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67화 (167/193)

167화 : 알바트로스 작전 (3)

페트로그라드의 아침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최전선과 달리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때처럼 여전히 평화로웠다.

페트로그라드 사람들은 평소처럼 이웃들에게 인사하며 일터로 향했고, 상인들은 상점의 문을 열고 손님들을 맞이했다.

지금이 전쟁 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모습이었지만, 아직 전쟁이란 것은 군인들이 하는 것이지 불행하게 전란에 휘말린 최전방 지역의 주민이 아닌 이상, 후방의 민간인들에겐 머나먼 일이라는 생각이 주를 이루던 시대다.

그리고 이것은 러시아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에 사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들 역시 전장에 나간 가족들을 걱정하고 답답한 전황에 화를 낼 뿐, 여전히 전쟁을 자신들과 머나먼 일 취급했다.

“어, 엄마! 저기 하늘 위에서 엄청 커다란 풍선이 날아오고 있어요!”

“사샤, 그게 무슨 소리…… 어?”

그러나 불행히도 온갖 신기술이 도입된 세계대전이란 이름의 대전쟁은 지금까지의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전쟁이었다.

부우우웅───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페트로그라드 상공에 유유히 나타난 거대한 체펠린 비행선들이 도시와 사람들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것도 한두 대가 아니다.

어림잡아도 열 손가락을 넘는 수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 사람들은 신분을 막론하고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자신들의 도시에 방문한 불청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게 대체 무엇일까?

왜 페트로그라드 위에 나타난 것일까?

자신들은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갖가지 생각이 페트로그라드 시민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들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중 어떤 사람도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휘이이이잉───

그러나 침묵은 잠깐이었다.

콰앙───!!

독일 제국이 만들어 낸 크고 웅장한 레비아탄들이 러시아 제국의 심장에 강철과 화염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운이 없던 건물 하나가 폭탄에 직격당해 강렬한 폭음과 함께 무너졌고, 얼이 빠져 있던 사람들 또한 얼굴이 공포로 물든 채 굳어 있던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꺄……꺄아아아아악!!”

“폭, 폭격이다! 독일인들이 페트로그라드를 불태운다!”

“으아아아앙! 엄마!”

“살려 줘! 죽고 싶지 않아!”

패닉에 빠진 채 비명을 지르며 비행선을 피해 사방으로 달아나는 사람들.

페트로그라드 시내는 아침의 평화는 거짓말이었다는 듯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혼란에 빠졌고, 체펠린 비행선들은 이런 반응을 원했다는 듯 신나게 폭탄과 소이탄을 떨어트리며 타오르는 불꽃에 장작을 던졌다.

휘이이잉──콰앙!

“으아아아아! 비켜, 내 앞을 막지 말란 말이다!”

“무, 무례하다! 난 귀족이란 말이다!”

“시꺼! 지금 귀족이고 나발이고 알바야?!”

“쿠헥!”

비싼 비단옷으로 온몸을 두른 채 거드름을 피우던 귀족이 평소 천하게 여겼던 노동자들에게 밀려 흙탕물 위에 몸을 구른다.

겁에 질린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부모를 찾고, 상인들은 소중한 가게조차 내버린 채 거리를 허겁지겁 내달리고 있으며 이 혼란을 잠재워야 할 경찰들 또한 사색이 된 채 도주 행렬에 합류한다.

지금까지 전쟁과 인연이 멀던 사람들에게 갑작스럽게 다가온 현실은 그만큼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것은 겨울궁전의 로마노프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 * *

콰왕──!

“페하, 이쪽입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기다려요. 아이들, 아이들을 두고 갈 순 없어요!”

“황녀님들과 황태자님은 다른 이들이 데려올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지금 걱정 안 하게 생겼나! 지금 저 망할 빌리의 비행선들이 내 도시와 내 궁전에 폭탄을 떨어트리고 있는데!”

분노와 공포로 얼굴이 붉게 물든 니콜라이 2세의 호통에 근위대장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사실 체펠린 비행선들은 시가지 폭격에 집중하느라 겨울궁전엔 딱히 폭탄을 떨어트리고 있진 않고 있었지만, 황제와 황후 또한 사람이었던 만큼 비행선 폭격이란 초유의 사태에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나 자식들이었다.

고귀한 신분을 떠나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또한 부모였으니까.

물론, 자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 라스푸틴이라는 제국의 망조를 궁에 들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차르와 차리나는 빨리 황제 부부를 피신시키고 싶어 하는 근위대장의 우려스러운 얼굴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찾으러 궁 반대쪽으로 향했다.

“아버지! 어머니!”

“오오, 올가! 타티아나, 마리야, 아나스타샤에 알렉세이까지. 모두 무사했구나!”

다행히도 맏이인 올가의 인솔 아래 근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불안한 얼굴로 피신 중이었던 OTMAA 오남매는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있던 장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동생들을 침착하게 잘 이끌었구나. 잘했다. 올가.”

“그보다도 아버지, 알렉세이의 상태가 안 좋아요.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모양이에요.”

올가 여대공이 자식들이 다치지 않고 무사한 것에 마음속으로 감사 기도를 올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혈우병 탓에 원래도 건강이 안 좋은 알렉세이 황태자는 난생처음 겪어 보는 혼란스러운 사태로 인해 병세가 나빠졌는지 창백한 얼굴로 근위대원에게 업힌 상태였다.

“서둘러 라스푸틴을 찾아오라고 해야겠군.”

차르는 아픈 손가락인 알렉세이를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작 그 라스푸틴은 황실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긴커녕 아침부터 수많은 애인 중 하나와 놀아나던 중 체펠린 비행선 폭격에 겁에 질려 체면이고 뭐고 집어던진 채 벽장 속에 벌벌 떨고 있었지만.

물론, 다른 이들이 그 거대한 아랫도리처럼 음탕한 라스푸틴의 행동을 비난해도 그가 그럴 리 없다며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던 차르 일가가 이를 알 리 만무했다.

“그 전에 우선 모두 안전한 곳으로 가자꾸나. 이곳에 계속 있는 것은 위험하다.”

“네, 아버지.”

올가 여대공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의 몸도 걱정이지만, 지금은 피신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황실 가족이 안전한 피난처로 이동하는 사이, 체펠린 비행선들 또한 가져온 폭탄이 다 떨어지자 더는 이곳에 볼일이 없다는 듯 칼퇴근하는 회사원처럼 폭격을 마치고 기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페트로그라드 사람들은 페트로그라드를 모조리 불태울 것 같은 독일 비행선들이 돌아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지친 얼굴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쟁은 더는 군인들의 일만이 아니었다.

이들은 불행히도 이제 그것을 똑똑히 깨닫게 되었다.

* * *

“나는 경들에게 실망했다.”

다음날.

슬슬 찬 바람이 불어오긴 해도 아직 여름 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건만, 겨울궁전은 그 이름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베리아의 한겨울처럼 혹한과도 같은 싸늘하디싸늘한 바람이 몰아쳤다.

페트로그라드가 불타올랐다.

자신의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소중한 자식들마저 위험에 처했다.

니콜라이 2세의 분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대했고, 장성들은 차르가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까 봐 겁에 질린 얼굴로 벌벌 떨 뿐이었다.

“폐하, 그래도 다들 예상 못 한 독일의 공습에 갑작스럽게 놀랐을 뿐, 실질적인 피해는 크지 않습니다.”

장성 중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실제로 이번 페트로그라드 폭격이 러시아 제국에 준 피해는 수치로만 보면 그렇게 높지 않았다.

운이 없던 건물 몇십 채 정도가 무너지거나 부서진 것을 제외하면 재산 피해도 생각보다 그렇게 크지 않았고, 사상자 또한 고작 이백 명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가?! 페트로그라드가 공격받았다. 표트르 대제께서 이 위대한 도시를 세우신 이래 그 어떤 적도 침범하지 못했던, 그 나폴레옹조차 손대지 못한 제국의 수도가 저 게르만인들의 손에 더럽혀졌단 말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피해가 적다는 말로는 차르의 분노를 잠재울 순 없었다.

독일의 페트로그라드 폭격이 독일인들의 기대와 달리, 페트로그라드에 입힌 상처는 얕았을지라도 페트로그라드 사람들의 마음에 남긴 상흔은 절대 얕지 않았다.

당장 니콜라이 2세조차 심지어 잘못했으면 아내와 자식들이 험한 꼴을 당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설친 마당이다.

이미 페트로그라드 시민들의 불안과 공포가 차르의 귀에 들려올 지경인 것도 모자라 더 후방의 모스크바로 피난 가는 이들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인데, 직접적인 피해 본 것이 생각보다 없다고 해서 어떻게 안심할 수 있단 말인가.

저 잔인한 독일인들이 언제든 비행선을 다시 페트로그라드로 보낼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말이다.

아무리 니콜라이 2세가 무능하다지만, 이번 일로 가뜩이나 불안정한 제국의 민심이 또다시 요동치리란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독일 비행선들은 카이저마리네에서 보낸 것이라지. 불과 며칠 전까지 리가만과 핀란드만을 들쑤시고 다닌 그 카이저마리네 말이야!”

“폐하, 그건…….”

니콜라이 2세가 카이저마리네를 언급하자 불안감을 느낀 에센 제독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시작되기도 전에 차르의 명령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에센 제독, 발트함대를 출격시키시오!”

“폐하!”

“거부는 용납하지 않겠소. 더는 독일 해군의 기고만장함을 참아 줄 수 없소. 이건 우리 러시아 제국의 자존심과 제국 신민들의 안전이 달린 문제요!”

니콜라이 2세의 분노 섞인 외침에 알현실의 모든 시선이 에센 제독을 향했다.

이곳에 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명 받들겠나이다.”

제독으로선 결국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 * *

“폐하, 발트함대가 크론슈타트에서 출격했습니다.”

“음, 그럼 이제 모든 것은 하인리히 녀석의 활약에 달렸군.”

“왕자님이라면 러시아 함대를 상대로 잘 해내실 겁니다.”

내 말에 빌헬름 2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에 너무 심취해 버렸긴 했지만, 저래 봬도 제독으로서 능력은 확실하니까.

하인리히 왕자라면 반드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것이다.

“그나저나 비행선 폭격의 성과가 생각보다 너무 미미한 것이 실망스럽군.”

체펠린 비행선이 무슨 모 소비에트가 마치하는 게임에 나오는 떡장갑 괴물 비행선도 아니고, 현실의 한계를 극복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이 소이탄이란 것도 못 쓸 물건이야. 해군과 티르피츠 제독이 떠드는 것과 다르게 실제론 페트로그라드에 고작 모닥불이나 피운 정도 아닌가.”

“뭐, 발트함대를 끌어낸다는 목적은 달성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페트로그라드 공습이 러시아인들에게 가한 심리적 충격은 결코 무시할 만한 게 아니었다.

물론, 킬딸에 미친 효율충 독일인들에겐 심리적 효과고 뭐고 적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파괴하는 것만이 중요한 모양이지만.

‘실제로 체펠린 비행선의 변변찮은 성과는 훗날 루프트바페가 전술공군 위주로 변해 버리는 것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으니.’

정작 원 역사에서 독일의 비행선 폭격으로 인해 정복자 윌리엄 1세 이래 런던이 공격받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영국은 대가리가 깨져서 폭격기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얘네가 얼마나 폭격기에 집착했냐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기어코 영국 본토에서 베를린을 폭격 가능한 핸들리 페이지 폭격기(Handley Page Type O bomber)를 뽑아냈을 정도다.

괜히 전간기에 영국을 중심으로 폭격기 무적론이 나온 것이 아니다.

“그래도 전략폭격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여기기엔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물론 말씀대로 비행선은 그 한계가 너무 명확하긴 합니다만, 고타 사에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 폭격기를 개발 중이기도 하니까요. 기술의 한계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지켜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폭격기 만능론자는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대로 된 전략폭격기 하나 없는 전술 폭격 원툴 공군은 좀 그래.

“으음, 네 말이 그렇다면야. 어쨌든 이젠 발트해에서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만 남았군.”

“예.”

나와 카이저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디 하인리히 왕자가 승전보를 가져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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