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86화 (186/193)

186화 : 동맹국의 역습 (4)

“가뜩이나 머리 아픈 일 천지인데, 오스만 제국은 왜 또 지랄인지.”

“그래도 이 정도면 귀여운 정도지 않나. 적어도 이탈리아처럼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설쳐 대진 않으니.”

뷜로 총리의 말대로다.

비록 오스만 제국이 곤란해진 우리 상황을 이용해 욕심을 부리곤 있지만, 오스만 제국의 X맨 이스마일 엔베르가 눈이 홱 돌아가서 폭주하는 것보단 차라리 이게 훨씬 나으니.

다만, 오스만 제국이나 이스마일 엔베르에겐 크게 관여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왜 엔베르의 지능이 올라갔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어쨌든 오스만 쪽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되겠나?”

“거절하기도 어렵고, 거절할 이유도 없으니까요.”

이번 오스만 제국의 요구가 살짝 시건방지긴 해도 가뜩이나 상황도 안 좋은데, 괜히 오스만 제국과 갈등을 일으켜 일을 더 키우는 것보단 낫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정도면 그래도 선은 지킨 수준이고 말이다.

만약 인제 와서 발칸 영토를 요구하거나 오스만 옆 나라인 페르시아 영토를 욕심이라도 냈다면 나로선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머리를 쥐어 감쌌을 테니까.

“다만, 그대로는 안 되고 일단 협상해 봐야죠. 아제르바이잔이야 원래 오스만에게 할양하는 것을 고려했던 적도 있으니 딱히 상관없는데, 아르메니아 지역 같은 경우엔 자칫 잘못했다간 민족 문제가 터져서 제노사이드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당장 이스마일 엔베르는 물론이고, 그와 함께 오스만 삼두정치를 구성하고 있는 메흐메트 탈라트 파샤, 아흐메드 제말 파샤 모두 아르메니아 학살을 주도했던 인물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르메니아가 완전히 오스만 제국에 넘어간다?

솔직히 나로선 피로 얼룩진 미래밖에 안 보인다.

아직 살아서 숨 쉬고 있는 압뒬하미트 2세의 지지자들이 벌인 일이긴 하지만, 이미 청년 튀르크 혁명 당시 아르메니아인 학살이 있었던 상황이니까.

“도덕적인 이유도 이유지만, 최악의 경우 오스만 제국에 엮여서 우리 평판까지 나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넘겨준 땅에서 피바람이 불면, 그 불똥은 당연히 우리에게 튈 테니까. 뭐, 그 부분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아르메니아 말고 다른 영토를 준다거나 아니면 이권을 더 보장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풀어 봐야겠다.

아니면 예전 발칸 공국들이 그랬던 것처럼 명목상 속국으로 삼게 하든가.

쉽진 않겠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

미수복영토에 기어코 눈이 돌아간 이탈리아와 달리 이쪽은 적어도 대화의 의지는 충만하니 말이다.

“그럼, 콘스탄티니예에 있는 반겐하임 대사에게 협상 테이블을 마련하라고 전하겠…….”

“장관님! 장관니이임!!”

“젠장, 이번엔 또 뭡니까?!”

오스만 제국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 지으려는 찰나, 또다시 들려온 비서의 익숙해지기 싫은 비명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야 저 비명과 함께 찾아오는 것은 언제나 나쁜 소식뿐이었으니까.

“영국 해군입니다!”

“……예?”

그러나 비서의 이어진 말에 나도 모르게 입에서 멍청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영국 해군이라고? 여기서 걔네가 왜 나와?

“설마,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해군이나 이탈리아 해군에게 패배하기라도 했습니까?”

갑자기 엄습해 오는 어마어마한 불안감에 나는 비서를 향해 그렇게 물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차라리 이쪽이길 바라며.

“그, 그 반대입니다. 영국 지중해 함대가 오스만 함대를 공격했습니다. 아직 자세한 정황은 파악되지 않았지만, 이미 다수의 오스만 함선들이 격침되었다고…….”

“뭐, 뭐라고?!”

“하…하하…하하하하하…….”

이게 지금 뭔 개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뷜로 총리의 경악 어린 목소리를 배경으로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 어느 때보다 허탈한 웃음소리.

그리고 허탈함은 곧 분노로 바뀌어 국가수상부 전체에 울려 퍼졌다.

“처칠 이 개새끼야아아아아아───!!!”

윈스턴 처칠.

제1차 세계대전 최악의 트롤러가 기어코 대사고를 쳐 버렸다.

* * *

“밀른 제독님, 살아남은 오스만 함선들이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도망치고 있습니다. 추격할까요?”

“아니, 추격은 중지한다. 다르다넬스 해협은 해안포로 가득한 곳.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함부로 들어가기엔 너무 위험해.”

“예. 그나저나 정말 이래도 되겠습니까?”

“으음, 그래도 해군장관 명령이지 않나.”

물론, 그렇게 말하는 영국 지중해 함대 사령관 아치볼드 버클리 밀른(Archibald Berkeley Milne) 제독의 얼굴 또한 어딘가 떨떠름한 얼굴이었지만.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엔 그도 중립인 오스만 해군을 공격하라는 처칠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의문을 표했으니까.

“오스만 해군을 공격하자니. 윈스턴,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그리고 그것은 오밤중에 홀로 처칠을 마주한 애스퀴스 총리도 마찬가지였다.

“오스만 제국이 러불동맹 편으로 참전할 위험이 발생한 이상 오스만 해군을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이탈리아 해군을 지원하거나 러시아 흑해함대와 함께 지중해를 노릴 가능성이 큽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 아니오. 게다가 가뜩이나 이프르에 갇힌 우리 병사들은 물론, 이탈리아의 참전 때문에 골치가 아픈 상황인데, 이 와중에 오스만 하고까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 상황이 안 좋기에 더욱 강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대로 에드워드 그레이의 말처럼 오스만 제국의 주장을 수용했다간 우리 대영제국의 위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도 다른 나라도 아닌 유럽의 환자 오스만에 의해 말이다.

“흐음….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그래도 함대 공격은 너무 강경한 것 아니오?”

“어차피 우리가 요구를 거절하면 프랑스에 붙을 놈들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그 전에 오스만 함대를 섬멸해 혹시 모를 위협을 배제해야 합니다.”

애스퀴스 총리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더더욱 목소리를 높이는 처칠.

물론, 그 이면엔 이프르 공세의 대실패로 인해 어차피 애스퀴스 내각은 오래가긴 글렀으니, 이참에 공을 세워 차기, 또는 차차기 총리 자리를 노려 보겠단 정치적 계산도 깔려있었다.

“……잘못했다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번질 것이오.”

아니, 높은 확률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총리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여전히 당당했다.

“몰락할 대로 몰락한 오스만 따위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당장 크림 전쟁 때 우리 도움이 없었더라면 한참 전에 러시아에 멸망했을 나라가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후, 좋소. 윈스턴 자네의 뜻대로 하시오.”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총리의 허락까지 떨어지자 더는 윈스턴 처칠의 앞을 가로막을 것은 없었다.

곧 밀른 제독이 이끄는 지중해 함대가 명령에 따라 평소처럼 아나톨리아 인근 해역을 돌아다니던 오스만 함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오스만 함대에 있어서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일.

쾅! 콰광!!

“으아악!”

“왜 영국 해군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거야!”

“후퇴! 어떻게든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후퇴해라!!”

결국, 오스만 함선들은 갑작스러운 영국 해군의 공격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 해 본 채 대부분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처치이이이이일!!!”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해 받은 이스마일 엔베르와 튀르키예인들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설명조차 필요 없으리라.

* * *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겁니까!!”

다음 날.

다우닝가에선 분노로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붉게 달아오른 에드워드 그레이의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진정하시오. 에드워드.”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오스만 제국이 우리 영국에게 선전포고했습니다. 총리께서 저 망할 돼지 새끼와 멋대로 벌인 짓 때문에 말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가기로 한스 폰 초이 후작과 이야기를 나눈 지 한나절도 안 지나 이런 일이 터졌는데, 그야 그레이로선 분노할 수밖에 없다.

물론, 처칠은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듯 여전히 태연하고 뻔뻔한 태도였지만.

“이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오. 그렇기에 우리가 먼저 가장 위협이 될 오스만 해군을 제거하겠단 결단을 내린 것이고. 게다가 오스만이 선전포고해 봤자 무엇을 할 수 있겠소?”

“닥치시오. 윈스턴.”

재무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스만 제국의 참전으로 이집트가 위험해졌소. 우리 영국의 젖줄인 수에즈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노출되었단 말이오!”

어디 그뿐인가?

그동안 협상국이 쏠쏠하게 써먹던 중동 석유도 끊겨 버릴 테고, 영국의 중요 석유 공급처인 페르시아 또한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물론, 석유야 그만큼 미국에서 수입해 오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손해는 손해였다.

“이집트에 주둔 중인 병력만으론 하나뿐이라면 모를까, 이탈리아와 오스만 제국을 둘 다 막을 순 없소.”

“이탈리아는 저열한 흑인 국가 따위에 패배하는 병신들이고,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환자로 전락한 지 오래요. 충분히 우리 영국만으로 대처할 수 있소!”

물론. 위대하신 윈스턴 처칠께서는 여전히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지만.

로이드 조지와 그레이 외무장관으론 그야말로 기가 찰 노릇이다.

하지만 전쟁장관인 키치너마저 구석에서 말없이 시가나 피우고 앉아 있는 상황이니, 두 사람이 이 이상 입 아프게 떠들어 봤자 의미가 없었다.

“그레이 장관, 독일 제국에선 뭐라고 합니까?”

“뭘 뭐라고 하겠습니까? 초이 후작이 런던으로 날아와 저 돼지 새끼의 멱을 따 버리겠다는 것을 내 겨우 말린 참입니다.”

당장 독일 군사 고문단은 물론, 콘스탄티니예에 정박 중이던 독일 경순양함들까지 오스만 제국에 억류된 상태다.

거기다 석유 공급에 차질이 생겨 버렸으니.

독일과 한스 폰 초이가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후……. 전후 유럽의 주도권을 잃지 않겠다고 벌인 짓이 오히려 독일에 빚만 잔뜩 지게 만들고 있군. 어쨌든 지금으로선 독일을 어떻게든 달래야 합니다. 우린 독일 제국의 도움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이니.”

로이드 조지의 말에 에드워드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프르는 당장은 어떻게든 포위망을 두들기는 것 빼곤 방법이 없으니, 일단 놔두더라도…… 이집트는 한시가 급했다.

이탈리아의 참전이야 이미 예상했던 바니 충분히 대처할 수 있지만, 오스만 제국까지 달려온다면 이야기가 달랐으니까.

“그리고 일단 한숨 돌리고 나면 엉망이 된 집안 정리를 해야겠지.”

집주인을 바꾸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흐르는 땀을 연신 손수건으로 훔치고 있는 애스퀴스 총리를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 * *

“뻔뻔한 영국 놈들 같으니. 일을 그딴 식으로 망쳐 놓고 인제 와서 우리보고 도와달라니.”

“그러나 애석하게도 도와주지도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폐하.”

나로서도 이가 갈리다 못해 평평해질 것만 같은 기분이지만, 인제 와서 영국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나저나 위협이 될 것 같다고 중립국 함대를 공격하다니.”

“그게 영국입니다. 팔켄하인 참모총장님. 이미 나폴레옹 전쟁 때 덴마크란 전례도 있고요.”

게다가 처가놈도 윌프레드 작전이나 캐터펄트 작전이란 전과가 있으니.

설마하니 여기서 갑자기 그런 짓을 벌일 줄은 이 한스 폰 초이 조차도 상상조차 못 했다.

역시 아직 원조 혐성국을 따라잡기엔 먼 모양이다.

“어쨌든 일단 이집트 쪽은 쉽게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런가?”

“네, 마침 레토포어베크 소장과 아스카리 병력이 이집트에서 대기 중이지 않습니까.”

본래라면 프랑스 식민지 부대들처럼 서부전선에 투입할 예정이었는데, 아무래도 레토포어베크는 아프리카에서 싸워야 할 운명인 모양이다.

다만, 그 전장은 정글이 아닌 사막이 되겠지만.

“저 또한 레토포어베크 장군이라면 충분히 잘 해내리라 생각합니다.”

“음, 팔켄하인 자네도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럼 북아프리카는 레토포어베크에게 맡기도록 하지.”

“다음은 이프르입니다만…….”

팔켄하인이 말꼬리를 흐리며 나를 향해 시선을 향했다.

이에 내가 카이저에게 대신 대답했다.

“계획보단 조금 이르지만, 전차를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차?”

“예. 본래라면 12월 말에 엔 전선에 투입할 예정이었지만, 최대한 빨리 프랑스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영국군을 구출해 오려면 당장 이것이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전부는 아니고, 본래 계획했던 전력 일부만 투입할 수 있겠지만, 팔켄하인과 깊이 있는 논의를 한 결과, 이프르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집에서 목이 빠지게 전차가 전장에 나서길 만을 기다리고 있는 슐리펜이 드디어 한을 풀겠군. 좋아,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카이저의 허락과 동시에 전차의 첫 데뷔전이 결정되었다.

그게 하필이면 트롤링을 장난 아니게 벌인 영국 때문이란 게 짜증 나긴 하지만, 괜찮다.

영국은 나중에 이 빚을 반드시 갚아야 할 테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