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69화 (169/193)

169화 : 발트함대 VS 발트함대 (2)

콰아왕!!

“하느님 맙소사…….”

바다에 빠졌다가 구출된 에센 제독은 구명정 위에 크고 작은 폭발을 계속 일으키며 발트해의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자신의 기함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주변에선 수면에서 허우적거리며 구조만을 기다리고 있는 수병들의 비명이 끝도 없이 울려 퍼졌고 함대는 공황에 빠진 채 전열을 흐트러트리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대체 무슨 일이냔 말이야!”

그러나 여기서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에센 제독이었다.

아직도 그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뜬금없이 적 비행기들이 날아오더니 어뢰를 떨구고, 그걸로 쾅.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보는, 겪어 본 적도 없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단 말인가.

“이, 이 비열한 독일 놈들……!”

이건, 이런 건 해전이 아니었다.

차라리 잠수함이었다면 절망은 했겠지만,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고로 해전이라는 것은 배와 배가 하는 것이다.

이런 되먹지도 못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제독님, 기분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어서 빨리 다른 전함에 승선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옆에서 젖은 생쥐 꼴이 된 채 벌벌 떨고 있는 참모 하나가 시간이 없다는 듯 재촉하자 에센 제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 기함이 당해 버린 이상 다른 전함으로 서둘러 갈아타고 엉망이 된 함대를 수습하는 게 우선이었다.

“가장 가까운 전함은…….”

“세바스토폴입니다.”

“그러면 거기로 가지.”

그렇게 에센 제독과 발트함대 참모들이 강구트급 3번함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로 막 옮겨탔을 때,

“9시 방향! 함영 다수!”

“거 누가 게르만 놈들 아니랄까 봐 시간 한번 기가 막히게 맞추는군……!”

에센 제독의 이 악무는 소리와 함께 독일 발트함대 또한 그 모습을 드러냈다.

* * *

“하하하하하! 저기 불타오르고 있는 강구트가 보이나, 로이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오늘 동료를 하나 늘리게 되겠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뭡니까?”

“유령선 말이네, 유령선. 자넨 오페라도 안 보나?”

“예, 안 봅니다. 그러니 그만 떠들고 눈앞의 적에게 집중해 주시죠.”

“거 딱딱한 친구 같으니.”

하인리히 왕자는 투덜거리면서도 아직 완전히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러시아 발트함대의 모습에 눈동자를 탐욕으로 빛냈다.

하인리히 왕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혈을 기울인 공습 작전은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눈앞에 있는 먹음직스러운 만찬을 깔끔하게 먹어 치우는 것뿐이다.

“전 함대 단종진으로!”

“야볼!”

왕자의 우렁찬 명령과 동시에 발트함대의 기함인 오토 릴리엔탈에서 신호기가 올랐다.

이에 독일 발트함대의 모든 군함이 연돌에서 검은 연기를 힘차게 내뿜으며 측면을 러시아 함대에 내보인 채 일렬로 정렬하기 시작했다.

“함포 조준 완료!”

“발사!!”

콰와왕!!

이윽고 거친 발트해의 파도마저 움츠러들 정도로 거대한 포성이 울려 퍼지며 독일 발트함대의 주포들이 일제히 불꽃을 뿜었다.

퍼엉! 펑!

“제독님, 협차 당했습니다!”

“돌격 신호, 돌격 신호를 보내라!”

러시아 발트함대 함선들 주변에서 수백 개의 물기둥이 높다랗게 솟자 세바스토폴의 함교로 서둘러 달려온 에센 제독도 다급히 함대에 명령을 내렸다.

마음 같아선 함대를 물리고 후퇴하고 싶지만, 러시아의 전함들은 발이 느리다.

이에 반해 적 함대엔 장갑을 포기하고 속도를 늘린 순양전함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 상황.

이대로 무질서하게 도주해 봤자 적 함대에 무자비하게 사냥당할 뿐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손해를 감수하고 근접전으로 전투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지금으로선 그나마 최선이었다.

물론, 최선이라곤 해도 그것이 꼭 생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 어차피 발트함대 최고의 전력이라 할 수 있는 강구트급도 4척 중 1척이 넵튠의 궁전으로 가 버린 이상, 에센 제독으로선 도박을 해 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운 좋게, 정말 운 좋게 살아서 돌아간다고 해도 이대로라면 몇 해 전에 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처럼 패전이란 이름의 불명예를 지는 결말밖엔 없었으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뒤에 절벽밖에 없다면 이젠 이판사판이다!”

이렇게 된 이상, 적 함대와 동귀어진하는 한이 있더라도 독일 발트함대의 전력을 최대한 깎아내린다.

에센 제독의 결심과 함께 러시아 함대는 구식 전함들을 방패 삼아 독일 함대를 향해 일제히 앞을, 오로지 앞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함대, 아군을 향해 돌격해 옵니다!”

“하하하하! 돌파를 노릴 셈인가? 그래, 겁쟁이처럼 도망칠 바에야 남자답게 이렇게 나와야지!”

그리고 하인리히 왕자는 적 제독의 결의를 받아들였다.

함대결전, 함대결전이다.

힘과 힘을 부딪쳐 패배하는 쪽은 칠흑같이 어두운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이기는 쪽은 살아남아 명예를 거머쥔다.

“카이저마리네의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다! 제국의 흥망, 이 결전에 달려 있으니. 정면에서 놈들을 짓뭉개 버려라!”

“옛, 제독님!”

그것이 땅개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바다 사나이들의 싸움이었다.

“자이들리츠(SMS Seydlitz), 슬라바(Slava)에 명중탄! 적 전함 유폭!”

“아군 구축함대와 적 구축함대 교전 발생!”

“프린츠 하인리히(SMS Prinz Heinrich) 중파! 너덜너덜하게 당해서 전열을 이탈하고 뒤로 물러나고 있는 중!”

“로이터 함장, 방금 보고에 감정이 많이 담긴 것 같은데?!”

“착각입니다!”

사방에서 강철의 포탄이 귀를 찢는 듯한 포성과 함께 서로를 향해 쏟아지는 가운데 함교 내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보고와 보고.

그리고 발트해에선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함선이 고철이 되어 가라앉고 있었다.

“아군 함대 피해가 계속해서 늘어 가고 있습니다!”

“전열에서 아군 함선들의 이탈 가속 중!”

“크윽……. 역시 역부족인가?”

이탈 함선의 대부분은 러시아 발트함대였다.

러시아 함선들은 단종진의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돌파를 노렸지만, 독일 전함들의 강력한 화력을 이겨 내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강구트급을 제외한 러시아 전함들은 전 프리드리히급 전함.

러시아 해군에겐 가혹한 말이겠지만, 프리드리히급 전함들 앞에선 낡아 빠진 고철 덩어리들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부우우우웅───

“7시 방향에서 적기 접근 중!”

“회피! 회피이이!!”

게다가 연료 보급을 마치고 다시 날아올라 러시아 발트함대 사이 사이를 날아다니며 어뢰를 쏘아 대고 있는 오토 릴리엔탈 함재기들 때문에 전열이 계속해서 흐트러지고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바로 전에 저 작은 비행기들이 떼로 몰려와 러시아 발트함대의 자랑이었던 강구트를 침몰시키는 걸 두 눈 뜨고 본 탓에 함선들이 공포에 질렸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들 눈엔 처음 보는 독일군 함재기들이 괴물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들이 겁에 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폴, 폴타바 유폭!”

“페트로파블롭스크(Петропавловск)에 피탄, 중파 되었습니다!”

“제독님, 더는 무리입니다!”

“…….”

“제독님!”

부하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에센 제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핏발 선 눈으로 독일 함대 뒤에 유유히 서 있는 오토 릴리엔탈을 노려볼 뿐이었다.

“전 함대에 명령을 내려라. 지금 즉시 후…….”

세바스토폴 함교에 숨 막히는 침묵이 감돌고 마침내 결정을 내리려는 듯 에센 제독이 입을 뗀 순간.

콰왕!!

“크악!”

“으아악!!”

세바스토폴 함교에 헬골란드급 전함 2번함 SMS 오스트프리슬란트(SMS Ostfriesland)의 포탄이 적중했다.

“세, 세바스토폴 함교에 명중탄!”

“뭐? 제독님, 에센 제독님은 무사하신가?!”

“모르겠습니다. 함교 전체가 당한 듯합니다!”

“아브로라가 퇴각! 페트로파블롭스크도 전장을 이탈하고 있습니다!”

“젠장, 반전해라. 우리도 도망친다!”

기함인 세바스토폴이 당하자 전의를 상실한 팔라다급 방호순양함 아브로라(Аврора)와 훗날 마라(Марат)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질 페트로파블롭스크가 누가 불침함들 아니랄까 봐 전장을 빠르게 이탈하기 시작하자 러시아 함대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하인리히 제독님, 적 함대 도주합니다! 승리입니다!”

“음, 추격부대를 보내게. 그나저나 티르피츠가 이 소식을 들으면 뛸 듯이 기뻐하겠군. 이참에 항공모함을 추가로 건조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말이지! 하하하하!”

그렇게 훗날 핀란드만 해전이라 이름 붙여질 발트해의 처음이자 마지막 해전은 하인리히 왕자의 웃음소리와 카이저마리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 * *

“동프로이센과 발트해에서의 승리를 축하하네. 후작.”

“감사합니다. 폐하.”

핀란드만 해전 이후 러시아 발트함대는 사령관인 에센 제독이 전사하고, 함선 대부분을 상실하며 결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러시아 발트함대의 유일한 프리드리히급 전함이었던 강구트급 전함 또한 강구트가 오토 릴리엔탈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하고, 폴타바와 세바스토폴 또한 우리 전함들의 포화 속에서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나마 무사한 것은 상처를 입은 채 가까스로 살아 도망친 페트로파블롭스크뿐이었다.

“듣자 하니 차르가 모스크바로 도망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더군요.”

언제 우리 비행선들이 다시 페트로그라드에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 수도를 지키는 발트함대까지 전력 대부분을 상실한 채 돌아왔으니.

니콜라이 2세로선 이대로 페트로그라드에 있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다.

물론, 차르가 모스크바로 수도를 이전하는 것을 러시아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눈에 보이듯 뻔했지만.

당장 독소전쟁 때 숙청 콧수염 스탈린이 독일군이 코앞까지 몰려오는 상황에도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왔다.

‘다만, 우리 해군이 거둔 성과에 처칠 이 새끼가 또 발작을 일으키고 있단 말이지.’

처칠 성격에 독일 해군만 공훈을 세우는 모습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으니.

덕분에 처칠이 허튼짓 못 하게 목줄을 잡고 있는 그레이 외무장관만 한창 고생 중이다.

나중에 좋은 약이라도 보내 주자.

“하아, 우리 오스트리아-헝가리군도 독일군처럼 분발을 좀 해 주었으면 좋겠다만.”

“하하하…….”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진심이 가득한 무거운 한숨에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한때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밀렸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우리 7군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다시 살아났다.

다만, 갈리치아 전선 자체는 아직 안정화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쪽은 러시아 야전군만 5개에 그중 하나는 그 브루실로프가 이끌고 있었으니까.

“빨리 갈리치아의 러시아군을 몰아내야 할 텐데 말이지. 이탈리아가 언제 우리에게 등을 돌릴지 모르는 상황인데, 우리가 먼저 그쪽을 공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재정비와 추가 야전군의 편제만 끝나고 나면 동부전선에서의 공세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세엔 갈리치아 전선에서의 반격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참으시죠.”

“음,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겠네.”

“폐하, 라도슬라보프 총리와 베니젤로스 총리가 도착했습니다.”

“아, 드디어 왔군! 어서 들라 하게.”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허락과 함께 불가리아 총리 라도슬라보프와 그리스 총리 베니젤로스가 회의실 안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후작님.”

“어서들 앉게나. 시간은 유한한데,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니.”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사람 좋은 미소에 라도슬라보프와 베니젤소르가 배려에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자, 드디어 지긋지긋한 세르비아와의 악연에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 왔네. 불가리아군과 그리스군이 우리와 함께하고, 독일군이 항공 지원과 기관단총과 신형 장갑차를 지원해 주니, 이번에야말로 세르비아 전선을 끝낼 수 있겠지.”

“말씀하신 세르비아 영토 분배는 확실히 지켜지는 것이 맞겠지요?”

발칸전쟁 때 세르비아에 뒤통수를 맞은 전적(원인제공은 불가리아가 먼저 했지만)이 있던 라도슬라보프 총리의 물음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불가리아와 그리스를 참전시키기 위해 도나우강 이북만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가져가고, 지난 발칸전쟁 때 세르비아가 차지한 마케도니아 지역을 그리스에게, 나머지 영토는 전부 불가리아에 양도하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 회첸도르프가 시끄럽게 굴긴 했지만, 그 또한 결국 입을 다물었네. 그 지독한 헝가리인들도 이 건에 대해선 찬성했으니, 당장 갈리치아의 일만으로도 정신없는 그도 강하게 반대하긴 어려웠겠지만 말일세.”

“헝가리인들과 폐하께선 사이가 안 좋으신 거로 알고 있는데, 의외로군요.”

그냥 안 좋은 수준이 아니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헝가리 정부는 아예 서로를 혐오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민족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헝가리의 이권을 줄이고, 그만큼 슬라브인들에게 양보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나도 헝가리인들도 세르비아를 완전히 합병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은 같네. 가끔은 고장이 난 시계도 맞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지.”

“하하, 그렇습니까?”

이건 원 역사에서도 그랬다.

실제로 헝가리인들은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전쟁에 찬성하는 대신 세르비아를 합병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내걸기도 했으니까.

‘문제는 그걸 약해 보인다고 생각해서 공표를 안 했다는 거지.’

뭐, 이젠 의미 없는 세계대전의 어이없는 발발 이유 중 하나였다.

어쨌든 나로선 서로가 만족하는 선에서 이야기가 끝났으니, 굳이 독일에 중요하지도 않은 세르비아 분할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럼, 우리들의 승리를 위해 건배하도록 하지.”

“하하, 아주 기쁜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자, 협상국의 승리를 위하여!”

“위하여!”

짠!

나와 프란츠 페르디난트, 라도슬라보프, 베니젤로스는 미소를 지으며 샴페인 잔을 부딪쳤다.

세르비아를 세계대전에서 탈락시킬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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