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81화 (181/193)

181화 : 동부 대공세 (5)

“내 한마디로 말하겠네. 팔켄하인. 답이 없네.”

“젠장, 어떻게든 안 되겠습니까?”

지금 상황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되묻는 팔케하인의 모습에 전임 참모총장이자 지금은 생각보다 적성에 맞는 전쟁장관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던 몰트케가 한숨을 내쉬었다.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우리 야전군만 5개이네. 즉 거의 100만에 가까운 병력에 필요한 물자를 보급해야 한다는 거지.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공급을 맞췄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 보급망은 이제 한계네.”

동부전선에서의 연이은 승리가 아이러니하게도 독이 되었다.

백만 단위의 병력이 움직이는 전투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도 모자라 러시아군을 쉴새 없이 밀어붙이다 보니, 전선에서의 보급 소요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올라갔기 때문이다.

“허, 너무 잘 싸우는 게 문제가 될 줄이야. 상식이 뒤틀리는 것 같은 기분이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닐세. 철도도 문제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기차와 러시아 놈들이 폴란드에 깔아 놓은 얼마 안 되는 철도가 전혀 호환이 안 되지 않나.”

“우리 독일 제국은 표준궤를 사용하지만, 러시아 제국은 광궤를 사용하니까요.”

이는 오래전부터 대립해 온 독일, 오스트리아와의 철도망 단절을 꾀한다는 정치적, 군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러시아 땅이 라스푸티차로 인해 툭하면 진흙밭으로 변하는 바람에 지반이 약해 표준궤를 쓰기 어렵다는 점도 한몫했고.

“동프로이센 때야 우리 독일 제국의 영토에서 전투가 일어났던 데다가 러시아 또한 우리 철도를 이용하지 못했으니 문제가 전혀 없었네. 하지만 본격적으로 러시아령으로 진군하는 지금 상황이 다르다는 소리지.”

트럭이 대규모로 보급되었다지만, 독일의 보급망은 여전히 철도망에 의지하는 부분이 컸으니까.

“트럭과 마차 만으론 지금의 보급 소요를 감당하지 못하네. 이건 마하트마가 도와도 방법이 없어.”

애초에 그게 가능한 나라는 전 세계에 오직 미국 하나뿐이었다.

독일 제국이 아무리 산업 대국이라지만, 방장치트맵을 가진 미국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하, 러시아 남서전선군을 끝장낼 좋은 기회였는데…….”

팔켄하인이 아쉽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물론 주요 목표는 다 이루었으니 문제는 없겠지만, 다 잡은 적을 이대로 놔줘야 한다는 것은 킬딸에 미친 프로이센 군인으로선 여러모로 불편한 일이었다.

“포탄과 총알이 없어서야 싸우질 못하니 어쩔 수 없지. 전쟁장관으로 말하자면 여기선 폴란드 지역을 온전히 확보하는 것에 주력하고, 다음 동계 공세 때까지 재정비하는 걸 추천하네.”

“예. 여기서 더 욕심을 내 봤자 의미가 없으니까요. 일단은 재정비하는 동안 철도부터 깔아야겠습니다.”

“그 부분은 이미 베트만홀베크와 이야기를 해 두었네. 마침 우리의 친애하는 외무장관이 바르샤바에 있지 않나. 맡기면 알아서 잘하겠지.”

베트만홀베크도 내정을 돌보고 전쟁 자금을 확보하느라 정신이 없고, 몰트케 자신도 동부전선뿐만 아니라 서부전선의 병력과 동맹군에게 보낼 보급 물자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니까.

그러니 뒷일은 젊고, 유능한 친구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에취! 왠지 오한이…….”

물론, 끝없이 펼쳐진 서류의 바닷속에 파묻힌 것도 모자라 한스 폰 초이의 로코모션을 찍게 된 우리의 주인공에겐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지만 말이다.

* * *

“살아남은 자들이 고작 절반조차 되지도 않는가.”

브루실로프는 기진맥진한 얼굴로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병사들의 모습에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만하길 천만다행입니다.”

“천만……다행이라.”

데니킨의 말에 브루실로프는 그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러시아군은 살아남았지만,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백만이 넘어가는 병력과 영토, 자존심 모두 말이다.

게다가 그들이 살아남은 것은 어디까지나 독일군이 보급 소요로 인해 공세를 중지해서 그런 것일 뿐.

적이 일부러 놔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니 브루실로프로선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사령관님, 니콜라이 대공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총사령관께서?”

갑작스러운 부름에 브루실로프는 갑자기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니콜라이 대공이 페트로그라드에 소환되었다가 돌아온 지 하루도 안 지났기 때문이다.

페트로그라드 궁정의 정치 싸움과는 멀찍이 떨어져 있고 싶어 했던 브루실로프로선 의문보단 대체 무슨 일로 대공이 자신을 불렀는지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남서전선군 사령관을 맡아 줘야겠네.”

그리고 브루실로프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바노프 사령관은…….”

“그는 새로운 전쟁장관으로 임명되었네. 황후 폐하의 뜻이었지. 난 그의 후임으로 자네를 추천했고.”

“각하, 전 중장에 불과합니다.”

“곧 대장으로 진급할 것이네. 이번 공세에서의 활약이 활약이니 당연한 일이지.”

“…….”

“할 말이 많은 얼굴이군.”

브루실로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니콜라이 대공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난 해임되었네. 브루실로프.”

“……각하.”

“차르께선 이번 패배에 내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시더군. 틀린 말은 아니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잃은 것도 모자라 러시아 제국군의 유일한 성과였던 갈리치아마저 허무하게 내주었다.

아무리 자신이 니콜라이 1세의 손자이자 황제의 사촌이라지만, 이번 패배는 변명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잠시 공세를 멈췄지만, 독일군은 이제 라트비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노리고 있는 판국이니까.

“긴말은 안 하겠다. 총사령관에게서 물러나라.”

“……예.”

결국,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러시아 제국군 총사령관에게서 해임되었다.

여기까진 니콜라이 대공도 반발하진 않았다.

질린스키가 겪었던 수모를 생각하면 이 정도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니까.

물론, 제 가족은 누구보다 아끼는 ‘키가 작은 니콜라이’가 ‘키 큰 니콜라이’에게 그 정도로 강한 벌을 내릴 리도 없었지만.

문제는 그 사람 다음이었다.

“내 친애하는 사촌께서 자신이 직접 내 후임을 맡겠다는군.”

“……예?”

“황제 폐하께서 총사령관으로서 전장에 나오실 거라네.”

브루실로프는 순간 목구멍에서 그게 뭔 개소리냐는 말이 나올 뻔했다.

니콜라이 2세가 직접 전장에 나와서 지휘를 한다고?

그 무능한 차르가?

“진심이십니까?”

“더는 무능한 장군들이 전쟁을 망치는 꼴을 볼 수가 없다는군. 과거 알렉산드르 1세가 나폴레옹에게 직접 맞섰던 것처럼 자신 또한 그러겠다던가?”

“…….”

브루실로프는 얼이 나간 얼굴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황이 더욱 악화하는 미래밖에 보이질 않는다.

애초에 니콜라이 2세가 예시로 든 알렉산드르 1세도 제 분수도 모르고 전쟁에 나갔다가 아우스터리츠에 대패하고 간신히 살아 돌아온 양반이니 말 다 했다.

그나마 알렉산드르 1세는 정치적 능력이라도 있었지만, 니콜라이 2세는 친척인 빌헬름 2세보다도 군재도 정치 감각도 전부 떨어지는 인간 아닌가.

“폐하, 폐하께서 전장으로 떠나시면 페트로그라드는 누구에게 맡긴단 말입니까?”

그렇기에 니콜라이 대공과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러시아 수뇌부도 애써 부드럽게 말을 돌려 가며 차르를 만류했지만…….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수도는 알렉산드라에게 맡길 것이오. 황후라면 그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오…….”

니콜라이 2세는 한술 더 떠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수도를 맡기겠다며 니콜라이 대공을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적국인 독일 출신인 데다가 라스푸틴과 엮이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지가 더 나아 보일 정도로 온갖 비난과 소문들의 대상이 되고 있는 황후다.

그런데 그런 황후에게 수도를 맡긴다고?

‘정녕 제국에 사달을 만들고 싶어 작정한 것인가?’

대공은 사촌에게 그리 묻고 싶었지만, 끝내 입을 다물었다.

패장으로 전락한 그가 아무리 목이 아프게 외쳐 봤자 차르는 듣지 않을 테니.

“이것이 내가 자네를 남서전선군 사령관으로 추천한 이유네. 브루실로프 자네에겐 너무나도 미안한 일이지만, 부디 제국과 황제 폐하를 부탁하네.”

대공이 떠넘긴 너무나도 무거운 짐에 브루실로프는 말 그대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러나 대공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결국, 브루실로프는 그 어느 때보다 힘없는 목소리로 경례를 울렸다.

그렇게 러시아 제국에 나쁜 의미로 변화가 일어나는 사이, 스위스에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공산 천마 레닌 또한 러시아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마침내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동지들,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있소. 1905년에 끝내 이루지 못한 러시아 혁명을 완수할 때가 당도한 것이오.”

레닌의 말에 공산주의자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처럼 광신적인 환호성도 박수 소리도 없었다.

그만큼 레닌을 비롯한 러시아 혁명가들이 혁명을 볼 수 있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미 게오르기 리보프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과 사회혁명당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움직이기 시작했소. 율리 마르토프와 멘셰비키도 마찬가지요.”

이에 비해 볼셰비키는 아직 출발선에서 꼼지락거리는 상황이었다.

레닌은 보다시피 러시아에서 멀리 떨어진 스위스에 있었고, 트로츠키는 종군 기자로 전장을 떠돌고 있었으며 나머지 볼셰비키들은 혁명을 주도하기엔 급이 안 되었으니까.

레닌으로선 경쟁자들이 앞다투어 나가는 모습에 발을 동동 구르며 조급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

“하루라도 빨리 러시아로 돌아가야 하오.”

선수를 빼앗기더라도 일단 혁명에 참여만 한다면, 차후 혁명의 주도권을 잡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볼셰비키의 대선배인 자코뱅들 또한 처음부터 권력을 잡은 것은 아니었지 않은가.

물론, 정작 권력을 잡고 난 이후엔 서로의 목을 단두대로 서걱서걱 잘라 대다가 혁명 자체를 말아먹었지만.

어쨌든 혁명에 참여하지도 못한다면 그야말로 레닌과 볼셰비키의 신세는 꿔다 놓은 네바강 오리알 신세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레닌으로선 서둘러 귀국해야 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로 귀국하고자 하더라도 전쟁으로 인해 해로든 육로든 전부 막힌 상황 아닙니까?”

밀입국조차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러니 결국, 선택지는 단 하나뿐.

“독일 정부와 접촉해 국경 통과를 허가받을 수밖에 없소.”

“하지만 독일 융커들이 과연, 레닌 동지께 러시아로 가는 길을 열어 주겠습니까?”

“한스 폰 초이라면 열어 줄 것이오.”

“그 ‘카이저의 나팔수’가 말입니까?”

한스의 이름이 나오자 몇몇 혁명가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야 유색인종이라는 것만 빼면 볼셰비키 같은 극좌파들이 극혐할 수밖에 없는 요소로 가득한 것이 한스 폰 초이 후작이었으니까.

황제의 사위, 고위 귀족, 기업가, 자산가 등등 이게 반동 중의 반동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겠는가?

물론 그는 스톨리핀처럼 혁명가들의 피를 탐하지는 않았고, 사민당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꽤 노동자 친화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 스톨리핀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

노동자들의 피와 증오를 먹고 자라는 혁명가들에게 있어 ‘압제자’보다는 선의로 자신을 포장한 채 세 치 혀로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는 ‘위선자’들이야말로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으니까.

오죽하면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혁명 동지들도 후작을 혁명의 큰 장애물로 인식하기 시작하며 극도로 위험시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영악한 한스 폰 초이이기에 거래가 가능한 거요.”

러시아는 넓다.

아무리 많은 군대를 이끌고 와도 저 광활한 대지를 정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양면 전선 중 하나를 빨리 끝내고 하나에 집중해야 하는 독일 제국으로선 러시아가 혁명으로 스스로 무너져 준다는 것에 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비스마르크의 후계자이자 독일의 외교 부착 회로인 한스 폰 초이라면 더더욱.

“어차피 우리에게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혁명의 주도권을 빼앗기는가, 아닌가.

그리고 레닌은 후자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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