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 판처, 대지에 서다 (1)
“알라여.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다르다넬스 해협 방어의 요충지인 갈리폴리 반도, 튀르키예인들은 차나칼레라 부르는 지역의 방어를 맡은 무스타파 케말 대령은 도저히 탄식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감았다.
청년 튀르크 출신 장교들이 그렇듯 신앙심이 그리 깊진 않은 케말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신을 찾지 않곤 제정신으로 서 있기가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이다. 세계대전이다.
그리고 무스타파 케말이 사랑하는 조국은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제 몸을 대전쟁의 전화에 던지고 말았다.
처칠이란 자연재해와도 같은 폭풍에 떠밀려서 말이다.
많은 튀르키예인처럼 전쟁 참전을 반대했던 케말로선 그야말로 입에서 쓴맛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조국이 세계대전이라는 감당하지 못할 전쟁에 끼어드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만약 참전한다 해도 당연히 협상국으로 참전할 줄 알았다.’
그러나 제국의 상황은 그의 자그마한 바람과는 정반대로 치닫고 있었다.
민중은 눈이 돌아가 영국에 대한 복수를 외치고 있었고, 친불파인 아흐메드 제말 파샤는 프랑스를 등에 업고 여론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정말 전쟁뿐이었다.
“차라리 이 모든 게 악몽이었다면 소원이 없겠군.”
“케말 대령.”
“잔더스 장군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우리 오스만 제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독일 군사 고문단의 수장 오토 폰 잔더스(Otto Viktor Karl Liman von Sanders) 장군이 머리를 감싸 쥐는 케말 대령의 물음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그걸 알고 싶었으니까.
당장 독일인들이 건설한 해안 요새을 시찰하러 차나칼레에 왔다가 영국의 트롤링으로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 편으로 참전해 버리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포로가 되어 버린 잔더스다.
눈앞이 깜깜해진 채 얼굴을 덮고 싶은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후우……. 개인적으로 어떤 상황이든 군인은 군인으로서 자신의 의무와 본분을 다해야 한다고 말해 주고 싶지만, 우리의 조국이 부득이하게 적이 된 이상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군.”
아무것도 모른 채 며칠 전까지 자신과 하하 웃음꽃을 피웠던 무스타파 케말과 오스만 장교들을 탓하기도 뭣했고 말이다.
“나로선 그저 자네에게 항복하라 권할 수밖에 없네.”
“저도 오스만의 군인으로서 그럴 순 없다는 것이 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잔더스와 독일 군사 고문단 장교들을 억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 군사 고문단은 오스만군에 깊게 관여하며 오스만 제국군의 약점과 고위 군사 기밀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곧 밀려올 적들로부터 조국을 지켜야 하는 무스타파 케말로선 미안하지만, 이들을 당분간 억류할 수밖에 없었다.
잔더스 또한 이를 이해하며 개인적으로 높게 평가하는 눈앞의 젊은 대령의 선택을 탓하지 않았고 말이다.
당장 자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물론, 여기엔 다른 꿍꿍이도 있었다.
‘케말 대령은 뛰어난 군인이자 능력과 인품을 모두 갖춘 뛰어난 지도자감이지. 어쩌면 그를 회유해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 몰라.’
상황이 상황이니 당장은 무리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오스만 제국이 전쟁에서 불리해지기 시작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물론, 그전에 지금의 위기를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 * *
“그리스의 아들들이여. 드디어 오랜 예언이 이루어질 때가 왔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참전 소식에 그리스는 그야말로 광기 어린 축제의 현장이 되었다.
영원한 숙적, 오스만 제국이 협상국의 적이 되었다.
여기서 가만히 있을 그리스가 아니었고, 베니젤로스는 저질러 준 처칠에게 속으로 감사 인사를 하며 입꼬리를 그 어느 때보다 높게 올린 채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초승달이 기우고 그리스가 다시 일어나는 날,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가 무덤에서 깨어나고, 갈망의 도시는 다시 그리스인들의 품으로 돌아오리니, 지금이 바로 그 날이다!”
마침 유력한 경쟁자인 불가리아는 세르비아 점령지 관리만으로도 벅찬 상황인 데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일부가 이탈리아 전선으로 향하면서 그 빈틈을 메꾸기 위해 주력군 대부분이 동부전선에 발목이 잡혀 있는 중이다.
그리스로선 그야말로 둘도 없는 기회,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렇기에 베니젤로스는 그 어느 때보다 힘을 주어 말했다.
“오늘 우리는 되찾을 것이다. 우리의 도시와 우리의 유산을!”
“와아아아아아──!!”
“그리스 만세!”
베니젤로스의 연설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테네 전역에서 거대한 함성이 일었다.
동시에 세르비아의 멸망으로 조용해진 발칸에 꺼지지 않았던 전쟁의 잔불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 * *
“설마하니, 여기서 그대로 머무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군.”
발칸에 다시 전쟁 시즌이 돌아오는 사이, 아프리카의 정글 못지않은 이집트의 뜨거운 태양 아래 방서모를 착용한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는 예정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한숨 어린 미소를 지었다.
이집트엔 그저 동아프리카 식민지 병력을 데리고 유럽으로 가기 위해 잠시 머물렀을 뿐인데, 갑자기 이집트를 지키기 위해 이 뜨거운 모래사막 위에서 싸우게 생겼으니.
“그래도 명령은 명령이니 해 볼 수 있는데 까진 해 봐야지.”
오래전 나미비아의 초원과 사막에서 함께했던 친애하는 한스 폰 초이 후작께서 직접 부탁까지 해 왔다.
이를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이다.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소장?”
레토포어베크가 잠깐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더위 때문인지 아니면 영국의 끔찍한 상황 때문인지 연신 땀을 흘리고 있는 영국군 장성 하나가 장교들과 함께 레토포어베크에게 다가왔다.
“이번에 이집트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아치볼드 제임스 머레이(Archibald James Murray) 소장이라고 합니다.”
“아, 얼마 전에 벨기에에서 이집트로 날아오신 신사분이시군요. 영국 원정군에선 참모장을 맡으셨다지요?”
“예, 최근에 건강이 좀 나빠져 잠시 후방에서 쉬었다가 오니, 우리 병사 태반이 이프르에 갇혀 버리는 꼴을 보게 되었지만요.”
머레이 소장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만큼이나 무거워 보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프르에서 참패를 두 눈 뜨고 지켜본 것도 모자라 이젠 포위당한 부하들을 내버려 두고 이집트로 날아와야만 했으니.
그의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으리라.
“벌어진 일을 후회해 봤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집중하도록 합시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나저나 독일군이 때마침 이집트에 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병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지는 법이니까요. 다만, 장군의 병력 대부분은 아스카리(Askari, 동아프리카 흑인 부대)라던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머레이의 우려하는 목소리에 레토포어베크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우리 프로이센 장교단이 군인으로 만들지 못하는 이들은 없지요. 그들의 피부는 비록 검지만, 투지만큼은 백인 병사들 못지않습니다.”
“부디 그러길 바랍니다. 어차피 지금 우리는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상황이니까요. 그 손이 검든 하얗든 말입니다.”
“하하하.”
머레이의 농담 아닌 농담에 레토포어베크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머레이는 여전히 아스카리들에게 그리 큰 기대는 안 하는 표정이었지만, 레토포어베크는 그들의 참모습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마 나중에 그들의 활약을 보게 되면 깜짝 놀라게 될 거다.
“그건 그렇고, 우리 독일군은 파스타와 케밥 중 어느 쪽을 맡는 겁니까?”
“이탈리아군을 맡아 주시죠. 팔레스타인과 시나이반도에서 몰려올 오스만 놈들은 우리 영국군이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필요하다면 현지 아랍 부족들과 접촉해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해서라도 말이다.
머레이가 원 역사에서 그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직속상관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 놀라운 생각은 아니었다.
“이탈리아군이라. 알겠습니다. 이참에 삼국동맹을 배신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야겠군요.”
레토포어베크가 사자처럼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북아프리카‧중동 전선의 개막이오, 아프리카의 사자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 * *
“오오, 드디어 우리 전차들이 전장에서 그 위용을 뽐낼 날이 왔군.”
이탈리아와 오스만 제국의 참전으로 인해 발칸에 다시 전화가 일기 시작하고, 북아프리카와 중동 일대가 시끄럽게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슐리펜은 대지에 나열해 있는 전차들의 모습에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슐리펜 원수님. 앞으로도 오래오래 사셔야죠.”
다른 장성들이 그리 말했지만, 아무래도 자신은 올해를 넘기긴 힘들 것이다.
이미 기력이 쇠할 대로 쇠하기도 했고, 수명이 한계에 달한 것이 몸으로도 느껴질 정도니.
슐리펜으로선 그저 마지막 한이었던 전차의 활약을 보고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이 다행일 따름이었다.
“하하하! 친애하는 슐리펜 원수님 아니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아이텔 왕자님.”
웃음소리와 함께 빌헬름 2세의 차남인 아이텔 왕자가 어릴 때처럼 큰 덩치를 자랑하며 등장했다.
본래라면 제1 근위보병 연대장을 맡았을 아이텔 왕자지만, 그는 자신처럼 전차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는지 전쟁이 터지자마자 스스로 기갑부대에 자원했다.
허구한 날 동생인 아달베르트 왕자와 투덕거리면서도 이런 면은 형제가 꼭 닮은 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젠 지휘관이 되어 전차들을 이끌고 이프르 포위망 돌파를 맡게 되었으니, 이번 작전의 성공 여부가 왕자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저나 영국인들이 사고를 친 탓에 갑작스럽게 출격하게 되었는데도 열성적이시군요.”
“우리 할머니가 영국 공주셨고, 증조할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이지 않습니까. 저 또한 영국 왕족이라 할 수 있으니, 가여운 신민들을 구하는 데 앞장서야지요.”
“크큭, 그렇습니까?”
“아이텔 왕자님. 1대대의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 수고했네. 루츠 대위.”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젊은 장교 하나가 경례를 올리며 아이텔 왕자에게 보고를 올렸다.
슐리펜인 누구인지 눈빛으로 묻자 아이텔 왕자가 입을 열었다.
“이쪽은 오스발트 루츠(Oswald Lutz) 대위입니다. 원래는 수송부 소속이었는데, 싹수가 보여서 부관으로 데려왔지요.”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슐리펜 원수님.”
전차의 아버지라 불리는 구데리안의 이름에 가려져 그다지 유명하진 않지만, 그 구데리안의 상관이자 그를 전차의 길로 끌어들인 장본인으로 진정한 독일 기갑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루츠가 경례를 올리자 슐리펜은 미소를 지으며 경례를 받아 주었다.
전도유망한, 그것도 전차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니까.
“그나저나 드디어 전장에 위풍당당한 자태를 드러내는 날이 이젠 정말 머지않았군요. 정말이지 기대가 됩니다.”
“동감일세.”
루츠와 슐리펜은 자랑스럽다는 눈으로 검은 매연을 내뿜으며 줄지어 이동하는 한때 다임러 전차라 불렸던 1호 전차(Panzerkampfwagen I)와 벤츠 전차라 불렸던 2호 전차(Panzerkampfwagen II)를 바라봤다.
참고로 독일군 신형 전차들의 제식명을 붙인 것은 다름 아닌 한스였다.
이유야 별거 없었다.
‘독일 전차는 역시 1호, 2호 식으로 불러야지!’
그게 근본이니까(끄덕).
물론 아이텔 왕자와 슐리펜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성의 없는 이름 아니냐고 볼을 부풀렸지만.
하지만 결국, 제식명은 한스의 뜻대로 결정이 되어 버렸고. 아이텔 왕자는 이 원한(?)을 갚기 위해 한스에게 사소한 복수를 했다.
“이대로 1호 전차, 2호 전차라 부르기엔 좀 그러니 별명 같은 거라도 붙이죠.”
“그럼, 1호 전차는 ‘카이저’라 부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오, 그거 좋군요. 우리 독일 제국의 강력한 중전차에 걸맞은 이름입니다. 그럼 경전차인 2호 전차는…….”
“한스로 하지.”
“……예?”
“좋지 않나. 우리 친애하는 전차의 발상자를 기리는 의미에서.”
“왕자님, 아무리 그래도 한스는 좀……. 무슨 시골 농부 같은 이름이잖습니까.”
“그럼, ‘아이젠한스(Eisenhans)’로.”
뜻을 풀이하자면 ‘강철의 한스’되시겠다.
다만, 아예 근본 없는 이름은 아니고, 그림 형제의 동화에 나오는 등장인물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한스가 들었으면 그야말로 몰려오는 오글거림에 몸을 배배 꼬았을 이름이었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한스 군은 아직 우리 전차들 별명에 대해서 모르던가?”
“하하, 제가 친애하는 매제를 위해 준비한 깜짝 선물입니다.”
“왕자님도 참 성격 나쁘십니다.”
못 말리겠다는 루츠의 말에 아이텔 왕자와 슐리펜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중에 한스가 ‘강철의 한스들이 서부전선을 휩쓸다!’ 같은 신문 기사를 봤을 때의 얼굴이 정말이지 기대가 된다.
“자, 잡담은 여기까지 하지. 전장이 우리를 기다리니.”
“옛, 왕자님.”
영국군의 상황은 1분 1초를 다투고 있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독일의 판처들은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우리 전차들은 대지를 울리며 달려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