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89화 (189/193)

189화 : 판처, 대지에 서다 (3)

쾅! 콰광! 타다다다다다!!

“하하하하! 다들 보고 있나?”

“보고 있습니다. 원수님.”

“프랑스인들이 손도 못 쓴 채 겁에 질려 바지에 지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군!”

늙은 몸을 이끌고 수십 년 만에 전장으로 나온 슐리펜은 장성들과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망원경에서 눈을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보라. 철옹성 같은 프랑스군의 참호가 무너지고 있다.

몇 년 전, 한스와 상상으로만 그렸던 장면이 드디어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아, 이토록 피가 들끓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일까?

멀리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폭발음과 총성조차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감미롭게 들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십 년만 젊었으면 내 저곳에서 직접 전차들을 지휘할 수 있었을 텐데.”

멀리서 그저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게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물론, 이것만 해도 죽을 날이 머지않은 노인네에겐 호사였지만.

“아이텔 왕자님, 선두 부대 적 참호에 접촉했습니다!”

“하하하, 좋아. 역시 카이저야. 덩칫값 하나는 확실하다니까. 계속해서 밀어붙여!”

슐리펜이 전투를 지켜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는 사이, 전투는 전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만큼이나 격렬하고 뜨겁게 돌아가고 있었다.

쿠르르릉───!!

“엎드려!”

“으아아아악!!”

1호 전차 카이저가 무한궤도를 끊임없이 굴리고, 포신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포탄을 뿜어내며 기어코 참호 위를 뒤덮기 시작하자 흔들리는 참호 안에서 머리를 감싸고 웅크린 채 벌벌 떠는 프랑스 병사들.

어쩔 수 없었다. 전차란 거대한 강철의 괴물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한 이들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은 이해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으니까.

당장 철조망은 사람이 개미를 짓밟듯이 순식간에 납작해져 버렸고, 수많은 적군을 이프르의 진흙밭에 매장해 왔던 기관총은 아예 이빨조차 들어가질 않는다.

“씨바아아아알! 전쟁 한번 X같이 하네!!!”

프랑스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불합리함에 울부짖었다.

“가자, 돌격대 제군들! 드디어 저 빌어먹을 참호선이 뚫렸다! 이젠 우리 차례다!”

“Los! Los! Los!”

그러나 프랑스군의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몸집 큰 1호 전차들을 방패로 삼아 전진해 온 독일 돌격대가 어떠한 방해도 없이 유유히 참호 안으로 돌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참호선 돌파를 위한 기갑부대와 돌격대의 조화.

후티어 전술의 완전판이 이프르의 전장에서 펼쳐진 순간이었다.

그다음은 굳이 말로 할 것도 없었다.

“개구리 놈들을 모두 쓸어버려!”

타다다다다다! 타다다다다다다!!

기관단총이 만들어 내는 피로 얼룩진 소시지 파티다.

곧 프랑스군 참호가 하나둘씩 점령당하기 시작했고, 굳건했던 프랑스의 포위망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독일군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텔 왕자님, 전방 참호 점령 완료했습니다!”

“하하하! 잘했다, 제군들. 하지만 기뻐하기엔 아직 이르다. 개구리들이 우리의 길을 막으려고 들 테니까.”

그 말대로 프랑스군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포위망이 뚫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베이강, 당장 예비대를 투입하게. 어떻게든 독일군이 이프르에 가는 것을 막아야 해!”

“옛, 포슈 사령관님!”

얼마 지나지 않아 방어선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프랑스군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그들이 노린 것은 다름 아닌 독일군의 측면.

이왕 이렇게 된 거 돌출부를 잘라 내서 영국군을 구출하러 온 독일군까지 모조리 포위해 버리겠단 심산이었다.

“Panzer vor(전차 앞으로)! 강철의 한스가 전장에 나설 시간이다!”

“야볼!”

그러나 서둘러 달려온 프랑스 병사들의 앞을 대기하고 있던 2호 전차 아이젠한스가 가로막았다.

“Merde! 저건 또 뭐야?!”

“큰 놈 다음엔 작은 놈이냐?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만!”

프랑스 병사들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2호 전차들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1호 전차는 워낙 압도적인 크기 때문에 공격할 엄두도 안 났지만, 작은 한스들은 아니었으니까.

쾅! 콰광!! 타다다다다!!

그러나 작아도 전차는 전차였다.

제발 저놈은 총알이 통하길 바라던 프랑스군의 기도와 달리 아이젠한스는 1호 전차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총알을 튕겨 내었고, 많은 수와 빠른 속도(어디까지나 1호 전차에 비해)를 이용해 프랑스군을 역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으악! 으아아악!!”

“후퇴! 후퇴!”

프랑스군이 공격하든 말든 우직하게 참호를 향해서만 나아가던 1호 전차와 달리 2호 전차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하자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한 프랑스군.

이에 신이 난 전차장 겸 장전수 겸 포수들은 아래쪽에 있는 운전수의 등을 걷어차며 더 빨리 달릴 것을 재촉했고, 운전수들은 누구 하나 할 것이 얼굴을 찌푸리며 이 기어를 올리곤 가속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강철의 한스가 프랑스군 병사들을 뒤로 계속 밀어낼수록 프랑스군 포위망에 난 구멍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판처 포! 판처 포!”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1호 전차와 돌격대들은 다음 참호를 향해 계속해서 전진했다.

중간에 점점 퍼지는 전차들이 생겨나긴 했지만, 그 정도론 밀려오는 강철의 파도 같은 이들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젠장, 그만 좀 퍼져라!”

물론, 그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정비병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된 노동의 시간에 욕을 절로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독, 독일군이 포위망을 돌파해?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야!!”

하지만 포위망이 뚫리기 시작했단 보고를 들은 조프르의 반응에 비하면 약과였다.

* * *

“게르만 놈들이 며칠 동안 계속 두들겨도 끄떡없던 것이 우리 포위망이야. 그런데 그게 고작 몇 시간 만에 무너지고 있다고? 이게 지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끄으응…….”

조프르는 핏발 선 눈으로 고함을 내지르자 무거운 침음성이 흘렀다.

그동안 연합군이 미친 듯이 두들겨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던 프랑스군의 방어선이다.

참호의 방어력이야 엔 전선에서 무인지대를 만들어 냈던 것처럼 충분히 증명된 바이고, 협상국이 자랑하는 항공 전력도 프랑스의 용감한 조종사들이 최대한 발목을 붙잡고 있었던 데다가 독일에 비해 부족했던 중포들도 대규모로 확충했다.

조프르와 프랑스군으로선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던 상황.

그런데 그게 이토록 허무하게 돌파당해?

조제프 조프르를 비롯한 프랑스군 수뇌부로선 도저히 맨정신으론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전선의 보고로는 독일군이 신병기를 동원했다고 합니다. 장갑차와 비슷한 종류로 보이는데, 그 크기가 훨씬 컸던 데다가 총알이 전혀 안 먹힌다고…….”

“허! 지금 독일군이 성경에 나오는 베히모스라도 만들어 냈다는 소린가?!”

발끈한 조프르의 목소리에 보고서를 읽던 가믈랭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보고서에 적힌 내용만 보면 대충 비슷했다.

물론, 전선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자신들이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하게 적은 것뿐이었지만.

그만큼 프랑스군이 전차라는 신병기의 등장에 받은 충격은 글자만으론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독일군의 신병기는 현재로선 정보가 너무 부족한 상황이니, 차지하더라도 일단은 어떻게든 독일군의 돌파 시도를 저지해야 합니다.”

가믈랭의 말에 조프르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포위망이 뚫리고 영국군이 이프르에서 빠져나간다면 지금까지의 희생은 무의미하게 된다.

“예비대는?”

“이미 전부 투입되었습니다만, 독일군에게 가로막혔습니다. 게다가 벨기에 전선의 다른 병력은 독일군과 벨기에군의 견제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아르덴 쪽은 말할 것도 없다.

독일군이 프랑스군이 측면을 노릴까 봐 그곳의 병력을 못 빼는 것처럼, 프랑스군도 벨기에 전선의 후방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쪽 병력은 손도 못 대고 있었으니까.

“엔 전선에서 다시 한번 병력을 차출하도록 하지.”

“예? 하지만 페탱 사령관의 반대가 심할 것입니다만…….”

“어쩔 수 없네. 지금은 급한 불을 끄는 것이 우선이야.”

게다가 페탱은 어차피 조프르가 줄기차게 요구하던 적극적인 공세엔 관심을 끈 채 방어에만 급급하지 않았던가.

물론, 페탱으로선 무의미하게 공세를 이어 나가며 애꿎은 병사들을 죽이는 것보단 병력 소모를 최소한 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했기에 그런 것이지만.

하지만 국경전투 초기 때처럼 또다시 판단이 흔들리기 시작한 조프르의 눈에는 페탱의 그런 행동이 참호 안에 숨어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조프르 장군님! 큰일 났습니다!!”

“후우, 또 무슨 일인가?”

“엔 전선에서 독일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뭣?!”

그러나 엔 전선에서 병력을 끌어오겠다는 조프르의 구상은 5분도 안 지나 막히고 말았다.

“자자, 계속 쏟아부어라. 프랑스 놈들이 또 허튼짓 못 하게 확실하게 붙잡고 있어야 한다.”

쾅! 콰광!!

오랜만에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공세에 나선 루프레히트 바이에른 왕세자의 말에 화답하듯 독일군의 대포들이 더욱 격렬하게 프랑스군 참호를 향해 불꽃을 뿜었다.

이미 한번 프랑스가 엔 전선에서 병력을 빼는 것을 두 눈 뜨고도 못 알아채 뒤통수를 맞은 것 때문에 팔켄하인에게 사정없이 쪼였던 루프레히트와 서부전선 사령관들이다.

팔켄하인의 인간미 없는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순 없었고, 그것을 막기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시 공세뿐이었다.

독일군으로선 프랑스군이 엔 전선 병력을 끌어오려고 했던 독일군의 발목을 붙잡은 것을 똑같이 돌려준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길! 제기랄!!”

물론, 이 소식을 들은 조프르로선 그야말로 돌아버릴 지경이었지만.

그리고 그가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며 분노를 토해 내고 있을 때, 독일군은 마침내 이프르에 도착했다.

* * *

“이게 군인들인지 거지들인지 모르겠군.”

그것이 아이텔 왕자가 이프르에 갇힌 영국군을 보자마자 내린 평이었다.

그만큼 영국군 병사들은 왕자나 독일군의 생각보다 훨씬 참혹한 상태였다.

병사들은 독일군에게 손을 제대로 흔들어 줄 여력도 없을 정도였고, 어떤 이들은 참호 안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동안 고생이 참으로 많았던 모양이군요. 헤이그 장군.”

“후, 말도 마십시오.”

병사들과 함께 포위되어 있던 더글러스 헤이그가 이젠 진저리가 난다는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어쨌든 우리를 구하러 와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만약 왕자 전하와 독일군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도 저기 묻혀 있는 시체들처럼 되었을 겁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오. 일단 시간이 없으니 후퇴 준비부터 합시다.”

“예.”

독일군이 포위망을 뚫고 이프르에 당도했다지만, 아직 프랑스군의 위협이 끝난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독기를 품고 한 명의 영국군과 독일군을 더 데려가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게다가 가져온 전차들도 더는 못 버티고 대부분이 퍼져 버렸으니…….’

늦기 전에 서둘러 만신창이가 된 영국군을 데리고 이프르를 빠져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도 영국군과 같은 꼴이 될 테니까.

“지금까지 잘 버텨 주었다. 이제 빨리 이 거지 같은 곳을 빠져나가자!”

“부상자들부터 모아!”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군이 만든 길로 수송부대가 이프르에 도착하면서 부상자들을 시작으로 영국군의 이프르 탈출이 시작되었다.

“으으으으……. 나 아직 살아 있나?”

“예, 어찌어찌 살아 계십니다. 몽고메리 중위님. 솔직히 죽을 줄 알았는데, 거 명줄 한번 기시네요.”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이 올 때까지 기어코 살아남아 무덤까지 판 부하들의 노력을 헛수고로 만든 몽고메리부터,

“여기 이 친구부터 실어 주세요! 위급환자입니다!”

“이름은?”

“존 로널드 루엘 톨킨 중위. 참호열에 걸렸는데, 상태가 심각해요.”

“음, 딱 보기에도 그렇게 보이는군. 제리 친구들이 조그만 늦었어도 저기 시체들 사이에 있었을 거요. 어서 타시오.”

여전히 몸이 펄펄 끓는 톨킨 또한 롭과 함께 이프르를 떠났다.

그렇게 많은 이가 이프르를 탈출해 후방으로 갔지만, 여전히 옮길 사람은 많았다.

멀쩡한 사람은 걸어서라도 이프르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으나 지금 이프르엔 멀쩡한 사람보다 멀쩡하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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