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75화 (175/193)

175화 : 외전 극동전선 (1)

“……항복하겠소. 부디 병사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길 바라오.”

“알겠소.”

시간을 살짝 돌려 1913년 8월 말.

독일 동방함대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슈페는 짧은 한마디와 함께 침울한 얼굴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 내민 검을 받아들였다.

제대로 된 전투도 없었던 항복이었다.

물론 그로서도 항복하고 싶진 않았겠지만, 양쪽의 전력이 너무나도 차이가 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끝까지 뤼순을 지켰던 과거의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전쟁이 벌어지기 전 러일전쟁 이후 뤼순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중요성이 떨어진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전력은 급감했고, 전력 대부분은 발트함대와 흑해함대로 각각 재배치되었다.

이에 반해 독일 동방함대는 넘쳐나는 해군력의 혜택을 받아 원 역사보다 전력이 강화된 상태였고, 영국 또한 피셔 제독의 안배에 따라 동인도 함대와 중국함대,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해군이 동양함대로 합체하면서 그 몸집을 비대하게 불린 상태였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가 할 수 있는 마카로프 제독이 그랬던 것처럼 블라디보스토크에 틀어박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텨 내는 것뿐.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러일전쟁 때와 달리 극동 러시아의 손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고,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결국 항구를 나와 짧은 교전 끝에 백기를 들어 올렸다.

“우리의 임무는 이것으로 거진 마무리가 되었군요.”

“예. 인도차이나에 주둔 중이었던 프랑스 함대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좋았겠습니다만.”

영국 동양함대를 지휘하고 있는 중국함대 사령관 마틴 제람(Martyn Jerram) 제독의 말에 슈페는 더는 공훈을 세우지 못해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블라디보스토크 말고는 갈 곳도 없던 러시아 태평양 함대와 달리, 프랑스 극동 함대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협상국 함대에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본국을 향한 머나먼 도주 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아직도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한 채 오대양 전역에 퍼져 있던 로얄 네이비에게 이리저리 물어뜯기고 있었지만.

어쨌든 프랑스 함대가 극동을 떠난 이상, 슈페와 제람 제독이 할 일은 그저 제해권을 유지하고 간간이 동맹국 상선을 사냥하며 칭다오 맥주나 마시는 것뿐이었다.

“슈페 제독님, 블라디보스토크로 입항하겠습니다.”

“음.”

막시밀리안 폰 슈페는 부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무수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도시에 위엔 ‘동방을 지배하라’란 이름이 무색하게 하얀 배경에 붉은 원이 그려진 일장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 * *

세계대전의 발발과 동시에 유럽 전역에 일어난 전쟁의 불꽃은 머나먼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까지 퍼졌다.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와 영향력이 아시아에도 존재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주의 끝판왕인 대영제국과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독일 제국은 키아우초아와 뉴기니를 비롯한 태평양의 섬들, 러시아 제국은 그 영토가 프라아무르(연해주)와 북만주에까지 뻗쳐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유럽 열강들이라도 당장 우리 집이 불타고 있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별장에까지 신경 쓰기는 어려웠다.

그렇기에 세계대전의 외전이라 할 수 있는 극동전선에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라는 익숙한 플레이어들 말고도 일본과 두 개의 중국이라는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등장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선, 러일전쟁에서 너덜너덜한 무승부 판정을 거두긴 했지만, 여전히 아시아 국가 중에선 독보적인 국력을 자랑하고 있는 일본 같은 경우는 영일동맹을 근거로 협상국 편으로 참전을 결정했다.

다만, 일본의 참전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에 있어선 상당히 원치 않던 일이었다.

물론, 영국도 처음엔 프랑스가 벨기에 침공을 감행하면서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일본에 니들도 우리 동맹국이니까 우리랑 같이 싸우라며 참전을 요청하긴 했다.

그러나 영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철회하며 일본에 참전하지 말라고 말을 바꿨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본을 참전시키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지 않을까요?”

“게다가 미국도 일본이 대전쟁에 끼어드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데…….”

이유야 언제나 그렇듯 참 영국스러운 이유였다.

잘못하면 일본이 프랑스와 러시아의 아시아 영토를 집어삼켜 너무 커질 수 있고, 나중엔 영국에도 위협이 될 수 있다.

훗날 일본의 행보를 생각해 보면 타당하기 그지없는 우려가 영국인들의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들기 시작했고,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던 미국 또한 이러면 재미없다고 눈을 치켜뜨기 시작하면서 영국은 참전 요청을 철회했다.

“영국이 우리보고 참전하지 말라는데요?”

“하! 그럴 수야 없지. 이번 전쟁은 우리 대일본제국에 있어 놓칠 수 없는 기회. 사할린, 만주, 인도차이나가 우릴 기다리는데, 뒷짐 서서 구경만 할 순 없는 노릇이다!”

물론, 일본은 언제나 그렇듯 일본이었다.

그들은 영국의 말을 씹고 영일동맹을 들이밀며 억지로 협상국 편으로 참전해 버렸다.

당장 눈앞에 프랑스와 러시아의 식민지가 어른거리는데, 이걸 참을 수 있으면 뇌절의 달인 대일본제국이 아니다.

물론, 일본에는 동맹국이라는 또 다른 선택지도 있었지만, 러시아와의 악연도 악연이고 무엇보다 고작 식민지 먹겠다고 영국과 독일이라는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한 게르만 향우회에 맞설 정도로 아직 일본은 미치지 않았다.

애초에 난이도나 전후 실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영토를 생각해 보면 동맹국 쪽보단 협상국 쪽에 가담하는 것이 더 이득이었다.

다만, 일본의 억지 참전은 후에 워싱턴 해군조약 때 영일동맹이 해체되는 결과로 돌아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 일.

결국, 동아시아에서 움직일 수 있는 육상 병력이 턱없이 부족하기도 했던 영국과 독일은 하는 수 없이 일본의 참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실추된 명예 회복의 기회가 왔다! 황국의 흥폐가 이 전쟁에 달려 있으니!”

“대일본제국 만세!”

그리고 그 후 일본의 행보는 말 그대로 일사천리였다.

일본은 전쟁에 참전하자마자 곧장 무방비로 놓인 사할린의 나머지 반을 점령하고, 독일과 영국의 요청에 따라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연해주로 진군했으며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프랑스 해군을 쫓아낸 뒤 프랑스령 광저우만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러시아령 북만주 진공이란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어딜 먼저 갈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야마모토 총리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인가?”

그런데 일본의 순탄대로에 갑자기 장애물이 나타났다.

“청이 북만주로 진군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중화민국도 방금 협상국 가입을 공표, 안남(베트남)을 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뭐, 뭐라고?!”

지난 러일전쟁과 달리 이번엔 힘도 안 들이고 막대한 영토를 얻을 수 있으리란 일본의 앞에 두 개의 중국이란 예상 못 한 경쟁자가 나타난 순간이었다.

* * *

“달려라! 달려!”

“휘릭 휘릭 끼요오옷!”

1913년 9월 초.

북만주 국경을 향해 수만의 청나라 기병대가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며 그들의 빼앗긴 영토를 향해 무수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갔다.

물론 그들의 복장은 마적이나 다름없었고, 실제 출신도 마적이었지만, 청나라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으니 일단은 청군이라 말할 수 있었다. 일단은 말이다.

“하하하하! 보십시오, 각하. 극동 러시아군이 우리 대청 기병대 앞에 개미처럼 짓밟히고 있습니다!”

“나도 보고 있으니 좀 떨어지게. 장 장군.”

대청제국 참모총장 겸 총사령관으로 전장에 나온 돤치루이는 저 마적 무리의 우두머리자 지금은 청의 장군이 된 장쭤린(張作霖, 장작림)의 오만한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조정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독일과 영국에서 참전 요청이 들어왔다고요?”

“예, 이 기회에 북만주를 되찾으라는군요.”

“호오, 나쁘진 않은 이야기군요. 현재 러시아가 유럽 본토에 집중하고 있는 탓에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이 급감한 상태니.”

돤치루이의 말에 기유혁명 이후 조정으로 복귀에 총리대신이 된 캉유웨이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이번 기회에 러시아에 넘어간 북만주를 수복할 수 있다면 청과 아이신기오로 황실의 위상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테니.

“러불동맹의 편에 서 독일 제국으로부터 칭다오를 되찾는 것은…….”

“…….”

“미안하네. 그냥 해 본 소리네.”

중간에 기유혁명 이후 실권을 잃고 뒷방으로 물러난 순친왕이 이상한 말을 하긴 했지만, 돤치루이와 캉유웨이의 말 없는 시선에 그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물론, 순친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동맹국에 붙자고 해도 돤치루이는 무시했겠지만.

독일 유학 시절의 경험 덕분에 청 제일의 독일통이라 할 수 있는 돤치루이가 봤을 때 전쟁은 시작부터 독영협상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으니까.

패배할 확률이 높은 쪽에 거는 것은 돤치루이의 취향이 아닐뿐더러 청을 위해서라도 해선 안 될 일이었다.

“어쨌든 우리 청에는 둘도 없는 기회입니다.”

명분도 있고, 마침 청의 상황도 군을 맡은 돤치루이와 내정을 맡은 캉유웨이의 주도 아래 상당히 안정화된 상태였으니.

곧 청은 협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협상국 편으로 대전쟁에 참전했고, 일본이 연해주에서 북상하기 전에 서둘러 북만주로 진격했다.

한편, 대전쟁 참전 제의는 남쪽의 중화민국 정부에도 도착했지만, 이쪽은 청과 달리 참전을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이쪽은 정치적으론 안정된 청과 달리 공화국이라면 피할 수 없는 정치 다툼으로 얼룩진 혼란스러운 세월을 보내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하에게 배신당한 데다가 반쪽짜리 중국의 지배자가 된 탓에 아직 황제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 대총통 위안스카이의 위상과 권력 또한 원 역사만 못 한 상태였으니 더더욱.

“영독협상과 러불동맹 모두 자신들의 편에 서라며 요청해 오고 있습니다만, 저는 우리 중화민국이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쑨원 선생의 말에 동의합니다.”

다만, 위안스카이의 힘이 약해지면서 쫓겨나지 않고, 여전히 권력의 한 축을 잡고 있던 쑨원 등의 공화파들은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길 원했다.

왜냐하면, 이 전쟁에서 중화민국이 얻을 것도 없어 보였고, 내부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청과 달리 아직 어지러운 상태였던 중화민국이 전쟁을 벌일 여력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부족했으니까.

중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유 중 하나였던 중화민국의 존재를 열강에 인정받는다는 목적도 열강의 중재 아래 중국의 두 개로 쪼개지는 과정에서 본의는 아니었지만, 이미 이룬 상태였다.

“아니, 우린 이 전쟁에 참전해야 하오.”

“……예? 대총통, 뜬금없이 그 무슨 소리이십니까?”

“후, 이래서 서생들은……. 정녕 모르겠소? 이 전쟁은 안남을 중국의 정당한 영토로 만들 기회! 그대들이 아무리 그래도 이 좋은 기회를 눈뜨고 놓칠 바보들은 아니리라 믿소.”

“!!!”

그런데 위안스카이가 갑자기 협상국 편으로 참전해 안남, 즉 프랑스령 베트남을 차지하자 주장하면서 중화민국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하긴, 잘 생각해 보면 아시아의 공화주의를 선도하는 큰형으로서 프랑스의 식민 지배 아래 고통받는 안남인들을 해방할 좋은 기회입니다. 아, 물론 안남이 탐나서 이러는 것은 아니니 오해 마시길.”

쑨원과 중국의 혁명가들 역시 결국엔 중화사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중국인들.

그런 그들에게도 이 기회에 안남을 차지하자는 위안스카이의 제안은 그와의 불편한 관계를 포함하더라도 꽤 달콤하게 들려왔다.

‘황제가 될 수 있는 하늘이 주신 마지막 기회다! 이를 놓칠 수야 없지.’

물론, 위안스카이의 속내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안남 정복을 주도함으로써 떨어진 위신을 회복해 이번에야말로 황제가 되겠단 생각으로 참전을 주장한 것이었지만.

“청도 얼마 전에 협상국에 가입했다고 했습니다만 그럼 그들은…….”

“지금은 북쪽의 반동들과 싸울 때가 아니오.”

게다가 아직 청과 중화민국이 갈라지면서 맺은 휴전 협정이 끝나지 않은 상태이기도 했고.

“지금은 중국의 영토를 늘려 나중의 북벌을 위해 힘을 기를 때요.”

이는 청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서로 같은 편에 서는 것을 의도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각각 북만주와 안남이라는 눈앞의 탐스러운 과실을 위해 청과 중화민국은 잠시 서로의 존재를 용납하기로 했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중국인 모두를 위한 일이니까.

“중국이 우리의 참전 제안을 받아들였다는군요. 그레이 장관님.”

“호, 후작님. 어느 중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노스? 사우스?”

“큭큭, 노르덴(Norden), 주덴(Süden) 둘 다입니다. 청은 우리가 미끼로 내민 북만주를, 중화민국은 안남을 노리는 모양이더군요.”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요. 듣자 하니 일본도 그곳에 욕심을 내고 있지 않습니까?”

“예, 물론 저희야 ‘어디까지나’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해 중국을 포섭한 것일 뿐 ‘다른 의미’는 없지만요.”

“하하하하! 물론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의미’는 없지요.”

일본이 너무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참전을 유도한 영국과 독일의 두 능구렁이는 망설임 없이 두 중국의 협상국 가입을 수락했다.

“키타지나(北支那)와 미나미지나(南支那)놈들이 북만주와 인도지나(인도차이나)에 발을 들이밀려 한다고?”

“이것들이 감히 우리가 상회 입찰(?)한 땅에 겁도 없이 침을 바르려고 해?!”

물론, 중국의 참전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볼 것도 없었지만.

당장 총리인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衞)부터 러일전쟁 때와 달리 이번엔 일본이 당당히 승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일본 국민까지 그 누구도 분노를 숨기지 못했으니까.

“북만주는 이미 늦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한 육군이 북상해도 청이 먼저 북만주를 완전히 장악할 것입니다.”

“쯧, 그럼 청에게 북만주를 던져 주고 연해주 점령을 인정받는 대신, 인도지나에 집중해야 하겠군. 어차피 원래도 그곳에 먼저 가려고 했으니.”

인도차이나보단 북만주 진공을 더 원하던 육군은 불만을 품겠지만, 러일전쟁 이후 군부의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인도차이나 진공을 원했던 해군이었기에 나온 판단이었다.

당장 현 총리대신인 야마모토 곤노효에부터가 해군 출신(고향도 사쓰마라 성골 중의 성골이었다)이기도 했고.

그렇게 청과 일본의 외교관들이 협정 테이블을 만드는 사이, 일본군은 해군을 중심으로 베트남을 향해 상륙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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