아가던 자세에서 순간적으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며 뒤로 빠져나갔다.
조급했던 건 내가 아니라, 빈틈이 보인다고 바로 파고든 빅터였다.
챙!
창자루로 쭉 뻗은 팔을 때리자 빅터가 순간적으로 검을 놓쳤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검을 창날로 쳐냈다.
빅터의 시미터가 내 창에 튕겨져 날아갔다. 내 찌르기의 목표는 애초에 목이 아닌, 빅터의 시미터였던 것이다.
‘내가 이겼어.’
빅터는 현재 무방비 상태.
더 이상 내 창을 막아낼 무언가가 그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창이 빅터의 가슴을 찌르려는 순간!
챙!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강한 충격에 내 창 또한 튕겨 날아간 것이다.
뭐지?
빠르게 백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벌리자 빅터의 손에 들려있는 허리띠가 보였다.
‘허리띠!’
그 짧은 순간에 허리띠를 풀어 내 창을 막아낸 것이다.
제길.
허리띠를 채찍처럼 휘두를 생각을 하다니.
단순히 검만 잘 쓰는 게 아니구나.
빅터는 진짜 싸움꾼이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이든 활용하여 상대를 공격할 줄 아는 싸움꾼.
“헉, 헉, 헉, 헉.”
나는 서둘러 화살을 꺼내 손에 쥐었다.
맨손보다는 뭐라도 쥐고 있는 게 훨씬 나으니까.
이제 서로의 손에는 화살과 허리띠만 남은 상태.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03:12]
남은 시간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안도감이었다.
‘살았다.’
이 정도 시간이면 괜찮아.
충분히 버틸 수 있어.
손에 든 화살로는 빅터를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상대하지 않고 거리만 벌리면 된다.
빅터는 왼쪽 어깨에 입은 상처 때문에 빠르게 달릴 수 없을 테니까.
빅터 또한 남은 시간을 본 것인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또한 알고 있으리라.
내가 맞상대하지 않는다면 3분이란 시간 안에 나를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렌이라······ 이런 곳에서 그대와 같은 고수를 만날 줄 몰랐군. 새삼 콜로세움이 넓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네.”
‘누가 할 소리를.’
설마 하위리그에서 내 창을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내 체력이 넉넉했다면 어렵긴 해도 결국 내가 이겼을 테지만.
‘이런 곳에서 저런 강자를 만날 줄이야.’
빅터는 못 해도 최상급검술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가 내가 체력도 부족하고, 스텟도 나보다 높았던 상황.
결국 녀석을 쓰러트리지 못했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창을 잃은 이상 오히려 내가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띠링!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00:00]
“난 웨스테로스의 빅터라고 하네.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고대하지.”
‘웨스테로스······!’
그제야 빅터의 실력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전투 성계라고 불리는 웨스테로스 출신이었던 것이다.
띠링!
[붉은 깃발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렌’ 승리!]
[기본급 x 1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끝났다.’
경기 종료 콜이 뜨자 힘이 쭉, 빠졌다.
12시간 동안 모든 플레이어들의 표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살아남았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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