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 동맹국의 역습 (1)
“……장관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서명하시지요.”
레닌과 내가 만난 지 정확히 일주일 후.
레닌은 현실에 굴복하고 우리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였다.
물론, 증거 자료를 남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내로남불이 특기인 빨간맛 친구답게 나중에 나는 그런 적 없다고 말을 바꾸며 모르쇠로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레닌은 기어코 자신에게 서명까지 시키는 내 모습에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쥔 만년필에 힘을 주었지만.
이러다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머리털까지 전부 빠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레닌이 비밀 협정문에 서명까지 했으니, 우리도 약속을 지킬 시간이다.
곧 레닌은 스위스로 돌아갔고, 나는 그를 위한 열차를 주스위스 독일 대사관을 통해 취리히 기차역으로 보냈다.
다만, 흔히 알려진 것처럼 봉인열차가 아닌 평범하기 그지없는 열차를 말이다.
‘사실 봉인열차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지어 낸 이야기란 말이지.’
독일과 내통했단 소리(틀린 말은 아니었다)를 들을까 봐 레닌이 자기가 봉인열차 타고 왔다고 뻥쳤거든.
게다가 독일도 레닌 이름이란 비밀병기를 그냥 열차보다 봉인열차에 태워 보냈다는 것이 더 멋져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사실 봉인열차 태웠다고 선전한 것도 있고.
애초에 이번 일이 딱히 비밀도 아니었던 것이 당장 기차에 레닌 측근들과 우리 장교들이 들락날락하고 있고, 기차역 플랫폼 한구석엔 몇 안 되는 러시아 망명자들이 레닌을 향해 대놓고 독일 스파이라고 욕을 하고 있는 판국이다.
정작 레닌은 이 와중에 자신을 만나러 온 독일 사민당원들과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있고.
‘심지어 기차를 타고 러시아까지 간 것도 아니었단 말이지.’
당장 그놈의 철도 때문에 내가 폴란드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 상황인데, 독일에서 러시아 국경까지 기차로 갈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니까.
레닌은 어디까지나 기차를 탄 이유는 독일 영토를 가로질러 항구로 가기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포메른의 항구 도시인 자스니츠에서 페리를 타고 중립국인 스웨덴으로 가서 핀란드를 거쳐 러시아로 돌아갈 예정이라 들었다.
낭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진실이지만, 현실이란 것이 원래 그런 법이다.
뿌우우우웅───
곧 비난과 응원을 뒤로하고, 레닌이 탄 기차가 우렁찬 소리와 함께 기차역을 떠나기 시작했다.
요즘은 조용해서 왠지 더 불안한 처칠의 말을 인용하자면 대도시 수도관 속으로 섞어 넣게 될 장티푸스, 또는 콜레라 배양균이 들어 있는 레닌이란 이름의 앰풀을 러시아로 보낸 것이다.
“장관님. 이제 바르샤바로 돌아가서 일하셔야죠?”
“잠깐 포츠담에 들러서 아내 얼굴이라도 보고 가면….”
“하.하.하. 농담도 심하셔라. 자, 가시죠. 전쟁성 직원들도 어서 장관님이 돌아오시기만을 목이 빠지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친애하는 우리 외무청 직원들에 의해 지겨운 서류들이 있는 바르샤바로 다시 끌려갔다.
야근이란 커피와 서류로 범벅이 된 보고 싶지 않은 오랜 친구가 다시금 나를 찾아온 순간이었다.
* * *
“자, 다들 모였으니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지.”
우리의 주인공이 바르샤바에서 또다시 서류와 소리 없는 전쟁을 벌이는 사이 베를린에선 빌헬름 2세와 참모본부, 내각 장관들이 모여 한자리에 모여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우선, 이번에 우리 용감한 독일 제국의 장병들이 큰 승리를 거둔 동부전선의 이야기부터 하세나. 팔켄하인?”
“예, 폐하.”
연이은 승전보와 몇 달 후면 ‘첫 외손주 or 외손녀’가 태어난다는 사실에 요즘 따라 얼굴에 웃음꽃이 떠나지 않는 빌헬름 2세의 말에 팔켄하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휘봉으로 지도를 가리켰다.
“현재 황태자 전하께서 지휘하시는 동부집단군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의 승리 이후, 발트 삼국의 완전한 확보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진격을 위해 재정비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보급 소요 문제도 있고 라스푸티차가 시작된 상황인 만큼 당장으로선 진격이 어려운 상태이니 말입니다.”
그 나폴레옹조차 고생시켜 결국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게 만든 라스푸티차다.
러시아의 진흙 뻘밭이 얼어붙는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이 찾아올 때까진 독일군으로서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러시아의 동장군에 대비해 동계공세를 위한 방한복 등을 준비할 시간도 필요했고.
“흠, 거기다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인들을 무장시키고, 훈련 시킬 시간도 필요하니까.”
“예. 그 부분은 이 자리에 없는 한스 폰 초이 외무장관이 잘 처리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러시아 철도망을 걷어 내고, 새롭게 철도를 까는 일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한스가 고생이 많구만. 덕분에 루이제가 남편 얼굴 못 본 지 한참 되었다고 나한테 하소연할 지경이야.”
“고생은 젊은이들의 특권이라 하지 않습니까. 장관에겐 미안하지만, 지금은 우리 늙은이들을 대신해 그가 더 불철주야로 뛰어 주어야 할 때입니다.”
뷜로 총리의 말에 유능한 젊은이를 혹사할 생각에 할아버지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한스가 야근에서 벗어날 날은 아직 멀고 먼 모양이다.
“동부전선은 이대로 가면 되겠군. 듣자 하니 키 작은 니키가 키 큰 니키를 쫓아내고 총사령관으로 직접 전선으로 나온다는데, 고생 좀 하겠어. 하하하하!”
게다가 한스가 준비한 레닌 뭐시기란 혁명가도 막 러시아로 향한 참이었으니까.
물론, 러시아에 혁명을 터트리는 것은 아무래도 빌헬름 2세로선 내키지 않는 일이고, 니키와 사촌(어머니가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인 앨리스 공주다)인 알릭스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독일인들이 흘릴 피를 줄이고,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선 이 방법이 최선이었기에 카이저도 내각도 군부도 한스의 레닌 투하 계획에 동의했다.
당장 폴란드 하나를 점령하는 것만으로도 이런저런 문제가 터지는 것을 두 눈을 뜨고 지켜본 상황이다.
페트로그라드나 모스크바까지 가려면 얼마나 많은 손실이 뒤따를지 카이저와 독일인들로선 이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니키와 알릭스에겐 나중에 안전하게 독일로 데려와서 돌봐주는 것으로 사죄해야지.’
그리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카이저는 내정을 담당하고 있는 베트만홀베크 부총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베트만홀베크, 전쟁채권 판매 상황은 어떤가?”
“승전보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덕에 지금까진 순조롭습니다. 우리 전쟁채권은 사실상 사 두면 손해 볼 일 없는 일종의 안전자산 같은 것이니까요.”
또한, 미국에서도 독일 태생인 데다가 증오스러운 러시아만 죽여 준다면 아낌없이 돈을 퍼 주는 제이콥 쉬프(Jacob Henry Schiff)의 퍼스트 내셔널 은행과 한스의 비즈니스 파트너인 JP모건 은행을 중심으로 전쟁 자금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다.
적어도 재정 면에선 당분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기 전에 대전쟁을 하루라도 더 빨리 끝내야겠지만.
“아, 몰트케. 그러고 보니 신형 철모는 언제쯤 보급될 예정인가?”
“내년 1월부터 최전방 부대부터 차례대로 보급할 예정입니다.”
“음, 우리 프로이센군의 상징인 피켈하우베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안타깝지만, 우리 병사의 몸이 우선이니. 식민지의 상황은 어떤가?”
“우선 서아프리카에선 남서아프리카 슈츠트루페와 현지 병력을 동원해 벨기에군, 영국군, 얼마 전에 협상국에 새로 가입한 포르투갈군과 함께 프랑스령 아프리카 식민지를 계속 공격하고 있습니다.”
카이저의 물음에 몰트케 대신 뷜로 총리가 대답했다.
식민지군인 슈츠트루페는 군부 소속이 아니라 총리와 내각 직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아프리카에선 레토포어베크 소장의 지휘 아래 슈츠트루페 장교들과 현지인으로 이루어진 아스카리 부대가 서부전선에 투입되기 위해 편제를 마치는 대로 이집트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이집트라. 그러고 보니 발트함대 전력 상당수를 지중해로 옮기기도 했지.”
“예, 지난 핀란드만 해전의 승리로 발트해의 안전은 확보되었고, 이탈리아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으니 말입니다.”
당장 중립을 외치던 졸리티가 쫓겨나고 주전파인 살란드라가 새롭게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이탈리아의 참전이 머지않았단 증거였다.
“이탈리아 이 배신자 놈들이 염치없이 삼국동맹에 남아 있지만 않았더라면 바로 박살을 내 버렸을 텐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 영토에 대한 욕심을 못 버리고 참전해 봤자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이미 영국, 오스트리아-헝가리와도 이탈리아가 참전했을 때 어떻게 움직일지 이야기해 놓은 상태다.
그리고 에티오피아나 오스만과의 전쟁 때 보여 주었던 파스타들의 한심한 모습을 생각해 보면 솔직히 이탈리아가 참전해도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서부전선의 상황입니다만…… 여긴 여전합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서부전선은 이상 없다.
서로의 참호를 향해 돌격하다 서로의 기관총과 포탄에 당해 죽는 지루한 참호전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을 뿐이니까.
“거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올해 말에 기갑부대의 편제와 훈련이 끝나지 않나. 내년이 되면 저 지긋지긋한 참호선들도 무너지겠지.”
“저 또한 그리 생각합니다. 게다가 영국군도 단독 공세를 준비 중이니 말입니다.”
“공세?”
“예. 저도 얼마 전에야 들었습니다. 우리 사령관들의 보고에 따르면 아무래도 총리가 프렌치를 닦달한 모양이더군요.”
“하긴, 다우닝가가 안달 났다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올 지경이니.”
독일군과 달리, 영국군은 지금까지 전쟁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카이저가 생각하기에 영국 해적들이 바다라면 모를까 육지에서 독일군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애스퀴스 총리의 자질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으니, 그도 슬슬 뭐라도 해 보려고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장 사촌인 조지 5세도 편지로 총리가 일을 제대로 하는 것 같지 않다며 푸념할 지경이었으니까.
“팔켄하인 자네가 보기에 영국의 공세가 성공할 것 같은가?”
“일단 준비는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인도군과 캐나다군도 합류했고, 영국 본토에서도 징집병들을 많이 데려왔으니까요.”
심지어 병력을 최대한 많이 모으기 위해 대학생들을 위한 입대 보류 특혜까지 폐지했다던가?
게다가 언제나 부족하던 포탄도 공세를 위해 대량으로 쟁여 둔 모양이고.
‘그래도 영국군이 과연 성과를 낼 수 있을지 불안하군.’
존 프렌치가 유능한 인물이라면 모를까 팔켄하인이 보기에 그는 군부 한구석에서 똥만 양산하고 있는 융커 똥별들처럼 19세기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형적인 구식 장군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지휘하는 공세라니,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팔켄하인으로선 도저히 의심과 불안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 * *
“드디어 우리 영국 원정군이 활약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한편, 팔켄하인이 영국군의 공세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과 다르게 존 프렌치는 공세가 성공하리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부하들에게 열변을 토해 내고 있었다.
“우리는 이번 공세에서 이퍼르(Ieper, 프랑스어론 이프르)를 탈환하고 프랑스군을 국경지대로 밀어낼 것이다. 독일군과 벨기에군도 우리 공세를 돕기 위해 프랑스군의 시선을 끌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우리가 할 일은 프랑스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유유히 이프르에 유니언 잭을 꽂는 것뿐이다!”
“하지만 우리 포탄 재고가 버텨 줄 수 있을까요? 본국에서 이번 공세를 위해 포탄을 대량으로 지원해 주었다지만, 보급이 원활해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1군단장 헤이그의 질문에 존 프렌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헤이그는 그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는 이른바 차기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 후보 중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기에.
그러나 자리가 자리고 전투의 중요성이 중요성인 만큼 프렌치는 평소와 달리 인내심을 발휘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더글러스, 그 부분은 걱정할 것 없네. 우리 참모들의 계산에 따르면 포탄이 떨어지기 전에 충분히 이프르를 점령할 수 있다고 예상되니까.”
아니, 반드시 점령해야만 했다.
시끄러운 애스퀴스와 키치너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헤이그 같은 경쟁자들을 고개 숙이게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자, 더 질문이 없으면 이걸로 회의는 끝내도록 하지.”
입 아프게 떠드는 시간은 끝나고, 전투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렇게 영국군이 결코 잊지 못할 이프르 전투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