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 판처, 대지에 서다 (2)
“하아…하아…….”
“존. 아파도 조금만 버텨. 이디스가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잖아.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인마!”
친구인 롭의 말에도 불구하고 존은 참호 벽에 기댄 채 계속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의 몸은 용암과도 같은 불덩이 같았고, 마치 소나기라도 내린 듯 땀을 주룩주룩 내렸다.
참호열(Trench fever).
존은 지금 5일 동안 고열이 난다고 하여 5일 열(five-day fever)이라고도 부르는 고통스러운 열병에 걸린 상태였다.
원인은 다름 아닌 비위생적인 참호 생활.
특히 지금 영국군은 일주일도 넘게 더러운 흙과 먼지, 온갖 벌레로 가득한 흙탕물로 가득한 이프르의 참호 안에 갇혀 있던 상태였고, 이는 몸이 약한 존에게 독으로 돌아왔다.
“제길, 약이라도 좀 줘 봐! 이러다 얘 죽겠어!”
“길슨 중위님, 그렇게 말씀하셔도 우리도 이젠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젠 신의 기적을 기대하는 수밖엔…….”
롭의 애처로운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위무병은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도 도와주고 싶지만, 계속해서 늘어나는 부상자로 인해 약은커녕 붕대조차 남아돌지를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게다가 지금 존의 몸 상태는 약으로 해결되기엔 이미 늦었을 정도로 심각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한시라도 빨리 후방으로 이송을 보내는 것이었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것은 불가능한 상황.
결국, 존은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한 채 이프르의 참호 속에서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끄어어어억……!”
“몽고메리 중위님, 조금만 참으십쇼!”
그것은 다른 부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존과 롭의 근처에선 버나드 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란 이름의 중위 하나가 폐와 무릎에 총알에 맞아 사경을 오가는 중이었지만, 암만 봐도 살아날 가능성이 없고 치료할 방법도 없어서 다들 이미 그의 무덤을 파는 중이었으니까.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 난 더 이상 참호에 가고 싶지 않아요. 휘파람과 파편이 휘파람을 불고 포효하는 곳. 프랑스군이 날 잡을 수 없는 곳, 바다 건너편으로 데려다주세요. 세상에나, 난 죽기 싫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Oh my, don’t want die. I want to go home).”
발랄한 음률에 어울리지 않는 토미들의 음울한 목소리 함께 비참한 노랫말이 이프르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그러나 이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영국 원정군은 장교들부터 일개 병사들까지 한계에 직면해 있었다.
프랑스군은 매일같이 자신들을 죽이려 달려들고, 그들이 뿌려 대는 독가스는 이젠 오줌 뿌린 천으로 막기 버거울 정도로 점점 심해지고 있었던 데 비해 영국군은 몸과 마음이 지친 것은 물론, 탄약과 식량, 마실 물조차 바닥을 보이는 상황이다.
이에 연합군은 비행선까지 동원하며 어떻게든 포위망이 갇힌 영국군에게 보급물자를 전달하려고 했지만, 하늘을 뒤엎을 정도로 맹렬한 프랑스군의 대공 포화로 인해 유의미한 효과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
구출되리란 기대는 날이 갈수록 점점 멀어져만 가고, 몇몇 장교들 사이에선 백기를 들고 항복하는 것 말곤 답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희망을 품기란 누가 되었든 어려운 일이었고, 존 또한 죽음을 직감한 채 롭의 손을 붙잡았다.
“롭……. 만약 살아남으면 이디스에게 약속대로 돌아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 줘.”
“바보야, 네 약혼자잖아. 사과는 네 입으로 직접 전해!”
“쿨럭쿨럭……!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어. 정말이지, 그러고 싶다고.”
학업 때문에 뒤늦게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을 받아 준 여자다.
블러드 메리 시절은 한참 전에 끝났음에도 영국 내에선 여전히 그 인식이 좋지 못한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해 준 여자다.
그런 여자를 내버려 두고 이대로 이딴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대학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학업을 마칠 때까지 입대를 연기해 주는 정부 정책이 취소된 것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전쟁 시작부터 빠른 참호전과 총력전이 일어난 것 때문에 영국엔 더 많은 병사와 더 많은 장교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이들은 조국을 위해 싸우러 가는데, 너는 집에 남아 있을 거냐는 가족들의 압박도 무척이나 심했기에 대학이란 방패도 사라진 존으로선 가족들의 뜻에 따라 입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전쟁이란 존재가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망치는지 뼈저리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부우우우웅───
존이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는 사이, 멀리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행기 소리였다.
그러나 어째 평소에 듣는 것보다 훨씬 커다랗게 들리는 것 같다.
존은 힘겹게 눈을 떠 참호와 철조망으로 가득한 대지만큼이나 우중충한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독수리들이다…….”
그리고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치 서커스를 보는 듯한, 형형 색깔의 비행기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독일 제국 항공대를 선두로 영국 왕립 항공대, 벨기에 육군 항공대를 포함한 수많은 협상국 전투기들이 이프르의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부우우우웅───!!
그리고 가장 앞장서서 그들을 이끄는 눈에 띄는 붉은색 독수리였다.
영국군 병사들은 그 비행기의 주인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봤다. 아니,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붉은 남작이다!”
서부전선의 수호신, 붉은 남작의 깜짝 등장에 절망과 죽음만이 가득했던 영국군 참호 안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하하! 봐, 존! 독수리들이야. 독수리들이 왔어!”
“아아…….”
“우릴 도우러 제리들이 오고 있어. 그러니 너도 조금만 참아.”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을 흔드는 친구의 모습에 ‘존’ 로널드 루엘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은 오랜만에 미소를 지으며 하염없이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독수리들이 왔다.
그리고 희망이 왔다.
* * *
“포슈 사령관님. 이프르 상공에 대규모 연합군 항공 전력이 나타났습니다.”
“독일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군. 황새들에게 출격 명령을 내리게.”
“옛!”
아르덴 숲 전투 이후 새롭게 편제된 프랑스 9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페르디낭 포슈는 참모장 막심 베이강(Maxime Weygand)의 보고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 비행기들이 나타나면 적 지상 병력 또한 뒤따라 나타난다는 것은 이제는 당연한 일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이프르 상공에 나타난 항공 전력의 규모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이상 적들의 공세도 그 어느 때보다도 거칠 것이다.
아니, 거칠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3분의 1이 죽거나 다치긴 했지만, 아직 20만이나 남아 있는 영국군 병력을 구출하지 못한다면 가뜩이나 이탈리아와 오스만 제국의 참전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협상국에 그 어느 때보다도 끔찍한 악몽이 찾아올 테니.
‘그렇기에 나로서도, 프랑스로서도 절대 물러날 수 없다.’
서부전선의 운명이, 프랑스의 운명이 이 순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포슈는 그 어느 때보다 결연한 눈으로 베이강을 향해 입을 열었다.
“베이강, 여기서 패배했다간 기껏 잡은 승기를 놓치고 말겠지. 그리고 그것을 다시 잡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 될 거야.”
“예. 그렇기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저들을 결코 지나가게 둬선 안 됩니다.”
“음, 전선의 병사들에게 준비를 단단히 하라 전하게. 이번 전투는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할 테니까.”
“옛, 사령관님.”
그러니 어디 한번 올 테면 와 봐라. 독일군이여.
위대한 프랑스는 이미 너희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 * *
쾅! 콰광!!
“모두 무기를 들어라! 참호 안에서 홍차 한 잔도 제대로 못 마신 채 말라 죽고 있는 토미 새끼들을 돕기 위해 훈족 놈들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놈들에게 납탄과 포탄을 듬뿍 먹여 주는 거다!”
“비브 라 프랑스! 비브 라 나시옹!”
장교들의 외침에 떨어지는 프랑스 병사들은 포격 소리에 지지 않겠다는 듯 큰 목소리로 일제히 소리쳤다.
이번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이 프랑스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프랑스 병사들 또한 매우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 참호 안에서 긴장한 얼굴로 대기하고 있는 보병들도, 적 포병을 견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포탄을 날려 대는 포병들도, 하늘에서 적 전투기들과 말 그대로 ‘개싸움’을 벌이고 있는 조종사들도 오늘만큼은 하나가 되어 조국을 승리시키겠단 투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콰광…쾅……!
“대위님, 포격이 멈췄습니다.”
“모두 사격 준비!”
철컥!
포격 소리가 잦아들자 프랑스군 병사들이 뿌연 포연과 연막으로 가득한 전방을 향해 총구를 내밀고 호치키스 중기관총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포격이 끝남과 동시에 연막 속에 몸을 숨긴 적 보병들이 기관단총을 앞세우고 몰려온다는 것은 이들에게 있어 이미 상식과도 같은 일이기에.
“…….”
“…….”
“……왜 안 오지?”
그러나 포격이 끝나고도 전방에선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귀 아프게 전장에 울려 퍼졌을 독일군의 함성도, 달려오는 적의 무수한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모두 경계를 늦추지 마라! 독일 놈들의 또 다른 속임수일지 모른다!”
긴장감에 땀을 흘리던 프랑스 병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자 장교들이 방심하지 말라는 듯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전장엔 여전히 소름 끼칠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었고, 여전히 독일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쿠르르릉───
“응?”
그때 조금씩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 소리는?”
“독일 놈들이겠지……?”
귀에 익지 않은 낯선 소리에 프랑스군 병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포격은 아니었다.
번개 뒤엔 늘 천둥이 치듯 포격엔 으레 포성이 따라붙는 법이었으니까.
“크라우트 놈들이 우리 아래서 땅굴이라도 파는 건 아닐까?”
“이프르를 포위한 지 이제 고작 일주일 지났는데, 땅굴은 무슨.”
“그럼, 장갑차?”
“글쎄,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장갑차라기엔 소리가 지나치게 무거운 느낌이었다.
게다가 애초에 지반 자체가 무르고, 사방이 진흙과 물웅덩이로 가득한 저지대에선 장갑차를 제대로 활용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미 독일군 또한 몸으로 배워 알고 있을 터.
무엇보다 장갑차 따위론 두터운 참호선을 뚫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쿠르르르르릉───!!
“젠장, 뭔지 몰라도 무언가가 오고 있어!”
“모두 준비해!”
소리가 점점 커지고, 그 진동이 참호 전체까지 퍼지자 프랑스군 병사들은 쓸데없는 갑론을박을 그만두고 다시 전방에 집중했다.
무엇이 오든지 간에 이대로 참호를 지나가게 둘 순 없었으니까.
“어……?”
그러나 소리의 정체들이 뿌연 연막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프랑스 병사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의심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쿠구구구궁───!!
“씨발, 저게 뭐야?!”
“괴, 괴물이다!”
그것들은 장갑차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컸다.
성경 속에 나오는 베히모스를 앞에 둔 느낌이 바로 이런 느낌일까?
프랑스군은 그대로 얼어붙은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젠장, 저것들이 철조망을 밟아 버리면서 오고 있잖아!”
“넋 놓고 있지 말고 갈겨!”
족히 수 미터는 다시 보이는 거대하고 위협적인 철 덩어리들이 윤형 철조망을 가볍게 짓밟으며 프랑스군 참호를 향해 천천히 진격해 오자 안색이 새파래진 장교들이 병사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프랑스 병사들은 굳어 있던 몸을 움직이며 서둘러 방아쇠를 당겼다.
타다다다다! 타다다다!!
“총, 총알이 전혀 안 먹혀!”
“으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그러나 프랑스군의 무수한 총알은 저 ‘정체 모를 거대한 괴물 장갑차’의 두꺼운 철판에 흠집조차 내지 못한 채 너무나도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프랑스군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기관총을 쏘고 또 쐈지만, 언제나 적을 손쉽게 갈아 버렸던 기관총의 납탄은 저것만은 도저히 무리라는 듯 전혀 먹히질 않았다.
콰왕! 쾅! 타다다다다다!!!
이윽고 독일의 베히모스들은 몸에 달린 대포와 기관총에서 불을 뿜으며 자신들에게 납탄을 선물해 준 프랑스 병사들에게 친히 보답을 시작했다.
“으아아악!”
“대포다! 대포 달린 괴물이 온다!!!”
프랑스군은 아까의 투지가 거짓말처럼 패닉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건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프랑스 병사들에겐 불행하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