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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의 회귀자-9화 (9/205)

9화. 붉은 깃발(2)

“닉네임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아세리안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이름으로 하려고 했는데요.”

“흐음······.”

아세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주위를 한바퀴 돌면서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마치 품평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안우진은 아닌 것 같아서요. 닉네임만 딱 들으면 무림이나 지구 출신이라고 생각할텐데, 지금 복장이 좀······.”

지금 내 복장이 어때서?

나는 기존에 입었던 지급용 가죽옷 위에 검은색 로브를 두른 상태였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다 검은색이잖아요! 거기에다가 머리 색깔까지······. 그 상태에서 흰색 가면을 쓰고 있으니까 마치 유령 같다구요. 닉네임이랑 전혀 매칭이 안 되잖아요?”

“그런 것까지 신경써야 합니까?”

“그럼요! 투기장에서 싸우는 플레이어도 결국 상품성이 중요하다구요. 그래야 관중들이 찾게 될 거고, 그래야 컨텍이 들어올 거 아니예요. 그런데 이렇게 온몸을 꽁꽁 싸매서야······.”

아, 그런 거였나.

그녀의 말을 듣자 생각나는 게 있었다.

1회차의 나는 이상하게 지명 오퍼가 많이 들어왔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눈에 안대를 쓰고 경기를 뛰는 맹인 창술사 라는 상품성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콜로세움은 살아서 경기가 끝나면 훼손됐던 육체의 모든 부위가 회복되니까 사실상 내가 유일한 맹인 플레이어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컨셉이 중요하다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닉네임을 내 이름으로 하는 것이 고민됐다.

“흐음······ 아예 신비주의로 나가는 건 어때요?”

“신비주의요?”

“네. 온 몸을 칠흑으로 감싼 채 흰 가면을 쓰고 다니는 유령 플레이어. 딱 봐도 신비롭잖아요. 그러니까 닉네임도 신비주의로 가는거죠.”

신비주의. 신비주의라······.

나는 검지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렸다.

오히려 관객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내게 해서 더 관심을 모으자는 것 같은데······.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럼 렌으로 하겠습니다.”

“렌이요?”

“네. 닉네임이 짧아서 어느 성계 출신인지 가늠하지 못할테니까요. 궁금증을 유발할 수 있겠죠.”

“음······ 좋네요. 렌이라.”

아세리안도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2회차의 내 닉네임은 렌이 되었다.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6 경기는 앞으로 3주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스텟을 끌어올리는 거다.

더미 경기에서 내가 레드 진영의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긴 했지만, 그건 내가 강해서라기보단 상대가 약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더미 따위를 죽이기 위해 고급 인력을 내보낼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 경기는 다르다.

무려 1,000명이나 참가하는 개인 PvP 경기.

물론 1,000명이 개인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서바이벌이 될지, 아니면 개인으로 참가했지만 진영을 나눠 겨루는 경기가 될지는 그날 돼봐야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쉬운 미션을 주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어중이떠중이들이 나오진 않는다는 거지.’

뭐, 그래도 상관 없다.

내가 이런 대형 경기를 하루이틀 참가해보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1회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저.

평소처럼 훈련하고, 준비하면 된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20] [민첩 : 29] [체력 : 31]

[정신 : 88] [지력 : 12] [마력 : 0]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중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중급궁술>]

[보유 스킬(0/5) : 없음]

[업적 특전 : 없음]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남은 체력 : 100%]

3주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드디어 경기에 출전하는 날이 되었다.

“안우진님!”

체력 단련실에서 명상을 하고 나서는데 숙소 앞 벤치에 앉아 있던 아세리안이 불렀다.

“아니, 긴장도 안 되세요? 몇 시간 뒤면 경기에 출전하시잖아요.”

왜 긴장이 안 될까.

어젯밤에는 잠도 제법 설쳤다.

하지만 많은 경기를 치뤄오면서 긴장을 최대한 누그러트리는 법을 깨달았을 뿐.

그래서 지금까지 명상을 하다가 나온 것이고.

“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경기 전에 플레이어들이 많이 예민하다고 그러던데.”

내 생각엔 당신이 더 긴장한 것 같은데?

아세리안은 아침부터 하루종일 안절부절 못했다.

마치 자신이 경기를 뛰기라도 하는 양.

띠링!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6 7경기가 끝났습니다.]

[잠시 후 8경기가 시작되오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마침 시스템이 곧 경기가 시작됨을 알려왔다.

시각을 보니 어느덧 오후10시.

이제 우리 경기가 끝나면 코메인 이벤트와 메인 이벤트만 남은 셈이었다.

각 경기는 무조건 1시간 씩이다.

경기 자체가 얼마나 걸리든 상관 없다.

24시간이 걸리든, 48시간이 걸리든, 관객들에겐 1시간 밖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는 모른다.

나는 경기를 뛰기만 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으니까.

슈우우우웅-

잠시후, 마나의 유동과 함께 공터에 하얀색 바탕의 동그란 원이 생겨났다.

경기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워프 게이트.

“기분이 어때요?”

“······?”

워프 게이트가 생기자 마자 아세리안이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소리에도 떨림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뭐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해서 같은 방향의 손과 발이 나가던 사람 맞아?

“나쁘지 않군요.

“가서 증명하고 오세요. 당신이 이 무대의 주인공이라는 걸.”

그녀가 양팔을 벌리며 다가오더니 나를 토닥였다.

어떻게든 내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려는 것 같았다.

난 이미 자신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피식.

나쁘지 않은 기분이네.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검은색 로브를 펄럭이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게이트를 통과하자 빽빽하게 솟아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지형은 산지. 제법 경사가 있고, 계절은 여름인지 초록빛으로 가득하다.

산의 꼭대기엔 구름이 걸려 있다. 높이가 제법 있다는 뜻.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인지 나뭇가지가 어지러이 엉켜 있다. 흔적이 남기 쉬운 지역이라는 것.

주위에는 아무도 없음. 참가 인원이 천 명이 넘는데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맵의 크기가 제법 넓은 것 같았다.

산지 바깥에는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 싶다. 맵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하늘 위에는 해가 중천에 걸려있지만, 나무 그늘로 인해 주위가 어두워 보였다.

저 멀리 먹구름이 보이는 걸 보니, 곧 비가 쏟아질 수도.

띠링!

[경기 :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6의 8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개인 서바이벌(개인 PvP)]

[게임명 : 붉은 깃발전]

[맵 : 나블루스 화산섬(중)]

[관객 수 : 20,274 명]

개인 서바이벌이라······.

관건은 생존 조건인데.

그 조건이 뭐든간에, 나블루스는 피에 잠기겠군.

띠링!

[승리 조건 : 경기 종료 시점에 붉은 깃발을 소유한 자]

[붉은 깃발을 만지면 자동으로 머리 위에 표식이 남게 됩니다.]

[붉은 깃발의 소유자를 처치하면 자동으로 붉은 깃발의 표식이 옮겨지게 됩니다.]

[현재 생존자 수 : 1,000 명]

[보너스 포인트 조건이 있습니다.]

[많은 플레이어를 죽일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붉은 깃발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을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킬 수 현황 ― 없음]

[붉은 깃발 소지 플레이어 ― 없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12:00:00]

[경기 시작 후 30분이 지날 때까지 붉은 깃발을 아무도 차지하지 않으면 랜덤으로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주어집니다.]

[3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룰이 제법 많았다.

유형은 보물 쟁탈전이었다.

‘휴, 살았네.’

[2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간혹 제한시간 없이 몇 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라는 극단적인 미션이 나올 때가 있었다.

그런 경기는 플레이어 분쇄경기라고 불리며 생존률이 1% 대로 뚝 떨어진다.

주로 하위리그 같이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리그에서 주로 나오는 미션이었다.

[1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그에 비하면 붉은 깃발전은 어렵지 않은 미션이다.

경기가 끝나는 최후의 순간에만 깃발을 차지하고 있으면 되니까.

설혹 깃발을 쟁취하지 못해도 괜찮다.

비록 경기에 승리하여 많은 포인트를 챙기진 못하겠지만, 살아남아 있다면 다음 경기를 노려볼 수 있으니까.

[경기 시작!]

상태창이 경기 시작을 알려왔다.

오늘 내 무기는 활.

이렇게 넓고 은폐할 곳이 많은 지형에서는 최고의 무기였다.

‘운도 따르는 군.’

창이 아닌 활을 들고 시작하는 것은 별다른 이유가 아니였다.

어떤 무기든 실전에서 사용해봐야 느는 법이니까.

한달 사이에 궁술이 엄청나게 늘었다. 어떤 자세로 쏴도 다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내 한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달까.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하위리그라고 하더라도 활을 들고 오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천천히 외곽을 돌면서 사냥을 해볼까.’

붉은 깃발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4시간 정도 남았을 때 해도 된다.

그정도면 맵이 아무리 넓어도 붉은 깃발이 어디있는지 찾을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미리 알아둬봤자 계속해서 깃발의 주인이 달라질 것이기에 의미 없는 짓이기도 하고.

깃발을 쟁취하는 건 최대한 뒤로 미룬다.

깃발을 가지고 있는 순간부터 999명의 플레이어가 나 하나만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그러니 초반부터 깃발을 들고 다니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

‘쟁취하는 건 한 시간 남았을 때 하자.’

그러면 미리 함정 지대도 만들어둘 수 있어서 남은 플레이어들이 나를 노리고 달려든다고 해도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산의 중턱에서 초입쪽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어느정도 이동하자 누군가가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화살 하나를 꺼내 시위에 걸었다.

뿌드드드득-

그리고 힘차게 시위를 당겼다.

아직 보이지 않지만,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는 느껴졌다.

잠시후, 거대한 대검을 든 채 산의 중턱으로 뛰어 올라오고 있는 한 명의 플레이어가 보였다.

미리 덤불이 엉켜있는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에 나를 발견하진 못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분다.

화살의 진로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대검을 든 플레이어는 일정한 리듬으로 뛰고 있었다.

화살이 도달하는 시간을 계산하고.

그 사이 녀석이 이동할 거리를 예측한 다음.

핑!

쏜다.

푹! 털썩.

띠링!

[플레이어 ‘로맥’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로맥이라는 닉네임 이었군.

로맥이라는 플레이어의 시체에서 빨간 안개가 생겨나더니 내게 흡수되었다.

하얀 가면에 들어있는 피의 회복 효과인 것 같았다.

녀석은 아마 자신이 무엇에 당했는지도 모른 채 죽었을 것이다.

궁수가 무서운 이유는 먼 거리에서 기습적으로 저격해 오기 때문.

화살이 날아온다는 걸 모르면, 방금 죽은 저 녀석처럼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이마가 꿰뚫려 죽는 것이다.

‘이 맛에 활을 쓰는 거군.’

쓰면 쓸수록 활이라는 무기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검이나 창으로 싸우는 건 기본적으로 상대와 직접 맞부딪히기 때문에 체력소모가 무척 크다.

하지만 활은 미리 적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먼 거리에서 화살을 시위에 걸고 정확하게 쏘는 것만으로도 끝난다.

효율성이 무척 높은 무기인 것이다.

‘못 맞추더라도 상관은 없지. 거리만 주지 않으면 되니까.’

나는 죽은 로맥이라는 플레이어의 시체로 다가가 품 속을 뒤졌다.

아쉽지만 갖다 팔거나, 내가 쓸만한 아이템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외곽쪽으로 나가며 그때마다 보이는 플레이어들을 사냥했다.

띠링!

[플레이어 ‘애스크’ 를 처치했습니다.]

[플레이어 ‘묵관책’ 을 처치했습니다.]

[플레이어 ‘루네스’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현재 생존자 수 : 942 명]

[킬 수 현황]

[1위. ‘렌’ 4킬]

[2위. ‘티시온’ 3킬]

[3위. ‘붉은 거미’ 3킬]

[4위. ‘르노바’ ······.]

[붉은 깃발 소지 플레이어 ― 없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11:32:17]

[경기 시작 후 30분이 지날 때까지 붉은 깃발을 아무도 차지하지 않으면 랜덤으로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주어집니다.]

어느새 경기가 시작한지 30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킬 수 1위라······.’

얼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벌써 4킬이나 했다.

그중에서 내가 화살을 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플레이어는 단 한명도 없었다.

내가 지금까지 치렀던 경기 중에서 오늘이 제일 편한 날이랄까.

챙! 챙! 챙!

산의 초입으로 내려가자 검을 맞대고 있는 두 명의 플레이어가 보였다.

녀석들은 은밀한 죽음의 손길이 자신들에게 뻗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다.

화살통에서 화살 두 발의 화살을 꺼내 한 발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 발은 시위에 걸었다.

뿌드드득-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기분 좋은 울림을 냈다.

숨을 참은 채 몸의 떨림을 누른다.

그리고······.

띠링!

[30분이 지났음에도 붉은 깃발의 주인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랜덤으로 한 명의 플레이어에게 ‘표식’이 주어집니다.]

[붉은 깃발 소지 플레이어 ― ‘렌’]

순간 화살을 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지금······ 천 명 가까이 되는 플레이어들 중에 하필 내가 걸렸다고?

고개를 들자 내 머리 위에서 펄럭이는 빨간색 표식이 보였다.

그리고.

“표식이다!”

검을 맞대고 있던 두 명의 플레이어가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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