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65화 (165/193)

165화 : 알바트로스 작전 (1)

부우우웅───

동프로이센에서 독일 8군과 9군, 러시아 1군이 한창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던 사이, 거친 발트해의 파도를 가르며 수십 척의 크고 작은 함선들이 연돌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앞으로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독일 발트함대.

쓰시마 당하지 않아 전력이 그대로 유지된 러시아 발트함대를 견제하기 위해 창설된 대양함대 다음가는 전력을 지닌 함대였다.

“로이터 함장, 핀란드만 도착까지 얼마나 남았지?”

“3시간 남았습니다, 하인리히 제독님. 참고로 5분 전에도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후후후후, 사소한 것은 신경 쓰지 말게나. 우리 귀여운 아가씨의 첫 데뷔탕트가 너무나도 기대돼서 그런 것뿐이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과 동시에 발트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하인리히 왕자가 팔짱을 낀 채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수상쩍은 미소를 짓자 함장, 루트비히 폰 로이터(Hans Hermann Ludwig von Reuter)는 질린 듯한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그러나 왕자는 로이터가 썩은 눈을 짓는 것에 불구하고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고집 센 티르피츠, 제국 항공대 사령관 폰 회프너와 온갖 신경전을 벌이며 겨우 여기까지 왔다.

이제 남은 것은 친딸과도 같은 이 아가씨의 진가를 모두에게 증명하는 것뿐.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비행기에 올라 독일 해군 항공대의 기념비적인 첫 전투를 앞장서서 이끌고 싶구만.”

“제발 부탁이니 그만둬 주십시오.”

“하하, 농담이네. 농담이야.”

‘농담 아닌 거 같은데…….’

죽은 외삼촌 에드워드 7세 마냥 유쾌하게 웃고 있는 하인리히 왕자를 의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는 로이터 함장.

이 인간을 믿기엔 그동안 당해 온 게 너무나도 많았다.

‘에휴, 어쩌다 내가 이 막무가내 같은 양반이란 엮여선……,’

본래라면 멋들어진 신형 순양전함의 함장이 될 예정이었는데.

로이터는 이 괴짜 왕자에게 끌려와 20기의 함재기를 실은 이 ‘항공모함’이라는 요상한 배의 함장이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 * *

“……후우, 마음에 안 드는군.”

“티르피츠 제독님, 갑자기 무슨 소리십니까?”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동부전선에서의 전투가 막 시작되었을 때.

제독들의 회의에서 해군장관 티르피츠의 무거운 한숨이 울려 퍼졌다.

“육군은 계속해서 성과를 거두고 있는데, 우리 해군은 적 항구만 멍하니 쳐다보거나 잠수함 뒤꽁무니나 쫓고 있지 않은가.”

“그거야 프랑스와 러시아 해군이 항구에 죄다 틀어박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본래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티르피츠는 자신의 인생을 바쳐 만들어 낸 카이저마리네가 드디어 크게 활약할 날이 왔다고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그런 티르피츠의 설레발이 무색하게도 독일 해군이 멋지게 활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협상국 함대보다 절대적인 열세에 처해 있던 프랑스와 러시아 함대가 영독함대와의 정면승부를 포기하고 현존함대 전략이란 이름 아래 항구 안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젠장, 빌어먹을 것들. 도망가지 마! 맞서 싸워!”

덕분에 티르피츠만 닭 쫓던 개가 되어 적 해군을 향해 의미 없는 고함을 내질렀다.

물론, 프랑스 해군과 러시아 해군으로선 당연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프랑스와 러시아가 달라진 역사로 인한 영향으로 원 역사보다 해군 전력이 강화되거나 온존했다 한들 ‘영국과 독일’이라는 사기 조합을 상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프랑스 해안이나 크림전쟁 때처럼 러시아 크림반도에 상륙이라도 합시다!”

“후우……. 적 해안포에 우리 해군 전력을 무의미하게 날려 먹을 생각이 아니라면, 제발 그 입 좀 다무시오. 처칠 장관.”

다만, 티르피츠는 마찬가지로 해군의 활약에 목말라 있던 처칠에 비하면 선녀였다.

덕분에 원 역사와 달리 출신 문제로 성을 마운트배튼으로 바꾸지도 해군경에서 물러나지도 않았던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와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고문역을 맡은 피셔 제독만 처칠의 깽판에 뒷목을 붙잡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영국 해군이나 독일 해군이나 순조롭게 제해권을 장악한 후에는 통상파괴전을 시도하는 동맹국 잠수함들이나 잡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배박이 티르피츠는 처칠처럼 난리를 치진 않았지만, 어렵게 키운 카이저마리네가 제대로 된 활약을 못 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육군도 지상에서 저리 공을 세우고 있는데, 기왕 전쟁이 터진 거 우리 카이저마리네도 육군에 지지 않을 성과를 내야 하지 않겠나?”

“그 제독님의 기분은 이해하지만, 저들이 항구 안에서 나오지 않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지 않습니까?”

“예. 항구에 틀어박힌 적 함대를 공격하려 해도 괜히 접근했다가 해안포나 얻어맞고 말 테고요.”

“그나마 슈페 제독이 지휘하는 동방함대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긴 합니다만…….”

과거 베네수엘라에서 본의는 아니었지만,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의 기념비적인 첫 데뷔전에 참가했던 막시밀리안 폰 슈페는 원 역사처럼 극동에서 독일 동방함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지금은 싱가포르에서 출항한 영국 동양함대와 호주&뉴질랜드 해군, 참전 문제와 관련해 잡음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원 역사처럼 영일동맹을 들먹이며 협상국에 가입한 일본과 함께 극동에서 러시아 해군과 프랑스 해군을 축출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원 역사에서 일본에 칭다오를 빼앗긴 뒤 남아메리카를 거쳐 독일로 돌아가며 영국에 대한 통상파괴전을 벌이던 중 포클랜드 해전에서 전사한 그의 비극적인 운명을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하여튼 슈페는 극동의 가장 큰 위협인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몰아넣은 상태였고, 지금은 일본군이 연해주로 진격해 그들을 항구 밖으로 내쫓길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이 때문에 최재형을 비롯한 연해주 한인 상당수가 정든 제2의 고향을 떠나 몰려오는 일본군을 피해 키아우초우의 자유정부로 피난 오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동방함대의 활약 정도 가지곤 부족하니까 이러는 것 아닌가!”

그러나 티르피츠는 그것만으론 안 된다는 듯 얼굴로 목성을 높였다.

“동아시아 전역은 대전쟁의 승패에 있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오페라 관객들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주연을 향해 있는 법. 그 누가 엑스트라에 신경 쓰겠나?”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대전쟁의 중심인 유럽, 이곳 유럽이었다.

물론, 티르피츠의 말을 머나먼 동아시아에서 조국의 승리를 위해 불철주야로 바다 위를 돌아다니고 있던 슈페와 동양함대 수병들이 들었다면 어이없어하겠지만 말이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네.”

“……예?”

어떻게든 유럽에서 큰 성과를 내야 해군의 면목이 선다는 티르피츠의 외침에 카이저마리네 제독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빠진 사이,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하인리히 왕자가 후후 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었다.

티르피츠는 이 인간이 또 무슨 이상한 짓거리를 하려고 이러는 것인지 머리가 아파 왔다.

“자세히 말해 보시죠.”

그러나 듣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 *

“러시아 발트함대를 공격하겠다고요?”

하인리히 왕자와 티르피츠 제독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영국의 전통적인 우호국이었던 포르투갈이 우리 협상국 편으로 참전하고 싶다고 하길래 이에 대해 논의하느라 바빠죽겠는데, 이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일까?

“설마 발트함대가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아니, 페트로그라드에 직접 들이박겠단 소리는 아니라고 믿겠습니다.”

거긴 크림전쟁 때 영국 해군도 잠깐 깔짝대다가 물러났을 정도로 해안요새로 도배된 곳이다.

나로선 이 두 사람이 영국의 처가 놈처럼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을까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하, 내가 괴짜 소리를 듣는다지만, 그 정도로 미치진 않았다네. 친애하는 조카사위여.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러시아 발트함대를 항구에서 끄집어 내서 함대결전을 벌이자는 소리야.”

“호오.”

확실히 발트해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으면 우리로선 이득이다.

현재 대양함대 일부를 나누어 원 역사에선 소함대에 불과했던 발트함대를 상당히 대규모로 편성한 상황인데, 러시아 발트함대를 쓰시마 해버리면 전력 상당수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을 테니까.

‘가령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이탈리아를 압박하기 위해 지중해로 보낸다든가.’

게다가 육군의 작전을 지원하는 의미도 있고, 발트함대를 섬멸하면 러시아 제국을 내부에서 무너트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말이다.

결국, 하인리히 왕자의 구상이 정말 성공한다는 가정의 이야기지만.

“뭐, 우리 왕자님은 그냥 자신의 항공모함이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지만 말일세.”

내가 하인리히 왕자의 계획이 현실성이 있는지 천천히 검토하는 사이 티르피츠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진짜입니까?”

“뭐, 겸사겸사 아니겠나. 겸사겸사.”

에휴, 우리 처숙부님이 그러면 그렇지.

난 솔직히 하인리히 왕자가 독일 버전 진주만 공습을 찍겠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리지만.

하지만 그만큼 왕자가 비행기와 항공모함에 가진 애정은 뭐랄까, 일종의 집착과 광기에 가까웠다.

3년 전쯤에 티르피츠가 하인리히 왕자의 항공모함 건조 계획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을 땐 진짜…… 도저히 내 입으론 설명하지 못하겠다.

그저 그날 이후로 티르피츠 제독이 하인리히 왕자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렸다는 것만 알아 둬라.

‘물론, 왕자에게 항공모함 이야기를 꺼낸 게 다름 아닌 나이긴 한데.’

나 또한 미래엔 어차피 전함은 사장되니까 이제부턴 항모를 만들자 같은 미친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영국의 퓨리어스(HMS Furious)나 일본의 호쇼(鳳翔)처럼 미래 항공모함 발전의 토대를 만들고, 항모 운용에 대한 경험을 쌓기 위한 실험용 항모를 하나 만들면 어떻겠나 싶은 거였지.

굳이 새로 건조할 필요도 없이 그냥 미국 최초의 항공모함인 랭글리(USS Langley)처럼 적당한 석탄 운반선 하나를 개조해도 충분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해군 내의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내가 타협안을 내놓자 하인리히 왕자와 티르피츠 제독 또한 극적인 합의를 이루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인리히 왕자가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전하, 갑판 아래 격납고를 만들고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면 항공기를 더 실을 수 있지 않을까요?”

“오, 좋은 아이디어군. 채용!”

“미국에서 ‘캐터펄트’라는 항공기 사출 장치가 개발되었답니다. 이를 우리 항공모함에 도입하면 어떨까요?”

“흐음, 복엽기는 가벼워서 굳이 필요는 없을 것 같긴 한데 없는 것보단 낫겠지. 채용!”

하인리히 왕자는 해군 내에 몇 없는 비행기 애호가(티르피츠 제독은 이들을 비행기에 미친 괴짜들이라고 불렀다)들을 데리고 자신이 직접 항공모함 건조를 진두지휘했다.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내가 따로 조언할 필요도 없겠더라.

그리고 그렇게 1912년, 세계 최초의 항공모함인 SMS 오토 릴리엔탈(SMS Otto Lilienthal)이 탄생했다.

참고로 왜 오토 릴리엔탈의 이름이 붙였냐면 독일 항공계의 발전을 주도한 라이트 형제가 아무래도 미국인이다 보니, 그 반대급부로 항공기의 선구자이자 ‘독일인’인 오토 릴리엔탈이 영웅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체펠린 백작이야 아직 살아 있어서 그가 죽은 다음이면 모를까 지금은 그의 이름을 붙이기가 애매했고.

하인리히 왕자는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싶던 모양인데, 그의 이름이 붙은 동명의 함선(SMS 프린츠 하인리히)이 이미 있는 상황이라 이것도 무리였다.

“그나저나 고작 항공모함 한 척으로 크론슈타트에 주둔 중인 러시아 발트함대를 공습한다는 미친 생각을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어떻게 해서 그들을 밖으로 끌어낼 생각이십니까?”

“리가와 헬싱키를 비롯한 러시아 항구들을 공격해 러시아 제국을 도발할 생각이네. 러시아 발트함대 사령관인 에센 제독은 오랜 해군 명가 출신의 유능한 제독이지만, 내가 아는 니키는 발트해의 항구들이 계속 공격받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정도로 인내심이 깊지 않거든.”

그러니까 러시아 제국을 계속 도발해서 발트함대가 바다로 나올 수밖에 없도록 정치적 압박을 가하겠다?

나쁘진 않은 생각이다.

“다만, 제 생각엔 그 정도론 부족합니다. 차르가 얼마나 우유부단한 인물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페트로그라드가 직접적으로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 이상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아, 하긴. 언제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머뭇거리는 게 니키니.”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페트로그라드와 크론슈타트를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것은 무리일세.”

티르피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항구들은 해안방어가 약해서 공격해 볼 만하지만, 적의 심장부인 페트로그라드는 대양함대를 끌고 와도 무리였으니까.

“바다가 안 된다면 다른 방향으로 공격해야죠.”

“아. 그러고 보니 우리에겐 그게 있었군!”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하자 하인리히 왕자와 티르피츠가 무슨 소리인지 알았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러시아 발트함대를 섬멸하기 위한 알바트로스 작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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