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 세르비아의 최후 (2)
“친애하는 독일의 여성 노동자 여러분. 아직 여름 더위가 가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밤낮으로 일하고 있는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1913년 9월 11일.
내각 관료들과 함께 군수공장에 방문한 나는 두건으로 머리카락을 감싼 채 신형 철모를 만들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 여러분이 만드는 철모 하나하나가 전선에 나가 있는 수많은 독일의 아들들과 아버지들의 목숨을 지켜 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도 어머니와 아내의 마음으로 정성스럽고 튼튼하게 만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네에─!”
“연설 수고했네. 후작. 역시 이런 자리에선 나 같은 아저씨보단 젊고 인기 많은 자네가 나서는 게 더 좋다니까. 보게, 당장 우리 공장 아가씨들도 자네에게 열렬한 시선을 보내고 있지 않나?”
“후우,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부총리님.”
루이제는 화나면 무섭단 말이다.
“쯧쯧, 벌써부터 잡혀 사는구만. 그나저나 옛날 같으면 여자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광경 같은 건 상상조차 못 했을 텐데 말이지.”
“전쟁은 세상을 빠르게 바꾸는 법이니까요.”
내 말에 노쇠한 뷜로 총리를 대신해 내정을 총괄하고 있는 베트만홀베크 부총리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이 지극한 몇몇 독일 융커 어르신들은 아직도 여자는 공장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집에서 애나 봐야 한다는 철 지난 이야기나 하고 있었지만.
‘현실성 없는 소리지.’
당장 남자들이 죄다 전선으로 향하는 판국인데, 여자들이라도 공장에서 일하지 않으면 전선에서의 수요를 어떻게 감당하라는 것인가?
우리에겐 그 어느 때보다 리벳공 로지(Rosie the Riveter,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여성 전시근로자들을 대표하던 문화적 상징)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만큼 전후 여성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커지겠지만.’
다만, 어차피 이는 역사의 흐름상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여성들이 전쟁에 이바지한 대가로 독일은 물론, 영국도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서 여성 참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니까.
물론, 입으론 진보를 외치면서 속은 그 누구보다 보수적이라는 듯 1차도 아닌, 무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에야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프랑스 같은 예도 있었지만.
“몰트케 장관님, 신형 철모를 언제쯤 전선의 병사들에게 보급할 수 있겠습니까?”
“올해는 아무래도 어렵겠지만, 내년 1월부턴 가능할 것이오.”
베트만홀베크의 질문에 몰트케가 대답했다.
에휴, 이야기만 잘 풀렸더라면 전쟁 전에 철모를 보급할 수 있었을 텐데, 참 아쉬운 일이다.
나라고 철모의 유용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피켈하우베를 철모인지 뭔지로 대체하자고? 어림도 없는 소리!”
“피켈하우베야말로 우리 독일 제국군의 상징! 이를 바꾼다니 절대 있을 수 없소!”
“쯧쯧, 요즘 젊은것들이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융커란 벽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하긴 실제로도 피켈하우베에 미련 못 버려서 슈탈헬름 보급에 차질을 주었던 자들이 여기서라고 뭐가 다를까.
그래도 전선에서도 피켈하우베에 대한 불만이 커진 덕에 원 역사보단 빨리 철모 도입을 밀어붙일 수 있게 되었으니 좋게좋게 생각하자.
이른 전쟁으로 신형 군복 도입이 늦어지는 바람에 아직도 빨간 바지에 케피 쓰고 다니는 프랑스군보단 나으니까.
“그나저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불가리아군, 그리스군이 드디어 베오그라드를 포위했다지?”
“예. 부총리님.”
“빨리 떨어트렸으면 좋겠군. 전선 하나가 끝나면 그만큼 나가는 돈도 줄 테니까.”
승리야 당연하겠지만, 부총리의 기대와 달리 전투 자체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최후의 전투인 만큼 세르비아의 저항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할 테니까.
* * *
부우우웅──
“독일 비행기가 베오그라드의 하늘을 제집처럼 드나드는군.”
“죄송합니다, 폐하. 저들을 일일이 격추하려 든다면 가뜩이나 부족한 아군의 총알을 상당히 낭비해야 하는 터라.”
“자네를 탓하는 것이 아니네. 라도미르. 다만 이 아름다운 도시가 곧 적들의 손에 더럽혀질 것이 아쉬울 뿐.”
페타르 1세는 훗날 구 왕궁(Stari dvor)이라 불릴 베오그라드 왕궁에서 안타까운 눈으로 적에게 빼앗긴 하늘을 바라보았다.
‘곧 베오그라드도 저 하늘처럼 되겠지.’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 그리스 연합군은 이미 베오그라드를 물샐틈없이 포위했다.
아마 내일이 되면 수도를 향해 총공세를 시작할 것이다.
베오그라드는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전쟁은 총알과 사람을 가지고 하는 법이고, 세르비아군은 그 두 가지 모두가 부족했으니까.
“전투에 나가 본 지가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페타르 1세는 암울한 현실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맞서 싸우는 것을 택했다.
그는 혈기 넘치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내가 튀르크인들을 상대로 보스니아에서 게릴라를 이끌고 싸운 것이 1875년이었으니, 거의 40년 만이 아닐까 싶네. 아, 그래도 무시하진 말게나? 총 쏘는 법을 잊어먹지는 않았으니까.”
“……폐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역시 폐하만이라도 베오그라드를 빠져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라도미르.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인제 와서 내 수도와 내 백성들을 버리고 구차하게 도망을 치겠는가?”
그렇기에 러시아가 세르비아 왕족들이라도 구출하기 위해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 세계 최초의 여객기이자 현재는 폭격기로 운용 중인 일리야 무로메츠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페타르 1세는 수도를 떠나지 않았다.
그저 파시치 총리를 비롯한 세르비아 정부 인사들과 왕세자 알렉산다르 1세를 비롯한 가족들만을 태워 보냈을 뿐이다.
“이 늙은이는 그저 적과 싸우다 사랑하는 베오그라드에 묻히길 바랄 뿐이네.”
자신이 사는 곳이 현실이란 것을 잊은 채 순정만화 같은 삶을 살려고 한 전대 국왕 알렉산다르 오브레비치가 평민 과부 왕비와 함께 검은 손에 의해 토막 나 퇴비 더미에 버려진 이후, 세르비아인들의 열렬한 환영과 함께 왕위에 오른 지도 어언 10년이다.
오브레비치 가문과의 왕위 경쟁에서 밀려 힘든 삶을 살아야 했던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한을 풀었으니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그에게 여한은 없었다.
마침 루마니아의 카롤 1세도 자비를 베풀어 세르비아 피난민 한정으로 국경을 열어 주었으니, 이젠 그들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싸울 뿐.
“그저 후회가 하나 있다면 내쳐야 할 자들을 내치지 못했다는 것. 그것 하나뿐이네.”
“폐하…….”
“시간이 되었군. 가세, 라도미르.”
페타르 1세는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최후까지 국왕과 함께하기로 결정을 내린 푸트니크 원수와 함께 궁전의 발코니로 천천히 걸어갔다.
발코니 아래엔 세르비아 병사들과 군인은 아니지만, 무기를 들고 수도를 지키기 위해 모인 세르비아인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여들어 존경하는 국왕의 연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르비아의 영웅들이여, 그대들은 두 가지 맹세를 했다.”
페타르 1세는 자신의 병사들을 자애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나는 그대들의 국왕인 나에게 한 맹세고, 다른 하나는 조국에 한 맹세다. 그러나 나는 무덤에 들어갈 날만을 기다리는 병든 늙은이일 뿐이니, 이제 제군들을 나에 대한 맹세로부터 해방해 주겠다.”
국왕의 갑작스러운 말에 웅성거리는 병사들.
그러나 페타르 1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여러분이 조국에 한 맹세로부터 그대들을 해방해 줄 수는 없다. 만약 더 이상 싸울 수 없다고 느낀다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맹세컨대 전쟁이 끝나고 우리가 지금의 위기를 벗어나더라도 집으로 돌아간 이들에게 어떤 해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폐하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전장을 떠나 무기를 내려놓고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도 용서하겠다는 말에 누군가가 국왕을 향해 외쳤다.
페타르 1세는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끝까지 여기 남아 싸울 것이다. 내 선조들이 세르비아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듯이 나 또한 이 늙은 몸이 땅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싸울 것이다!”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베오그라드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더라도 국왕으로서 그대들과 함께 싸울 것이다.
페타르 1세의 진심 어린 외침에 세르비아인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그 누구도 도망치지 않았고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본 페타르 1세는 구름 한 점 없는 베오그라드의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르비아의 운명을 결정지을 전투가 다가오고 있다.
부디 세르비아의 선조들이 후녀디 야노시와 함께 정복자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으로부터 베오그라드를 지켜 냈던 1456년 베오그라드 공방전 때처럼 주의 가호가 자신들과 함께하길 기도할 뿐이다.
“포병대, 서둘러 중포 배치를 마무리하라. 내 기필코 이번 주 안에 베오그라드를 떨어트리고, 세르비아를 멸망시킬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야노시의 나라는 지금 베오그라드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
1913년 9월 12일.
모두가 긴장과 불안감 속에 잠 못들 던 밤이 지났다.
“Feuer!”
그리고 세르비아군이 예상했던 대로 아침 해가 밝자마자 대지를 울리는 포성과 함께 베오그라드를 향한 연합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콰앙! 콰광! 쾅!
“모조리 쏟아부어라! 포탄 걱정은 할 필요 없다. 베오그라드를 지도 위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일념으로 계속 쏟아붓는 거다!”
드리나 전투에서 하마터면 또 세르비아군에게 패배할 뻔한 포티오레크 대장의 목소리와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스코다 305mm 곡사포가 베오그라드를 향해 불꽃을 토해 냈다.
“포탄이다!”
“피해!!”
쿠우우웅!!
305mm 포탄이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지면과 충돌하며 세르비아 병사와 참호를 동시에 갈기갈기 찢어 버린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포병대는 독일 제국 항공대의 항공 정찰에 힘입어 오늘 전쟁을 끝낸다는 마음으로 정확하고 무자비하게 포탄을 쏟아부었고, 포탄이 바닥난 세르비아군은 대포병사격조차 하지 못한 채 묵묵히 이를 얻어맞아야만 했다.
삐이이이───!
“돌겨어억──!!”
포병대가 베오그라드를 두들기자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천천히 세르비아 참호선에 접근하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보병과 불가리아군의 대규모 돌격이 시작되었다.
오헝 병사들과 불가리아 병사들은 시퍼런 총칼과 이젠 협상국 모두의 좋은 친구가 된 기관단총을 앞세우며 세르비아군을 향해 달려들었고, 세르비아군은 이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다다다다다! 타다다다다다!!
“전방에 기관총!”
“엄폐ㅎ…… 끄악!”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대규모 포격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 방어선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포격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다시 참호로 돌아와 기관총을 잡은 세르비아 병사들은 달려오는 연합군 병사들을 향해 끊임없이 납탄을 퍼부었고, 불가리아인들은 연합군의 다른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참호전이란 이름의 새로운 전쟁을 온몸으로 겪어야만 했다.
탕! 탕! 타다다다다다!
세르비아군은 참호에 몸을 숨긴 채 불가리아군을 향해 끊임없이 방아쇠를 당겼고, 기관총은 불가리아 병사들을 불가리아 병사였던 것으로 만들었으며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철조망들은 병사들의 몸을 찌르고 옭아매며 그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전진! 전진! 불가리아의 전사는 겁쟁이 세르비아의 총탄에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우리는 죽을 때도 서서 죽으리라!”
그러나 불가리아 병사들은 세르비아군이 발칸 전쟁에서 익히 겪어 왔던 것처럼 오스트리아-헝가리군보다 강건했고, 또 훨씬 끈질겼다.
그들은 세르비아에 대한 증오심을 원천으로 누가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계속, 또 계속해서 세르비아 참호선으로 전진했다.
“쯧, 병력 손실이 너무 커지고 있군.”
“아직 첫날이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겠지. 오늘은 이만 물러납시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은 오헝군과 불가리아군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파라스케보풀로스 사령관, 그리스군을 준비시키시오!”
“알겠소.”
그러나 전투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공격 둘째 날이 되자 포티오레크는 불가리아군에 이어 그리스군을 공세에 투입했다.
“전군, 앞으로!!!”
그리스군 사령관 레오니다스 파라스케보풀로스(Λεωνίδας Παρασκευόπουλος) 사령관의 우렁찬 호령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그리스군이 일제히 베오그라드 방어선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불가리아군, 그리스군까지.
연합군이 일제히 공격에 나서며 끝도 없이 밀려오자 세르비아군은 중과부적이란 말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끝인 걸까?
이대로 세르비아는 멸망하고 마는 것일까?
절망감이 지칠 대로 지친 세르비아 병사들의 몸을 옭아맨다.
연합군은 세르비아군의 기세가 떨어진 것을 눈치채고 공세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물러서지 마라, 그대들의 국왕이 함께하고 있으니. 아무리 지치고 힘들지라도 버텨 내는 거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번에도 베오그라드를 떨어트리지 못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페타르 1세가 푸트니크 원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방어선으로 나가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와중에도 병사들을 계속해서 독려한 덕에 흔들렸던 세르비아군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기 때문이다.
“허, 세르비아인들이 독종은 독종이군.”
“그래도 놈들도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소. 그러니 교대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합시다.”
그러나 연합군의 공격은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연합군은 수의 폭력을 앞세워 24시간 내내 베오그라드를 두들겼고, 체펠린 비행선으로 베오그라드를 폭격했으며 다뉴브강을 통해 소형 군함까지 끌고 와 도시 내부에 포격을 가했다.
그리고, 결국 공격 7일째.
“푸트니크 원수님, 방어선이 돌파당하고 있습니다! 더는 버티지 못합니다!”
베오그라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