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68화 (168/193)

168화 : 발트함대 VS 발트함대 (1)

“이런 식으로 등을 떠밀리며 출격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건만.”

1913년 8월 28일.

에센 제독은 기함인 강구트 위에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발트함대의 상황은 적의 함정을 향해 제 발로 걸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에센 제독도 그것을 알기에 페트로그라드 폭격으로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니콜라이 2세의 출격 명령에도 불구하고 준비가 필요하다며 최대한 시간을 끌었지만, 보다시피 이젠 그것도 한계였다.

어제 독일 9군이 수송선을 타고 메멜에 상륙해 동프로이센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던 렌넨캄프의 1군이 후퇴하기 시작한 것 때문에 출격에 대한 압박이 더욱 커지면서 그로서도 더는 준비를 핑계로 미적거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입지도 예전 같지 않으니.’

원인은 에센의 출신 성분 때문이었다.

그는 니콜라이 오토비치 폰 에센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발트 독일인이었는데,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독일계란 이유로 발트 독일인들의 입지가 점점 악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전에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서 민족주의가 부상하며 러시아 제국의 주류인 슬라브 귀족들에게 그리 곱지 못한 시선을 받던 발트 독일인들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고, 에센 제독 또한 그러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가문인 에센 가문은 2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러시아의 바다를 지켜오며 영예로운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 받은 인물만 7명에 달했을 정도로 러시아 제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해 왔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에센 제독으로선 정말이지 억울할 수밖에 없는 일.

그러나 계속해서 이어지는 카이저마리네의 도발은 가뜩이나 위태로운 그의 입지를 끊임없이 흔들었고, 결국 에센 제독과 발트함대는 항구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핀란드만의 입구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하인리히 왕자와 독일 발트함대와 싸우기 위해.

‘승산은 그리 크지 않겠지.’

행운의 여신이 이쪽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이상 말이다.

당장 전함 전력만 해도 러시아 발트함대는 강구트급 4척을 제외하면 죄다 구식 전함들뿐이었던데, 비해 독일 발트함대는 프리드리히급 전함 6척에 순양전함 6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해 볼 수 있는 데까진 해 볼 수밖에.”

에센 제독은 모자를 고쳐 쓰며 다시금 결의를 다졌다.

그 또한 대러시아의 해군 제독.

이러니저러니 해도 싸움밖에 길이 없는 이상, 에센가의 남자답게 거침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묵묵히 맞설 뿐이다.

* * *

“하인리히 제독님. 수상기가 러시아 발트함대를 발견했습니다. 현재 아군 함대의 3시 방향에서 접근 중입니다.”

“강구트급은?”

“예, 기함인 강구트는 물론, 2번함 페트로파블롭스크, 3번함 세바스토폴, 4번함 폴타바까지 4척 전부 확인했습니다.”

“하하하하! 로이터 보게나. 바다에서도 비행기를 운용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예예, 알겠으니 어서 명령이나 내려 주십시오. 우리 조종사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자네 어째 요즘 따라 나에게 심하게 굴지 않는가?”

그게 과연 누구 때문일까?

그리 말하는 듯한 로이터의 매서운 눈에 하인리히 왕자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크흠, 뵐케 대위.”

“예. 제독님.”

서부전선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오스발트 뵐케의 형이자 SMS 오토 릴리엔탈 비행대 대장인 빌헬름 뵐케(Wilhelm Boelcke)는 하인리히 왕자와 로이터 제독의 이런 모습이 이젠 익숙하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경례를 올린 뒤 시선을 갑판으로 향했다.

“모두 집중!”

뵐케의 외침에 그와 마찬가지로 제국 항공대에서 오토 릴리엔탈로 파견된 20여 명의 조종사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다. 제군들.”

하인리히 왕자는 뿌듯한 얼굴로 갑판 위에 정렬한 조종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모두 알다시피 러시아 발트함대가 우리가 그들의 수도에 불장난을 좀 해 주자 드디어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항구 밖으로 기어 나왔다. 만약 그들이 끝까지 버텼다면 제군들에게 페트로그라드 구경을 시켜 줄 수 있었을 테지만, 그건 아무래도 다음 기회로 미뤄야 하는 모양이다.”

“하하하하!”

조종사들이 왕자의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하인리히 왕자는 살짝 아쉽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신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진심이었지만.

“하여튼, 제군들은 오늘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에서 세계 최초로 적 함대를 공습한다는 영광을 거머쥐게 될 것이다. 그대들의 목표는 단 하나, 적 기함 강구트다!”

적의 기함을 무력화해 적 함대를 혼란에 빠트리고, 그 기세를 이어 나가 러시아 발트함대를 일거에 쓸어버린다.

그것이 하인리히 왕자의 작전이었고, 드디어 자신들이 활약할 때가 왔다는 사실에 오토 릴리엔탈 파일럿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격앙된 표정을 지었다.

두렵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애초에 갑판에 이착륙할 때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항공모함에 파견을 오지 않았으니까.

물론, 제국 항공대의 기존 봉급보다 돈을 훨씬 더 많이 준다는 것도 컸다만.

어쨌든 육군의 제국 항공대가 하늘의 신사이자 기사라면 이들은 목숨 아까울 줄 모르는 해적이요, 피에 굶주린 바바리안이었다.

“마음 같아선 나 또한 그대들과 함께하고 싶다. 물론 그랬다간 내 옆에 있는 로이터 함장이 날 가만 안 둘 것 같지만.”

“하하하하하!”

“그러니 제군들은 나를 대신해 적 제독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고, 누가 진정한 발트해의 주인인지 똑똑히 알려 주길 기대한다.”

“야볼!”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오토 릴리엔탈 파일럿들은 간단한 작전 브리핑 후 바람이 불어오는 갑판으로 나가 갑판에 대기 중이던 씨아들러(Seeadler) 전투기에 탑승했다.

하인리히 왕자가 라이트사에 요청해서 탄생한 아들러 전투기의 함재기 버전으로 육군에 독수리가 있다면, 해군엔 물수리가 있다는 식으로 붙여진 이름이었다.

“1차 공격대 출격 준비 완료!”

“모두 활주로에서 물러나라!”

터덜터덜터덜─

장교들의 외침과 함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

“출격!”

부우우웅──!

곧 12대의 물수리들이 차례대로 갑판을 벗어나 잿빛 하늘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목표는 강구트.

러시아 발트함대의 기함, 강구트였다.

* * *

러시아 발트함대의 기함 강구트의 분위기는 전투 전의 불안감과 긴장감이 존재하긴 했지만, 아직까진 평온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적 함대의 모습을 아직 코빼기도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다.

범선 시대가 끝나고 강철로 이루어진 거인들의 시대가 왔다고 한들, 전투는 함대와 함대가 서로 맞닥뜨렸을 때 시작되는 법이니까.

물론, 잠수함이란 바다 아래에 모습을 갖춘 자객이 바다의 전쟁에 새롭게 등장하긴 했지만, 아군 구축함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 중이니 걱정할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강구트 수병들은 다가오는 전투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각자 마지막일지 모를 짧은 평화를 보내고 있었다.

부우우우우웅───

“응?”

그러나 그 평화는 수평선에서 들려오는 낯선 소리와 함께 깨지기 시작했다.

“저건…….”

“비행기?”

러시아 수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갑판으로 나와 함대 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비행기에 시선을 집중했다.

한두 대가 아니었다.

대략 열대쯤 되어 보이는 비행기들이 편대를 이루며 이쪽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에센 제독님. 아군 함대 정면에서 비행기로 보이는 물체들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비행기?”

갑판이 소란스러워지자 함교 밖으로 나온 에센 제독이 관측장교의 보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행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다른 곳도 아니고, 바다 한가운데서 나타났다는 것이 의문이었다.

“적 수상기인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독일 해군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 비행기를 바다에서도 운용할 수 있는 항공모함이란 것을 건조했다는데, 제 생각엔 거기서 날아온 비행기들로 보입니다.”

에센은 항공모함이란 낯선 단어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여튼, 괴상한 물건들은 죄다 영국과 독일 놈들이 만든다.

“수상기든 비행기든 저 작은 날파리들로 우리 함대에 뭘 해 볼 순 없겠지.”

“예, 아마 정찰 목적이겠죠.”

“적 함대가 가까이 있다는 소리군. 우리 구축함들과 순양함들을 더 재촉해야겠어.”

“저 비행기들은 어떻게 할까요?”

“가까이 다가오면 소총으로 쫓아내게.”

그것 말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발트함대 내에 대공 설비를 갖춘 함선은 없었으니까.

“어? 어어?”

그렇게 명령을 내린 에센이 함교로 다시 돌아가려고 할 때, 수병들의 의문과 호기심 섞인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에센이 무슨 일인가 하고 다시 고개를 돌리니 적 비행기들이 천천히 기수를 내리며 해수면 가까이에 붙기 시작했다.

“저것들이 뭘 하는 거지?”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들기 시작한 에센 제독이 목에 걸려 있던 쌍안경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가 상황을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독일 비행기들이 일제히 기체 아래쪽에 부착되어 있던 무언가를 바다 아래로 떨궜다.

풍덩! 푸쉬이이익───!

“어? 어어?”

어뢰였다.

“회, 회피 기동! 회피 기도오옹───!!”

뎅! 뎅! 뎅! 뎅!

“비상! 비상!”

“어뢰! 어뢰 공격이다!”

사색이 된 에센 제독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얼굴로 급히 강구트 내에 비상종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곧 강구트가 그 무거운 선체를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지만, 거대한 프리드리히급 전함의 특성상 그 움직임은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어뢰들은 이미 강구트의 측면 코앞까지 당도했기에.

“젠장, 뛰어!”

강구트의 운명을 직감한 몇몇 수병들은 망설임 없이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초 후.

콰와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강구트의 측면에서 거대한 물기둥 여러 개가 솟아올랐다.

* * *

“하하, 좋아. 맞췄다!”

오토 릴리엔탈 소속 파일럿이자 미래의 마이어 씨, 헤르만 괴링(Hermann Wilhelm Göring)은 폭음과 함께 가라앉고 있는 강구트를 바라보며 환성을 질렀다.

1912년에 제국 항공대에 입대한 이후, 돈을 더 많이 준다는 말에 혹해서 오토 릴리엔탈 파견에 응했던 괴링이지만, 처음엔 험하디험한 항공모함 생활에 후회했던 적도 있었다.

그가 하늘에 뜨는 것은 모두 공군의 것이라며 완성되지도 않았던 그라프 체펠린의 지휘권을 가져가겠다고 깽판을 쳤던 원 역사의 행적을 생각하면 일종의 업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지금 몸속 깊은 곳에서 아드레날린과 함께 솟아오르고 있는 쾌감은 지금까지 그가 익숙하지 않은 함상 생활 속에서 겪은 고통을 덮어씌우기에 그 무엇보다 충분했다.

쾅! 콰앙!

“크──! 이게 전쟁이지!”

영 좋지 않은 곳에 어뢰를 직격당했는지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요동치는 강구트의 모습에 괴링은 이빨을 드러내며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저 아래 작게 보이는 강구트의 장교들과 수병들이 허겁지겁 강구트에서 탈출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세상에 가장 강력한 왕은 폭풍 속의 가장 강력한 독수리다(Der mächtigste König im Luftrevier Ist des Sturmes gewaltiger Aar.).”

괴링은 도저히 흥을 못 참겠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수병들에게 배운 노래인데, 주로 잠수함 승조원들이 즐겨 부른다고 하던가?

괴링은 어이가 없었다.

이 노래는 바닷속을 돌아다니는 잠수함들보단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신들 물수리들에게 더 어울렸기에.

[치직! 독수리의 화려한 치지직──! 날갯짓에 모든 새는 공포에 떨기 시작한다(Die Vöglein erzittern, vernehmen sie nur Sein rauschendes Flügelpaar)!]

괴링의 노래는 무전기를 통해 그와 마찬가지로 들떠있던 다른 조종사들에게도 전해졌다.

“크큭, 괴링 녀석 신났나 본데?”

“녀석만 즐기게 놔둘 순 없지.”

물수리들은 한쪽으로 기울며 점점 가라앉고 있는 강구트를 뒤로한 채 모두 함께 노래를 불렀다.

[티랄랄라! 티랄랄라! 티랄랄라! 티랄랄라! 호이! 호이!]

노랫소리는 오토 릴리엔탈로 귀환하는 1차 공격대를 스쳐 지나가던 오토 릴리엔탈 2차 공격대에도 전해졌다.

그들은 씨익 미소 지으며 강구트의 생명을 완전히 끊기 위해 다시 한번 어뢰를 떨구었다.

[그래, 우린 세계의 주인이며 바다의 왕이다!]

“하인리히 제독님! 성공입니다. 적 기함 격침했습니다!”

“크하하하핫! 좋아, 제군들. 전속 전진이다! 러시아 발트함대를 끝장내러 간다!”

“야볼!”

그러나 발트함대의 재앙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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