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90화 (190/193)

190화 : 위기를 넘어

“으아앜! 내 팔……!”

“틀렸군, 차례를 기다리다간 늦을 거야. 살려면 이건 잘라 내야 해.”

“대위님, 인도군 쪽에서 자기네들 부상자들 좀 빨리 데려가 달라는데요?”

“영국군과 캐나다군이 먼저야. 커리 놈들은 좀 기다리라고 해!”

1913년 11월 17일.

후퇴가 시작된 지 이틀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아직도 이프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십만이나 되는, 그것도 일주일 동안 망가질 대로 망가진 병력이 빠져나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국 놈들이 멀쩡하게 도망치게 두지 마라!”

“포탄을 계속 퍼부어!”

게다가 프랑스군도 영국군을 이대로 순순히 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한 명의 적군이라도 줄이기 위해 도망치는 영국군과 그런 영국군을 지키려는 독일군을 끊임없이 물어뜯었고, 이프르 곳곳에선 격전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푸쉬이이이익───

“가스! 가스!”

“방독면! 방독면 꺼내!”

그리고 총성이 울려 퍼지는 곳엔 이제는 서부전선의 새로운 명물이 된 독가스 공격이 반드시 이어졌다.

“빌어먹을 개구리 녀석들이 토미들을 어떻게든 조지겠다고 미쳐 날뛰는군.”

그러나 독일군도 프랑스군의 화학 공격에 더는 손 놓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프랑스군이 먼저 선을 넘은 이상 그들이라고 독가스를 안 쓸 이유가 없었으니까.

“겨자가스 준비해.”

겨자가스(sulfur mustard).

프랑스인이 처음 만들어 영국인의 손을 거쳐 독일인이 최종적으로 무기로 만든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유명했던 화학 병기가 이페리트(Yperite)란 별칭답게 원 역사처럼 이프르의 대지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끄아악───! 끄아아아아악───!!”

“내 눈! 눈이 불타는 것 같아!”

그리고 프랑스 병사들은 녹색 염소가스와 대비되는 황색 겨자가스에 닿자마자 백인이든 식민지 출신의 흑인이든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겨자가스는 프랑스군이 사용하는 염소가스보다 살상력은 낮지만, 가스에 닿자마자 일어나는 불에 타는 듯한 고통과 피부를 흉측하게 만드는 수포는 차라리 살상용인 염소가스가 더 자비로워 보이게 할 정도였으니까.

부우우웅───타다다다다!!

“빌어먹을 황새 새끼들, 발정 난 똥개처럼 미쳐 날뛰네!”

그렇게 이프르 전역이 가스와 가스로 뒤덮인 채 방독면을 뒤집어쓴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서로 신나게 죽음의 왈츠는 추는 사이, 지상과 대비되는 백색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 위에서도 프랑스 항공대와 연합군 항공대 간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치직──베르너 꼬맹이, 네 뒤쪽에 치지직! 프랑스 개구리들이다!]

“이미 알고 있다고요!”

이미 전설이 된 붉은 남작만큼은 아니지만, 어린 나이에 벌써 재능을 뽐내며 독일 제국 항공대를 대표하는 에이스 오브 에이스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베르너 포스는 동료의 무전에 소리치며 기수를 옆으로 깊게 꺾었다.

그러나 독일 제국 항공대의 맞수인 프랑스 황새 비행대 소속 프랑드 SPAD 전투기는 여전히 포스의 꽁무니를 쫓아오고 있었다.

“어디 이것도 쫓아올 수 있나 보자!”

부우우웅──

포스가 이를 악물며 기수를 위로 올리자 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콧수염 얼굴이 정면에 그려진 아들러 전투기가 포스를 뒤쫓던 프랑스 파일럿의 시선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프랑스 파일럿은 급히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사라진 베르너 포스를 쫓아 기수를 꺾으려 했지만…….

타다다다다다!!

화려하게 움직이며 적기의 꼬리를 역으로 잡는 것에 성공한 포스가 먼저 방아쇠를 당긴 것이 먼저였다.

“후우…….”

적기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추락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뒤 그제야 참아 왔던 숨을 내쉬는 포스.

그러나 완전히 숨을 돌리기엔 아직 멀었다.

영국군이 완전히 후퇴하기 전까지는 전투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베르너 포스 아니, 이프르에 있는 모든 연합군 병사들은 어서 빨리 그 순간이 오기만을 절실하게 기도했다.

* * *

“팔켄하인 참모총장님. 영국군의 탈출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10만 명이 이프르를 빠져나왔지만, 아직 나머지 10만이 남아 있습니다. 프랑스군의 공격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요.”

“피해가 꽤 생기겠군요.”

“그래도 이번 주말이 오기 전까지는 철수를 완료하고, 이프르를 완전히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나마 좋은 소식이네요. 최근 보고 중에서는요.”

당장 급한 불은 껐지만, 여전히 각지에서 안 좋은 소식만 계속해서 귀에 들려오는 판국이니까.

우리 친애하는 둘째 처남께서 2호 전차에 아이젠한스라는 웃기지도 않은 별명을 붙인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강철의 한스가 뭐야, 강철의 한스가!’

무슨 만화 제목도 아니고!

덕분에 요즘 사람들 얼굴을 제대로 못 쳐다보고 다닐 지경이다.

심지어 영국군 구출 문제 때문에 베를린에 온 김에 오랜만에 얼굴을 본 루이제마저 날 보자마자 빵하고 웃음을 터트릴 정도니.

이러다 루이제 뱃속의 우리 아기가 나쁜 걸 배울까 두려울 지경이다.

“어쨌든 영국군이 탈출하고 나면 벨기에 전선은 당분간 재정비군요.”

“피해가 피해니까요. 손실된 장비 보충도 해야 할 테고요.”

그리고 손실된 장비 중엔 영국군 구출 작전에 동원된 우리 전차들도 있었다.

참모본부의 예상보단 손실률이 낮긴 해도 기술의 한계상 안정성이 개판인 것은 어쩔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작은 한ㅅ…… 아니, 2호 전차라면 몰라도 카이저 전차는 너무 커서 회수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니.’

젠장, 이젠 나도 모르게 한스라고 부르네.

이게 아이텔 왕자 탓이다. 나중에 새 전차를 만들면 똑같이 복수해 주마.

“그러고 보니 처칠이 전차는 사실 영국군이 개발하고 있던 리틀 윌리인가 뭐시기가 원조라고 떠들고 다니던데, 아셨습니까?”

“아뇨. 처칠이 개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입니까?”

솔직히 이젠 뭔 소리를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

“그 새끼 이야기는 그만두고, 다른 전선 이야기나 하시죠. 동부전선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친애하는 니콜라이 황제께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방면에서 공세를 시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우리로선 ‘아이고, 니키야!’ 소리가 절로 나올 만한 일이었다.

물론 러시아 쪽에 동정심을 가득 담아서 말이다.

“그쪽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아무래도 협상국이 흔들리니, 자신들도 이 틈에 뭐라도 해 보고 싶었던 것 같은데, 솔직히 누가 봐도 무리수 그 자체인 공세이니까요.”

그도 그럴 것이 당장 지난 동부 대공세의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러시아 제국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쪽은 아직 라스푸티차가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고.

나로선 그저 차르가 무의미한 것을 넘어 오히려 러시아의 전력을 저 스스로 깎아 먹는 걸 말리지도 못하고 두 눈 뜨고 옆에서 지켜봐야 할 브루실로프에게 애도를 표할 뿐이다.

“동부전선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대신 발칸 쪽이 상당히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발칸이라면 그리스군 말입니까?”

팔켄하인의 물음에 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만이 참전하자마자 갈망에 도시에 눈이 돌아가 콘스탄티니예로 신나게 달려간 우리 그리스 친구들이 오스만군의 방어선에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한 채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급하게 나서지 말고 일단 기다려 보라니까!’

애초에 그곳에 방어 시설을 지은 게 우리 독일이란 말이다.

그리 강군이라 할 수 없는 그리스 육군이 쉽게 함락시킬 만한 곳이 절대 아니었다.

“그래도 콘스탄티니예의 전략적 가치는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러시아 흑해함대가 지중해로 나오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물론 그들은 지금으로선 움직일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만.”

“태평양 함대가 항복하고, 발트함대가 바닷속으로 침몰한 상황이니까요.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해군전력인 흑해함대를 쉽게 움직이진 못하겠죠.”

여기서 흑해함대까지 잃으면 러시아 해군은 그냥 전멸이고, 지중해로 나와 봤자 기다리는 것은 로얄 네이비와 카이저마리네, 오스트리아-헝가리 유보트 함대, 육군과 달리 강군인 그리스 해군이었으니까.

“어쨌든 제가 생각하기에 콘스탄티니예를 점령하는 최선의 수는 지금으로선 동부전선의 불가리아군을 다시 발칸 쪽으로 돌리는 것뿐입니다.”

불가리아군의 강함도 강함이지만, 우리 독일군은 그쪽으로 뺄 여력이 없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를 막으러 간 상황이니까.

‘물론, 베니젤로스는 불가리아가 콘스탄티니예까지 욕심낼까 봐 그들의 개입을 원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과연, 세르비아 점령지만으로 정신없는 불가리아에게 콘스탄티니예까지 집어삼킬 여력이 있을지는 둘째 치더라도, 우선은 전쟁에서 이기는 게 그 무엇보다 먼저다.

영토 분배 같은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상관없으니까.

정 필요하다면 내가 중재라도 해 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상당수가 이탈리아 전선으로 빠지고, 12월에 동계 공세까지 예정된 상태에서 불가리아군을 동부전선에서 빼기는 어렵습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병력은 아직 훈련 중이고 말입니다.”

“예, 그래서 한번 루마니아와 접촉해 볼 생각입니다.”

“루마니아 말입니까? 확실히 루마니아가 베사라비아 방면에서 러시아를 공격해 주면 그만큼 동부전선의 병력이 분산될 테니, 불가리아군을 일부라도 발칸으로 돌릴 수 있겠지만…….”

루마니아는 아직 어디에도 붙지 않은 채 중립을 유지 중이었다.

“저도 본래는 굳이 루마니아까지 전쟁에 끌어들일 생각까진 없었습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루마니아가 중립만 유지해도 좋았으니까.

괜히 자극했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신 모양이군요.”

“오스만의 동맹국 가입이란 예상 못 한 사태 때문에 상황이 바뀌었으니까요. 게다가 러불동맹이 이탈리아와 오스만이란 새로운 친구들을 얻었으니, 우리도 새로운 친구를 데려와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루마니아엔 석유 산업의 선두주자인 미국의 텍사스 석유보다도 일찍 개발된 플로에스티 유전이 있다.

그러니 잘하면 이참에 오스만이 등을 돌리면서 잃어버린 중동 석유를 일부분이라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엔촐레른 왕가의 수장인 황제 폐하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해 온 루마니아가 인제 와서 협상국에 합류하려 할까요?”

“쉽진 않겠죠. 그래도 가능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루마니아가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은 참전할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과연 누가 유리할지 간을 보고 있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게다가 친러, 친불파가 많은 루마니아가 협상국이 흔들림에도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는 것은, 그쪽이 이탈리아와 오스만이 참전했음에도 러불동맹이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해.’

바르샤바에서 노예처럼 구르던 불쌍한 한스는 잠시 휴식이다.

이제는 오랜만에 외무장관 한스 폰 초이 후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이걸로 마지막이다!”

1913년 11월 20일.

한스가 루마니아와의 교섭을 준비하는 사이 이프르에선 드디어 마지막 영국군이 빠져나오며 길었던 대탈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영국군 사이에선 환호 대신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했다.

그 지옥에서 살아남았다고 환호성을 지르기엔 전우들을 너무 많이 잃었으니까.

당장 30만이 넘었던 영국군 중 살아남은 것은 20만조차 못 되는 약 17만에 불과했다.

게다가 영국군은 팔스(Pals) 또는 지역 연대라고 하여 같은 마을, 같은 지역 출신들끼리 묶어 부대를 편성했고, 그로 인해 이들의 슬픔과 충격은 배가 되었다.

대부분의 영국 병사들이 어렸을 때부터 얼굴을 맞대며 살아온 지인과 친구들을 잃었고, 불운한 이들은 친구, 동네 형과 아저씨들을 전부 잃고 자신만 살아남는 비참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으니까.

“쿨럭쿨럭, 제프리가 죽었다고?”

“……그래, 존. 프랑스군이 포탄이 하필 녀석이 치료를 받던 응급구호소에 떨어졌대.”

그리고 그것은 이프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병이 너무 심각해 본국으로 후송 예정이었던 톨킨 또한 마찬가지였다.

롭은 운 좋게 톨킨과 함께 이프르를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두 사람과 같은 클럽 친구였던 제프리 스미스를 수많은 대학 동창들과 동네 친구들, 심지어 그들이 있던 대대까지 통째로 전멸해 버린 상황이었으니.

“오빠들이 전부 죽었다고요……?”

“내 아들, 내 아들들이 모두 전사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으허헝…… 으허허헝…….”

이 소식이 본국에 전해지자 가족과 지인들을 잃어버린 이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영국 전역에 울려 퍼졌다.

무뚝뚝한 조지 5세조차 오늘만큼은 슬픔을 참지 못해 눈물을 흘렸고, 영국의 마을과 도시엔 검은색 상복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정부는 이프르 전투의 대패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무리한 공세를 명령해 우리 아들들을 전부 죽인 애스퀴스 내각은 총사퇴해라!”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슬픔은 분노로 바뀌었다.

이제 영국인들은 이 사태를 일으킨 범인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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