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73화 (173/193)

173화 : 서부전선 이상없다 (1)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세계대전에서 탈락하고, 동부전선 전체가 러시아 제국을 향한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을 때.

삐이이이이───!! 삐이이이───!!

“돌겨억! 돌격!!”

“비브 라 프랑스──!!”

“개구리 새끼들이 온다!”

“모조리 죽여 버려!!”

서부전선에선 약속된 죽음의 참호전 아래 프랑스군, 독일군, 영국군, 벨기에군 가리지 않고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지옥과도 같은 광경이 연일 펼쳐졌다.

그리고 그것은 서부전선의 주요전장인 베르됭 일대와 벨기에를 가리지 않았고, 협상국 장성들과 프랑스군 장성들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날이 갈수록 쌓이는 시체의 산에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물론, 러일전쟁의 전훈을 통해 유럽인들 또한 애써 무시했던 남북전쟁 때와 달리, 이미 참호전의 무서움을 깨달은 상태였지만, 남이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자신들이 직접 온몸으로 겪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이대로 제자리에 멈출 순 없다. 독일 놈들을 한시라도 빨리 위대한 조국 프랑스의 영토에서 내쫓아야 한다!”

“후퇴 요청? 불가다, 불가! 이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기 위해서라도 벨기에의 프랑스군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파리까지 진격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러나 적 참호 앞에서 수천, 수만의 병사를 땅에 묻었어도 프랑스군과 연합군은 서로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엔 강에 참호를 파고 눌러앉은 독일군을 다시 국경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서.

독일·영국·벨기에 연합군은 벨기에의 절반을 장악한 프랑스군을 밀어내 벨기에를 해방하고, 프랑스 본토로 가기 위해 계속해서 공세를 시도했다.

타다다다다다! 타다다다다다!!

“끄아아아악!!”

“흐아악!”

“엄, 엄마…….”

물론, 후방에서 명령만 내리는 장군들 대신 죽어 나가는 것은 그동안의 인류 역사가 그랬듯이 애먼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철조망에 자신의 내장을 장식한 채 죽어 가고, 저지대의 진흙탕 속에서 총검과 야삽으로 서로의 머리를 후려치며 죽어 가고, 눈먼 포탄에 휩쓸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죽어 갔다.

국적도, 사용하는 언어도 달랐지만, 서부전선이란 이름의 지옥 안에서 병사들은 모두 주의 자비조차 받지 못하는 불쌍한 어린 양에 불과했다.

타다다다다! 타다다다다다!!

“와아아아아! 돌격! 돌격!”

“Los! Los! Los!”

“Merde! 돌격대 새끼들이다!”

“저 훈족 놈들을 참호 안에 들이지 마! 다가오기 전에 죽여!”

“하하하하! 독일의 기관단총은 세계제일!”

그나마 독일군은 프랑스나 다른 연합군 군대보다 상황이 나았다.

그들에겐 기관단총 같은 신무기가 즐비했으니.

덕분에 프랑스군은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채 참호 안으로 뛰어드는 돌격대 때문에 방어선이 돌파당하거나 돌파당할 뻔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벨기에군 같은 경우엔 병력이 적어서 공세를 주도하며 직접적으로 앞으로 나서기보단 어디까지나 서포트 역할에 주력하는 상황이고.

그러나 서부전선의 일각을 담당하고 있던 영국군 같은 경우엔 독일군, 벨기에군과는 이야기가 달랐다.

* * *

1913년 9월 20일, 벨기에 플란데런 틸트(Tielt).

“모두 정렬.”

음울한 장교의 목소리와 함께 물 찬 참호 안에 주저앉아 있던 영국군 병사들이 무거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악한 개구리와 불곰들로부터 유럽을 구하러 간다며 흥겹게 영불해협을 건너왔을 때의 모습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5분 뒤엔 그들 중 상당수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차가운 저지대의 진흙 속에서 눈을 감고 말 테니까.

“공격 명령이다. 현 시간부로 우리 부대는 전방의 프랑스군 참호를 향해 공격을 개시한다.”

영국군 장교들 또한 그것을 알기에 말을 포장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짧고 간결하게 명령을 전할 뿐이었다.

“신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하길.”

삐이이이이───

“돌격 앞으로!”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참호 밖으로 나가!”

곧 영국군 참호 사방에서 공격을 알리는 함성과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지며 참호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영국군 병사들이 일제히 참호에서 나가 겹겹으로 깔린 철조망을 지나 전방의 프랑스군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다! 타다다다다다!!

“으악!”

“크헉!”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프랑스군의 기관총과 포탄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영국군 병사들 대부분이 프랑스 참호를 구경하기도 전에 저지대의 진흙 속에 파묻혔고, 가까스로 프랑스 참호에 도착한 병사들도 프랑스 병사들의 참호 곤봉과 야삽에 얻어맞고 순식간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렇게 영국군의 공격은 또다시 실패했다.

서부전선에선 이미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최소한 기관단총이라도 잔뜩 있었으면 좋으련만.”

이젠 몇 번째 맛보는 것일지 모를 패배의 쓴맛에 영국군 장교들은 무거운 한숨을 쉬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만큼 영국군이 보유한 기관단총은 턱없이 부족했다.

독일이 갑자기 혐성에 눈을 떠 일부러 영국군에게 기관단총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기관단총! 우리도 독일군의 기관단총이 필요합니다!!”

“얼맙니까? 얼마를 주면 팔 겁니까?!”

“다들 진정해 주세요. 지금 여러분 말고도 기관단총을 원하는 곳이 너무 많아서 우리도 물량이 매우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일단 차례를 기다려 주세요!”

그저 영국군, 아니 협상국 전체에서 기관단총의 수요가 너무 높아져서 공급이 못 따라갔을 뿐이다.

당장 서부전선뿐만이 아니라 동부전선, 거기다 머나먼 극동에서까지 기관단총을 달라 아우성을 치는 상황이니까.

독일로선 자기들 쓸 물량도 간신히 맞추는 판국에 동맹국 군대까지 챙겨 줘야 하니, 그야말로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이 물량 부족이 얼마나 심각했냐면, 얼마 전 세르비아 전선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창고에 봉인되어 있던 초기형 기관단총인 게르만 스텐 아니, MP01까지 꺼내 오는 지경까지 왔을 정도였다.

물론, 독일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생산량을 배로 늘리고, 영국 또한 자국군을 위해 독일 제국에서 기관단총 라이선스를 사서 독자적으로 기관단총 생산을 시작했지만, 이것들이 전선에 보급되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던 만큼 당장으로선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 오늘 기관단총 200정을 가져갈 부대는…… 허버튼의 3대대!”

“오예!!!”

“우리 대대장님 최고다!”

“믿고 있었다고!”

그 결과, 최전선에선 영국군 장교들이 기관단총 보급을 두고 제비뽑기라는 이름의 듀얼을 벌이는 진풍경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비단 육군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이 이글(아들러) 전투기를 가져갈 친구는…… 맥커덴!”

프랑스 육군 항공대의 신형 전투기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영국 왕립 항공대(Royal Flying Corps, RFC) 내에서도 독일군의 아들러 전투기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좋았어! 드디어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있게 되었군.”

“젠장, 보스! 이거 사기 아닙니까?”

“불만 있으면 네 운을 탓해라. 호커.”

RFC 제6 비행대 대장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사령부 사령관으로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활약했던 휴 다우닝(Hugh Caswall Tremenheere Dowdin)의 차가운 목소리에 영국 파일럿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이번에도 아들러 전투기를 받지 못한 라노에 호커(Lanoe George Hawker)는 전혀 웃지 못했지만.

“걱정하지 마. 호커. 내가 네 몫만큼 개구리들을 상대할 테니까!”

“닥쳐, 맥커덴!”

RFC 파일럿이자 제1차 세계대전 총합 격추 수 7위에 빛나는 에이스 파일럿, 제임스 맥커덴(James Thomas Byford McCudden)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버럭 소리를 지르는 호커.

그만큼 영국 왕립 항공대에서 독일제 아들러 전투기는 존재는 각별했다.

프랑스 항공대의 반격으로 하늘에서 본격적인 혈투가 시작되는 와중에 현재 영국 왕립 항공대가 사용하는 빅커스 F.B.5 건버스는 성능 면에서 아들러 전투기는 물론, 프랑스군의 신형 전투기조차 따라가질 못하고 있었으니까.

열심히 만들고 있다는 신형 전투기는 아직도 깜깜무소식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군 조종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의 비행기보다 압도적인 성능에 무전기까지 달린 아들러 전투기를 가지길 원했다.

물론, 항공 전력에 확충에 열을 올리고 있는 독일 제국의 상황상 보다시피 가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게다가 영국군에게 부족한 것은 비단 기관단총과 전투기뿐만이 아니었던 상황.

덕분에 전투는 계속 도돌이표를 찍을 뿐이었고, 그리고 이는 결국 독일 제국의 연이은 승리에 조급함을 표출하던 영국 정부가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움직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 *

“오랜만입니다. 프렌치 사령관.”

“……키치너 장관.”

예고도 없이 홀로 벨기에의 영국 원정군 사령부를 찾아온 전쟁장관 허버트 키치너의 깜짝 방문에 존 프렌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자기가 여전히 군에 있는 줄 착각이라도 하는 건지 야전 사령관 제복을 입고 온 것도 불쾌한 일이었지만, 런던에 있어야 할 그가 기별도 없이 친히 서부전선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닐 테니까.

“무슨 일로 벨기에까지 오신 겁니까?”

“이유는 알고 있잖소. 존.”

“또 그놈의 공세 이야기군.”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키치너의 말에 프렌치가 혀를 찼다.

현재 영국 총리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는 영국군의 부진에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페트로그라드를 폭격하고 돌아온 독일 비행선들이 이어서 파리를 폭격하자 분노한 프랑스인들이 보복을 위해 러시아제 일리야 무로메츠 폭격기로 무방비였던 런던을 폭격하기도 했으니.

[애스퀴스 총리, 대영제국의 전쟁 지도자로서 자질을 의심받다!]

[나날이 떨어지는 지지도! 자유당 내각의 위기가 오는가?!]

[총리를 비판하는 런던 시민들. 애스퀴스는 전시 총리로서 에너지가 부족해!]

애스퀴스 총리를 향한 언론과 여론의 질타가 연일 이어졌다.

야당인 보수당 또한 매일같이 총리를 향한 비판에 열을 올렸고, 여당인 자유당 내에서도 애스퀴스가 과연 전시 총리에 적합한지에 대한 의심과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지지를 잃은 총리에게 남은 길은 스스로 물러나거나 경쟁자에게 밀려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뿐.

그렇기에 애스퀴스는 자신의 총리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성과를 내라며 프렌치를 닦달했고, 그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가 다름 아닌 영국군의 단독 공세였다.

“나로서도 공세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전쟁의 주도권을 이 이상 독일에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허, 그것참 처칠 같은 말씀이군요.”

보다시피 키치너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프렌치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키치너는 반박하지 않았다.

실제로 처칠은 영국이 이대로 계속 독일의 들러리 역할로 만족하는 순간, 전후 유럽의 질서와 주도권마저 독일 제국에 넘어갈 것이라고 외치고 있었으니까.

키치너 또한 처칠의 과격한 언사와 행동에 눈을 찌푸릴지라도 그 말만큼은 옳다고 생각했다.

카이저마리네가 러시아 발트함대를 섬멸한 것에 배가 아팠는지, 우리도 러시아 흑해함대와 함대 결전을 해야 한다는 헛소리는 둘째 치더라도 말이다.

“우리 대영제국이 향후 지금의 위치를 계속 유지하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라도 그 어느 때보다 승리가 필요하오.”

“승리 좋지요. 저도 공세에 마냥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우선 포탄부터 제때제때 주고 말했으면 좋겠군요.”

여름에 시작한 전쟁이 가을로 접어들자 영국 원정군은 심각한 포탄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원인은 정부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민간에 의해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는 영국의 군수품 생산 체계 때문이었다.

이러한 영국군의 만성적인 포탄 부족 사태는 영국군의 전쟁 수행에도 안 좋은 의미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어디 포탄뿐입니까? 군수품 중 어느 하나 부족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포탄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오.”

과연 그럴까?

존 프렌치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키치너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자치령과 식민지에서 추가 병력이 오고 있소. 캐나다군과 인도군이 며칠 내로 서부전선에 투입될 거요. 단독 공세를 시도할 수 있을 만큼 병력이 충분해진다는 소리지.”

“…….”

“그리고 친애하는 우리 사령관께서도 슬슬 성과를 내지 않으면 그 자리를 지키기 어렵다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을 거고.”

사실이었다.

지지부진한 전황으로 인해 자리가 위태로운 것은 총리만이 아닌, 원정군 사령관인 존 프렌치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후……. 알겠습니다. 참모들과 함께 논의해 보겠습니다.”

결국, 존 프렌치는 여전히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긴 했지만, 키치너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고 이대로 제대로 된 전투조차 못 해 본 채 사령관 자리를 잃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렇게 영국 원정군이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를 계획하고 있을 때,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항복에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한 프랑스군 또한 답답한 전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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