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85화 (185/193)

185화 : 동맹국의 역습 (3)

[치직──! 이탈리아 왕국은 현 시각 부로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독일인들로부터 알토 아디제(Alto Adige, 쥐트티롤)를 되찾을 것입니다. 이스트리아반도와 달마티아를 되찾을 것입니다. 이탈리아인들이 마땅히 점유해야 할 정당한 영토를 모두 되찾을 것입니──뚝!]

“지랄하는군.”

이탈리아 왕국의 ‘전’ 총리 조반니 졸리티(Giovanni Giolitti)는 더는 못 들어 주겠단 얼굴로 라디오를 꺼 버렸다.

결국, 그의 조국은 세계대전이란 광기 속에 스스로 제 몸을 던지고 말았다.

전쟁에 절대 끼어선 안 된다는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평소 유순했던 난쟁이 국왕은 할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꿈에 나타나 완전한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루라고 별빛으로 속삭이기라도 한 건지 참전을 부르짖었고,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상대권까지 사용하며 살란드라와 함께 기어코 참전을 해 버렸으니.

“차라리 이 모든 게 악몽이었다면 좋겠군.”

프랑스와의 비밀 협약 따위를 맺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냥 간만 보는 선에서 끝냈을 것이다.

물론, 대전쟁이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의 암살로 갑자기 '펑' 하고 터지리라 그 누가 예상했겠나 만은.

하지만 전쟁은 일어나 버렸고, 전쟁에 반대했던 졸리티는 라디오에서 시끄럽게 개전 연설을 떠들고 있는 역사적 우파 소속의 안토니오 살란드라에게 밀려 총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이젠 보다시피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채 조국의 참전을 집에서 지켜보는 처지가 되었고,

하지만 그를 더욱 침울하게 만드는 것은 이탈리아 국민 대다수는 전쟁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에도 불구하고 참전에 환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유야 언제나 그렇듯 그놈의 미수복지, 미수복지였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린 전쟁을 할 준비가 안 되었단 말이다!”

졸리티가 이탈리아 왕국의 고질병인 정치적 혼란과 이에 따른 사회적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을 벌인 것이 고작 2년 전이다.

그리고 2년 전 그 전쟁에서 이탈리아는 졸리티 자신조차 오스만 제국과의 평화협상을 진지하게 고려했을 정도로 곤욕을 치렀었다.

그런데 이젠 독일과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전쟁을 벌이겠다니, 이게 지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아무리 제 분수를 몰라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프랑스군이 영국 원정군 전력 대부분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지만, 그렇다고 전쟁의 승기가 아직 동맹국 쪽으로 완전히 기운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비토리아 에마누엘레 3세와 살란드라 내각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참전을 결정해 버렸고, 미수복영토에 눈이 돌아간 국민은 그들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있으니.

지난 몇 년간 이탈리아의 부흥을 위해 발 벗고 뛰어온 졸리티의 노력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에휴, 이렇게 화를 내 봤자 무슨 소용이겠나.’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조국이 제발 무사하기를 기도하는 것만을 빼고 말이다.

* * *

“이탈리아 왕국이 우리 프랑스의 편에 서기로 했습니다.”

“…….”

“이젠 당신이 결정을 내릴 때입니다. 이스마일 엔베르 파샤.”

본래 러시아 대사로 있다가 팔레올로그에게 그 자리를 맡기고 조국을 위해 늙은 몸을 이끌고 콘스탄티니예를 비밀리에 방문한 테오필 델카세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이스마일 엔베르는 등을 보인 채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엔베르, 여기까지 와서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가? 오만한 영국 놈들이 이프르에서 끝장나기 일보 직전이야.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기회가 바로 지금 우리 눈앞에 찾아왔단 말이다!”

엔베르의 모습이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는지 오스만 삼두정의 일원이자 해군장관인 아흐메드 제말 파샤가 더는 못 참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소?”

그리고 그제야 엔베르는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술탄은 포함한 튀르키예인 대부분은 영국과 독일에 무릎 꿇기를 택했는데.”

정확히는 그냥 계속 중립을 지키기로 한 것이지만.

영국 해군장관의 오만하고 모욕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술탄과 관료들은 그런 일로 전쟁을 벌일 순 없다며 침묵을 택하곤 한스 폰 초이가 던져 주는 콩고물에 만족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졸리티가 이탈리아가 전쟁 준비가 안 되었다고 한탄하는 것처럼 오스만 제국 또한 발칸전쟁 때 입은 피해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지금 오스만 제국에서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없소. 친애하는 한스 폰 초이 후작께서 종전 후 빼앗긴 우리 전함에 대한 보상은 물론, 1878년 전쟁(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때 러시아 제국에 빼앗긴 아르다한과 카르스까지 돌려주겠다 해서 말이오.”

거기다 무리하게 참전하지 않아도 된다니, 술탄과 관료 놈들이 얼마나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는지 모를 거다.

물론 한스로서도 어떻게든 갈리폴리가 갈리폴리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오스만 제국을 배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심지어 본래 한스는 한술 더 떠 이슬람 국가인 데다가 21세기에도 튀르키예와 친밀한 관계인 아제르바이잔까지 오스만 제국에게 넘겨 오스만을 안정적인 석유 공급처로 만들려고 했다.

다만, 이는 오스만 제국 아니, 그 뒤에 있는 독일 제국에 중동 석유까지 모자라 바쿠 유전마저 완전히 넘겨주고 싶지 않았던 영국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한스 폰 초이라면 나 또한 잘 알지요.”

엔베르의 말에 머리가 새하얗게 센 델카세가 입을 열었다.

“그가 아직 어린아이였던 시절 모로코에서 직접 만나 보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무슨 수를 써서든 요절을 내놨어야 했는데.

델카세는 때늦은 후회가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기에 그의 방식도 잘 알지요. 흑심을 선의로 포장한 채 다가와 서로 이득이라며 혀를 놀리지만, 막상 모든 것이 끝난 뒤엔 그와 독일만이 모든 이익을 챙겨 가는 지독히 위선적인 방식 말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요! 독일에 우리는 그저 쓰기 쉬운 하수인에 불과하오, 돼지 같은 처칠이 우리 전함을 가져갈 때도 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그냥 참으라고 했소!”

아흐메드 제말 파샤가 영국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으며 맞장구를 치자 델카세가 기세를 이어 이스마일 엔베르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우리 프랑스의 손을 잡으십시오. 그러면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이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마치 에덴의 뱀이 선악과를 먹으라고 이브를 유혹하는 것처럼.

“제국의 그 누구도 내 말을 듣지 않을 거요. 하물며 오랜 숙적인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는 것을 제국의 신민들이 과연 용납하겠소?”

“외교관으로서 말하는 건데, 가끔은 국익을 위해선 과거의 적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법이지요. 당장 동맹의 역전이란 말이 왜 있겠습니까? 당장 우리 프랑스는 크림 전쟁 당시 영국과 손을 잡고 러시아와 싸웠고, 저 영국과 독일조차 몇 해 전까지는 바다를 두고 으르렁거리던 사이였습니다.”

“말로는 쉬운 일이지.”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아르다한과 카르스는 물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을 할양할 것입니다.”

“!”

페트로그라드에서 러시아와 니키가 벌이는 환장 쇼를 직관하느라 위장에 구멍이 날 지경인 팔레올로그 대사가 차르를 어렵게 설득해 얻어 낸 조건이었다.

물론, 러시아 제국 또한 지난 동부 대공세로 인해 발등의 불이 떨어졌기에 어쩔 수 없이 프랑스의 말에 따라 준 것이라 전쟁이 끝나면 말을 바꿀 가능성도 매우, 매우 높았지만.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어차피 엔베르를 이용해 오스만 제국을 동맹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영광이라는 한참 철 지난 헛소리를 입에 담기까지 한 델카세다.

오스만 제국이 나중에 어떻게 되든 말든 델카세로선 어떻게든 저 게르만 향우회 놈들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면, 어떤 거짓말이든 매우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거기에 발칸은 물론,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한 페르시아, 그리고 이집트의 또한 오스만 제국에게 넘겨드리겠습니다.”

“들었소, 엔베르? 우리 오스만 제국에 있어 다신 없을 기회요. 그대의 손으로 과거 전 유럽을 벌벌 떨게 했던 강대한 오스만 제국을 다시금 재건할 기회!”

델카세와 아흐메드 제말 파샤가 양쪽에서 끊임없이 엔베르를 흔들었다.

이에 엔베르는 깊은 고민에 빠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오래는 드리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시간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자원이니.”

엔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델카세와 아흐메드 제말 파샤가 방을 나가고, 이스마일 엔베르 혼자 방안에 덩그러니 남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날 너무 병신 취급하는군.”

그러나 짧은 침묵 끝에 이스마일 엔베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아르메니아에 아제르바이잔? 거기다 페르시아에 이집트라고? 아흐메드가 프랑스에 빠져도 단단히 빠졌군. 정말 프랑스와 러시아가 우리에게 그 모든 땅을 주리라고 믿는 건가?”

차라리 그리스인들이 오스만을 로마라고 인정하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기적처럼 이 전쟁에서 동맹국이 승리한다고 해도 100% 말을 바꿀 게 분명하다.

어차피 오스만 혼자서는 프랑스나 러시아 상대로 아무것도 못 하니 말이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환자 취급을 받으면서도 열강에 목소리라도 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일이란 뒷배가 있어서일 뿐이니까.

“게다가 고작 영국 놈들 포위당했다고 동맹국 편에 서기란 너무 일러.”

물론, 이번 사태에 쾌재를 불렀을 정도로 영국이 싫은 것은 맞다.

아흐메드 제말 파샤의 말처럼 오스만을 따까리 취급하는 독일에 불만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불가리아와 그리스 놈들이 세르비아 영토를 룰루랄라 차지하는 것도 솔직히 배가 아프다.

하지만 그게 꼭 오스만 제국이 동맹국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지 않은가?

한스가 알았으면 그야말로 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엔베르가 똑똑해졌냐며 경악할 일.

하지만 독일에 대한 반감은 도리어 이스마일 엔베르의 머릿속을 그 어느 때보다 맑게 만들었고, 독단적으로 독일 편으로 참전했던 원 역사와 달리 상당히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물론 델카세와 아흐메드 제말 파샤의 말처럼 이 기회를 이용하지 않을 수도 없는 법이지.”

다만, 방법은 달리해야겠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독일과 영국에 동맹국 편에 서지 않고 중립을 계속 지키겠단 조건으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등 캅카스 남부를 요구한다. 그 정도면 그치들도 받아들이겠지.”

굳이 프랑스와 러시아 편에 설 것도 없다.

특히 이탈리아가 참전하며 영국령 이집트에 빨간불이 켜진 상황이니만큼 저들로서도 강하게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 결정을 내린 이스마일 엔베르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야말로 이스마일 엔베르가 거의 다 넘어왔다고 생각한 델카세와 아흐메드 제말 파샤에겐 청천벽력 같은 미소였지만.

* * *

결정을 내린 이스마일 엔베르의 행동은 빨랐다.

그는 곧장 세 파샤 중 마지막 일원이자 오스만 제국의 총리인 메흐메트 탈라트 파샤를 찾아갔고, 아흐메드 제말 파샤와 달리 확고한 친독파였던 탈라트 파샤는 순순히 엔베르의 계획에 동의했다.

이 일로 인해 독일과 영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닌지 약간의 우려는 있었지만, 적어도 아흐메드 제말 파샤의 계획보단 훨씬 리스크도 적고 훨씬 제정신이었으니까.

“이스마일 엔베르 파샤, 자네 혹시 어디 아픈가?”

“……전 멀쩡합니다만?”

권력은 없지만, 일단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자인 메흐메트 5세도 이스마일 엔베르가 웬일로 정상적인 소리를 하는지 의아해했으나 어쨌든 그의 계획에 반대는 하진 않았다.

인제 와서 뜬금없이 전쟁에 참전한다는 미친 소리만 아니면,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엔베르…… 속였구나, 엔베르!”

물론, 뒤늦게 엔베르가 처음부터 자신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아흐메드 제말 파샤는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었지만.

그렇게 이스마일 엔베르의 계획은 잘 진행되는 것 같았지만…….

“허허허허, 오스만 제국이 감히 우리 대영제국에 그런 시건방진 제안을 건넸다고?”

“예, 처칠 장관님.”

“불쾌하군. 아주 아주 불쾌해.”

처칠이란 이름의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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