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붉은 깃발(3)
둘이서 방금 전까지 원수처럼 싸워댔으면서 갑자기 나한테 달려든다고?
나는 서둘러 당겼던 활 시위를 놓았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놓았던 화살도 곧장 걸어 발사했다.
핑-! 핑-!
두 발의 화살이 아주 미세한 시간의 차이를 두고 날아갔다.
녀석들도 궁수를 하루 이틀 상대해 본 게 아닐 터.
기습적인 저격이 아니라 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면 피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 명에게만 쐈다.
첫 번째 화살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틀, 그 방향을 예측해서 날아간 두 번째 화살은.
푹-!
띠링!
[플레이어 ‘데니얼’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자신의 목적을 완수했다는 듯이 이마에 꽂히며 부르르 떨었다.
“어딜!”
그사이 남은 한 놈이 내게 달라붙기 위해 달려들었다. 녀석과의 거리는 20미터.
‘거리를 줘선 안 돼.’
뒤로 물러서며 견제용으로 한 발을 쐈다. 하지만 녀석은 다른 한 명이 화살을 피하려다 죽는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 검날로 쳐내며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왔다.
침착하자.
거리가 가까워져도 괜찮잖아.
녀석 또한 나에게 다가올수록 화살을 쳐내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침착하게.
핑-! 핑-! 핑-!
다시 한번 세 발의 화살을 빠르게 날렸다.
첫 번째 화살은 쳐낼 것을 예상하고서.
팅!
그리고 두 번째 화살은 미처 막지 못해 피할 것을 예상하고서.
휙!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발은······.
푹!
띠링!
[플레이어 ‘이철호’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기습적인 저격이 실패하는 순간 절대적인 유리함이 사라진다.
실시간으로 거리를 좁혀 들어오는 적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이다.
젠장.
활에 대한 실전 감각이 많이 부족하다.
고작 이 정도에 긴장하다니.
[현재 생존자 수 : 919 명]
[붉은 깃발 소지 플레이어 ― ‘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11:25:08]
남은 시간은 11시간 25분.
일단 최대한 버텨야 한다.
관건은 거리를 주지 않는 것과, 플레이어들에게 둘러싸이지 않는 것.
결론은 쉬지 않고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나마 다행이네.’
현재 내 체력 스텟은 31.
앞으로도 계속 적들이 달려들 텐데,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이다.
체력이 떨어지는 순간 거리를 벌리는 것도, 적에게 둘러싸이지 않는 것도 불가능할 테니까.
나에게 달려드는 놈들은 적당한 곳에서 짱박혀 쉬다 나오면 그만일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플레이어들을 상대해야 한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겠지.’
하지만 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손을 들어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자, 매끈한 가면이 만져진다.
현시점에서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건 바로 이 하얀 가면뿐.
적을 처치할 때마다 회복되는 1%의 체력은 내게 가뭄의 단비가 되어줄 것이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10:37:11]
바스락- 바스락-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자세를 최대한 낮춘 채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아직까지는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들에 가려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세 걸음······. 두 걸음······.
그리고, 한 걸음.
‘지금!’
핑-!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시야를 가리고 있는 나무를 지나자마자 날아오는 화살.
녀석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챙!
하지만 내 예상은 너무나 쉽게 깨졌다.
상대가 들고 있던 방패에 화살이 맞고 튕겨져 나간 것이다.
어떻게 안거지?
상대는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무를 지나는 순간 내 쪽으로 고개를 틀어 날아오는 화살을 보았다.
기척을 숨긴 채 먼 거리에서 날린 저격이었는데.
‘설마?’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달아나며 머리 위를 보았다.
하, 씨발.
이건 뭐 여기 있다고 아주 대놓고 광고를 하는 꼴이구나.
표식이 빨간빛을 사방에 뿌려대고 있었다.
녀석이 내 붉은 깃발 표식을 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무 뒤에서 빼꼼 고개만 내민 채 쏘는 화살을 적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놈! 거기 서라!”
‘이래서 실전을 경험해봐야 해.’
활을 수련할 때만 해도 상대를 죽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틈이 보이질 않아.’
그런데 막상 방패를 든 상대를 만나자 어디에 쏴야 할지 보이지가 않았다.
‘어쩔 수 없군.’
나는 제자리에 우뚝 선 채 화살집에서 화살을 한 움큼 잡아 들었다.
그리고 그 화살들을 바닥에 꽂은 채 엄청난 속도로 화살을 쐈다.
핑-! 핑-! 핑-! 핑-! 핑-!
무려 1초에 3발씩 쏘아지는 화살들.
하지만 날아간 화살은 무의미하게 방패 위를 때릴 뿐이었다.
그사이 상대와의 거리는 15미터까지 좁혀졌다.
‘더 다가와라.’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화살을 날렸다.
“후후, 방패 앞에서 화살이나 쏘아대고 있다니, 멍청하구나. 이만 죽어라!”
코앞까지 다가온 녀석이 내게 검을 휘둘렀다.
‘지금!’
나는 활을 내팽개치며 소매 안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상대는 내게 검을 휘두르느라 겨드랑이와 가슴이 비어있는 상황.
나는 검을 피하며 녀석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푸슉-!
핏방울이 공기중으로 비산한다.
경동맥부터 시작해서 거의 목의 절반이 잘려 나간 상대가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쓰러졌다.
털썩.
띠링!
[플레이어 ‘수흐랍’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사실 난 활보다 단검을 더 잘 다룬다고.’
후.
녀석을 방심시킨 덕분에 그나마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방패를 들고 있으니까 화살로 공략하기가 쉽지 않네.’
새삼 활이 다루기 까다로운 무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저격이 실패하는 순간부터는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꼴이라니.
이제부터는 몰래 저격하는 것도 안 될 것 같은데.
하필 표식으로 인해 은신이 안 되는 상황.
‘어렵네.’
나는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활과 화살을 챙겼다.
싸우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상대가 나를 발견하기 전에 더 좋은 자리를 선점해야 한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9:12:47]
“흡!”
나는 경사 아래로 몸을 날렸다.
사각-
뒤이어 등 뒤에서 무언가 잘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몸을 틀며 경사 아래로 떨어지는 와중에 화살 한 발을 시위에 걸어 당겼다.
핑! 푹-
띠링!
[플레이어 ‘마르퀴뇨스’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검을 휘두르는 와중이었고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인지 상대는 미처 화살을 피하지 못한 채 머리가 꿰뚫려 경사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그대로 공중제비를 돌며 바닥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어디가 잘린 거지?’
서둘러 등을 만져봤지만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로브의 만져보니 끝부분이 조금 잘려 있었다.
다행히 종이 한 장 차이로 상처를 입지 않았다.
‘후, 쉽지 않네.’
남은 체력은 49%.
어느새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그나마 피의 회복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인거지, 그마저도 없었으면 30%대를 기웃대고 있었을 것이다.
젠장.
도무지 끝이 없었다.
[현재 생존자 수 : 602 명]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8:33:17]
“헉, 헉.”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달려가는 와중에도 입으로 소매를 찢어 손가락을 둘둘 싸맸다.
훈련을 통해 굳은살이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손가락 끝이 찢어진 것이다.
‘진짜 징글징글하네.’
죽인 숫자가 20명을 넘길 때부터 숫자 세는 것을 포기했다.
플레이어들은 개인전인데도 불구하고 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마치 일대 다수의 대결을 치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미친 듯이 화살을 쏴댔더니 어깨와 팔이 뻐근했다.
고작 4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몇천 발을 쏜 것 같았다.
‘상황이 좋지 않아.’
두 놈이 뒤쪽에서.
그리고 한 놈이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기준으로 1시 방향에서 다가오고 있다.
무려 세 명에게 10분째 쫓기고 있는데도 둘러싸이지 않은 건 온전히 초감각 덕분.
엄폐물이 많아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내 청각은 녀석들이 몇 명이고 어디쯤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핑!
막 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 1시 방향에 있는 녀석에게 화살을 한 발 날려주며 나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팅!
젠장.
상위리그에 있던 궁수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저격만으로 모든 적들을 상대했을 리는 없을 터.
‘일단 녀석들을 서로 마주치게 해야 해.’
붉은 깃발전은 엄연한 개인 PvP 전투.
일단 마주치게 하면 서로가 검을 뽑든, 왈츠를 추든 알아서 할 것이다.
‘일단 뒤에 두 놈부터.’
미끄러지듯이 멈춘 나는 곧장 7시 방향에 있는 녀석에게 속사를 해댔다.
그러자 녀석의 움직임이 쏟아지는 화살을 막느라 조금 느려졌다.
이제 얼추 5시 방향에서 쫓고 있는 녀석과의 속도가 맞을 것이다.
‘둘이 지지고 볶고 해보라고.’
나는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달렸다.
“비켜라!”
“이 자식이, 비겁하게 기습을!”
됐다.
눈이 마주치면서 한쪽이 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두 놈이 나를 쫓는 걸 포기하고 서로에게 칼질을 시작했다.
이제 나를 쫓고 있는 녀석은 한 놈뿐.
‘이제야 한숨 돌리겠네.’
조금 더 이동한 다음 두 녀석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다고 판단된 나는 1시 방향에서부터 쫓아오던 녀석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핑! 핑! 핑!
시위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화살들을 밀어냈다.
“잡스럽긴!”
그러자 1시 방향에서부터 쫓아오던 창술사가 화살을 튕겨내며 내게 달려들었다.
“놈, 끝이다!”
휘익!
창으로 화살을 튕겨낼 때부터 알아봤지만, 녀석의 창술이 제법 매섭다.
나는 창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단검을 꺼내 녀석의 품에 파고들었다.
“어딜!”
젠장.
이놈 제법인데.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며 창을 휘두른다.
내가 단검을 사용할 수 있도록 거리를 주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활을 쏠 수 있을 만큼의 거리도 아니다.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거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내게 달려들 것이다.
‘민첩 수치에서 차이가 많이 나네.’
그래도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녀석의 공격이 빠르게 눈에 익고 있었으니까.
허리를 비틀며 녀석이 창을 찌르고 들어왔다.
시력의 초감각은.
상대가 공격하는 순간의 좁은 틈을 파고들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푸슉-!
가볍게 자세를 낮추며 점프하듯 녀석의 품으로 파고들어 단검을 찔러넣었다.
“제, 젠장······.”
심장이 찔린 녀석은 움찔하더니 이내 무너져 내렸다.
띠링!
[플레이어 ‘손문’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 32%]
땀이 비 오듯이 흐른다.
한참을 달렸더니 다리근육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나는 곧장 몸을 움직여야 했다.
여전히 사생결단을 펼치고 있는.
띠링!
[플레이어 ‘윌슨’ 을 처치했습니다.]
[플레이어 ‘아슈와타마’ 를 처치했습니다.]
나머지 두 녀석을 처리해야 했으니까.
‘힘드네.’
진짜 딱 10분만 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치유의 물약과 붕대를 꺼냈다.
치이익-
아까 전에 추격 과정에서 당한 어깨의 상처에 회복의 물약을 뿌리자 수증기가 피어나며 상처가 아물어갔다. 그 위를 풀어지지 않도록 붕대로 꽉 묶었다.
‘후. 아세리안이 꼼꼼하게 챙겨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리고는 새로운 화살통을 꺼내 어깨에 멨다.
무려 1만 발의 화살을 챙겨줄 때만 해도 너무 과하지 않나 싶었는데.
‘하, 씨발.’
이젠 그것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현재 생존자 수 : 451 명]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7:01:59]
“헉, 허억, 허억, 허어억!”
숨을 몰아쉬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 사방에 플레이어들이 쫙 깔려 있었다.
“저 붉은 깃발은 이제 내 꺼다!”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게 그 다리부터 잘라주마!”
젠장.
결국 포위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두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녀석들을 뿌리치는 과정에서 파리들이 너무 많이 꼬여 버렸다.
‘어쩔 수 없지.’
원래 최대한 쓰지 않으려고 했다.
좀 더 실전 감각을 익히고 싶었으니까.
근데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역천자 칭호 적용.’
띠링!
[<신화업적:역천자>을 적용합니다.]
[칭호의 효과로 모든 스텟이 + 20% 상승합니다.]
숨겨둔 한 수를 꺼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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