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 레닌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철도 공사 문제까지 떠넘긴 베트만홀베크와 몰트케에게 이를 갈고 있었을 때.
“드디어 만나 뵙게 되는군요. 한스 폰 초이 장관님.”
언제 움직이나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났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을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러시아 혁명을 주도하며 전 세계에 붉은 물결을 퍼트린 공산주의 아이돌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했던 소비에트 연방의 국부.
나로선 개인적으로든 공적으로든 한 번쯤은 얼굴을 보고 싶었던 인물 중 하나이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군.’
덕분에 그 지긋지긋 서류 더미를 잠시나마 탈출할 수 있었다만.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러시아의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는 모양이다.
듣기론 니콜라이 2세까지 더는 못 참고 직접 지휘봉을 잡고 전장으로 나왔다니까.
그리고 현재 밖으로 나간 차르를 대신해 국정을 맡은 것이 하필이면 라스푸틴에게 휘둘리고 있는 알렉산드라 황후였으니, 솔직히 내가 봐도 한숨밖에 안 나오는 상황이었다.
“제가 장관을 찾아온 이유는 이미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러시아로 가는 길. 그것을 열어 달라 찾아오신 것이겠죠.”
차르에 대한 분노가 한계 게이지를 돌파하기 일보 직전인 러시아 제국으로 서둘러 돌아가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
“독일 제국에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장관께서도 이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선 내부에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계시잖습니까?”
“…….”
“그리고 러시아 제국을,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저뿐입니다.”
날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레닌이 당당함이 지나쳐 일견 오만하게 들리는 것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그것이 내 계획 중 핵심이기도 했고.
‘하지만 자신만이 러시아 제국을 무너트릴 수 있다는 저 자신만만한 태도와 달리 사실 레닌이 없어도 러시아 혁명은 일어날 수밖에 없단 말이지.’
애초에 러시아 혁명의 첫 스타트를 끊는 2월 혁명은 혁명가들과 러시아 민중들뿐만 아니라 차르의 병사들과 신하들, 군부의 장성들까지 무능한 니콜라이 2세에게 등을 돌리면서 일어난 것이니까.
당장 진압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차르에게 총부리를 돌리고, 황제를 지켜야 할 근위대 병사들까지 니콜라이 2세를 버리고 혁명에 동참했을 지경이니 말 다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내가 왜 레닌을 소련이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러시아로 보내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일단 2월 혁명 이후 러시아의 정권을 차지하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Ке́ренский)와 러시아 임시정부가 민중의 요구와는 달리 전쟁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로선 곤란한 일이란 말이지. 전쟁을 끝내기 위해 빠른 러시아 혁명을 유도했는데, 정작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
일단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 세계에서도 케렌스키와 러시아 임시정부가 혁명 이후 정권을 잡을 확률이 높다.
케렌스키는 특별히 모난 곳도 없고, 좌파와 우파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친한 인물이라 새로운 러시아의 정부 수반으론 일단은 겉으로 보기엔 무난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케렌스키와 러시아 임시정부가 과연 원 역사와 달리 전쟁을 멈추려고 할까?
나로선 도저히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 현재 러시아의 동맹은 프랑스뿐이었고,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것도 우리였지만, 우리가 러시아의 종전 조건이 조건이었으니까.
당장 영토 할양 문제만 해도 우리의 최소 요구 조건은 폴란드와 발트삼국,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캅카스 3국, 그리고 핀란드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하고 러시아에서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케렌스키가 이 조건을 받아들이는 그림이 안 그려진다.
애초에 케렌스키가 굴욕적인 영토 할양을 과감하게 결정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면 10월 혁명 때 허무하게 볼셰비키에 정권을 내주진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굳이 케렌스키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야.’
당장 비슷한 조건이었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볼셰비키들마저 절대 못 받아들인다고 난리를 쳤던 것을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솔직히 러시아 입장에선 너 망해라 하는 수준이나 다름없는 그 베르사유 조약보다 훨씬 더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조건이니까.
그러니 결국, 레닌이다.
오직 레닌만이 트로치키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끝냈다.
물론, 그 이면엔 일단은 숨을 돌린 뒤 나중에 세계혁명 일으켜서 다시 영토를 되찾으면 그만이라는 속셈이 있었지만.
‘그래도 레닌을 이대로 그냥 러시아로 가게 두는 것도 계속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처음엔 어디까지나 동부전선을 빨리 끝내는 것을 우선해 그냥 레닌을 러시아에 투하해 버릴 생각이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그러니 여기선 그의 목에 친히 목걸이를 채워 주도록 하자.
만일에 대비해 언제든 터트려 버릴 수 있는 폭탄 목걸이를.
* * *
“레닌 씨의 말은 잘 들었습니다. 확실히 우리 독일에 나쁜 이야기는 아니군요.”
“장관님이라면 이해하실 줄 알았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한스의 말에 레닌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이럴 줄 알았다.
이대로 이야기가 끝나면 좋았겠지만, 역시나 눈앞의 외무장관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무슨 조건입니까?”
“그렇게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레닌 씨를 높게 평가하고 있기에 내미는 조건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니 더 불길한데.’
그러나 여기까지 왔는데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레닌은 경청하는 자세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잠시 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레닌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스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폴란드와 발트삼국, 아니 핀란드까진 이해하겠습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와 캅카스 일대까지 영구히 포기하라니요! 게다가 차후 전범재판을 위해 차르 부부를 비롯한 로마노프 왕실을 독일로 보내라니…….”
“저희로선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레닌 씨는 방금까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건 자신이라고 단언하시지 않았습니까. 혹시 제가 잘못 듣기라도 한 걸까요?”
“…….”
레닌은 한스의 뻔뻔한 얼굴에 할 말을 잊었다.
물론, 레닌도 말재주론 어딜 가서도 질 자신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혁명가들을 사상과 논리로 찍어 누르는 것과 정치적 거래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것도 저쪽이 절대적인 갑인 상황에서 말이다.
“일단, 영토는 문제는 넘어간다 해도 차르 부부를 독일로 보내라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러시아 인민들을 무능과 폭력으로 짓밟아 온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전쟁의 당사자인 우리 쪽에서 전범재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설마 재판도 없이 차르 일가를 총살할 생각이십니까?”
“그건…….”
솔직히 한스로서도 황녀들이라면 몰라도 죄 많은 니콜라이 2세 부부까지 굳이 데려와야 싶나 싶었지만, 친애하는 장인어른이 레닌을 쓰는 것을 허락해 주는 대신 니키와 알릭스를 반드시 데려오라니 어쩌겠나?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리고 지금 무슨 착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애초에 레닌 씨께 저와 협상할 자격 같은 건 없습니다. 애초에 레닌 씨께선 러시아를 대표해서 이 자리에 나오신 것이 아니니까요.”
“큭…….”
그러니 레닌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딱 두 가지였다.
조건을 받아들이고 러시아로 가든가, 아니면 거부하고 여기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그냥 구경만 하든가.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바쁜 몸이니,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려 주었으면 좋겠군요.”
물론,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레닌뿐이니까.
그리고 결국, 레닌은 터지는 순간 위대한 혁명가란 자신의 명성에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폭탄 목걸이를 저 스스로 차고 말 것이다.
‘물론 이것으론 부족해.’
한스는 러시아를 좋아했다.
그래서 더 많은 러시아를 원했다.
그리고 대전쟁이 끝나고 필연적으로 찾아올 적백내전은 그 기회가 될 것이다.
* * *
“멍청한 러시아 놈들이 또 졌소. 이번엔 아주 산산조각이 나서 박살이 났다는군.”
“독일의 발목조차 잡지 못하다니….”
한편, 동부전선에서 러시아 제국이 대패했단 소식을 전해 들은 프랑스인들은 동맹의 한심한 모습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항복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야 솔직히 프랑스의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러시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리스 팔레올로그(Maurice Paléologue) 주러시아 대사의 전언에 따르면 이번 패배로 러시아의 내부의 상황이 매우 안 좋아졌다고 합니다.”
“젠장, 이대로라면 독일 놈들이 페트로그라드를 점령하기도 전에 러시아인들이 나를 뒤엎게 생겼군.”
그리고 러시아가 무너지면 그 이후는 푸앵카레를 비롯한 프랑스 지도자들의 어두운 얼굴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이 협상국과 평화협정이라도 맺는 날엔 동부전선에 배치된 백만 규모의 독일군이 총구를 서쪽으로 돌려 서부전선으로 달려올 테니까.
“게다가 이젠 차르가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어 전선으로 나갈 것이라 하니…….”
“젠장, 그놈이 우리 황제였으면 진작에 단두대에 목이 잘렸을 것을.”
“아직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조프르가 말했다.
“러시아의 대패가 뼈아프긴 하지만,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차르에게서 콘스탄티니예에 가 있는 델카세가 필요로 하는 양보를 얻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우리에겐 그 어느 때보다 새로운 동맹이 절실히 필요하니까. 그것이 독일과 영국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것이면 더 좋고.”
“하지만 이스마일 엔베르는 여전히 상황을 보겠다는 태도만을 보이는 중이라 들었는데, 과연 델카세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그 말대로 이스마일 엔베르를 이쪽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아흐메드 제말 파샤의 장담과는 다르게 엔베르는 프랑스의 제안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아직 그 어떠한 답도 주지 않고 있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거절하면 모를까 계속 두루뭉술하게 구니, 프랑스로선 그야말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긴 이르오. 바르투 총리. 어차피 오스만 건은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어쩔 수 없는 일. 일단은 델카세에게 시간을 더 줍시다.”
“대통령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그리고 우리로선 오스만보다도 이탈리아가 더 문제네. 두메르그 외무장관, 이탈리아는 여전히 눈치를 보고 있나?”
“예, 중립을 외치던 조반니 졸리티가 총리직에서 밀려나고, 주전파인 안토니오 살란드라가 총리가 되긴 했지만, 이탈리아 정치권 내부에 여전히 중립을 외치는 목소리가 큽니다.”
게다가 한스 폰 초이와 영국의 그레이 또한 러불동맹에 붙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계속해서 이탈리아 왕국을 압박하고 있으니.
”다만, 우리의 반격이 시작되고, 협상국이 흔들리면 이탈리아인들도 더는 참지 못하고 움직일 것입니다. 이미 국왕과 총리 모두 참전을 원하고 있는 데다가 이탈리아 민중의 미회복영토와 아드리아해 연안에 대한 욕심은 이미 한계에 달한 상태이니까요.”
“쯧, 그거야 모를 일이지요.”
현 프랑스 외무장관이자 총리, 대통령 모두를 역임했을 정도로 능력을 갖춘 것은 물론, 시민들에게 인기도 많았던 가스통 두메르그(Pierre Paul Henri Gaston Doumergue)의 말에 바르투 총리가 살짝 빈정거리는 듯이 대답했다.
바르투로선 두메르그에 날 선 태도로 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 벨기에 침공 실패와 더불어 독일군에게 보불전쟁 이래 다시 한번 프랑스 영토를 내준 바람에 급진당 출신의 두메르그가 그의 자리를 위협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통령인 푸앵카레로선 한숨만 나오는 일이었다.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집안싸움보다 끔찍한 일은 없었으니까.
“정치 싸움은 그쯤 해두게, 총리. 지금 우리 프랑스는 하나가 되어도 모자랄 판이니까.”
“죄송합니다. 대통령 각하.”
결국, 푸앵카레의 제지에 바르투와 두메르그의 소리 없는 싸움은 잠시 휴전을 맞이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곧 다시 시작될 테지만.
“아무튼, 조프르 총사령관의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네. 이번 반격 작전의 활약에 우리 프랑스의 미래가 걸려 있으니.”
“명심하겠습니다. 대통령 각하.”
조프르가 우렁찬 대답과 함께 경례를 올리자 모두의 시선은 지도 위에 놓인 자그마한 유니언 잭 깃발로 향했다.
지금까지 협상국에 당하고만 있던 동맹국의 역습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