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63화 (163/193)

163화 : 마주리안 호수 전투 (3)

“……지금 뭐라고 했나?”

러시아 북서전선군 사령관, 야코프 질린스키는 지금 자신이 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냐는 멍청한 얼굴로 참모들을 향해 되물었다.

그러나 참모들은 자신들도 말하기 힘들다는 듯 참담한 표정으로 넋이 나간 사령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메멜에 야전군 규모의 독일군이 상륙했습니다. 정찰병들의 보고에 따르면 제1군의 후방을 노리는 듯합니다.”

“어엌……!”

질린스키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뒷목을 붙잡았다.

동프로이센 진격에 혈안이 되어 메멜을 방치한 대가였다.

물론, 러시아인들도 이에 대해선 할 말이 많았지만 말이다.

우선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메멜 자체가 주 진격로와 많이 떨어진 상당히 애매한 위치에 있었고, 러시아에 있어 메멜을 점령에서 얻을 이익보다 메멜을 공격함으로써 입을 손해가 더 컸기 때문이다.

항구는 바다로 나갈 수 있어야 그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발트해의 제해권은 독일 발트함대가 전쟁 시작부터 장악한 상황이었고, 메멜을 점령해 봤자 얻을 이득도 없는 이상 러시아군이 굳이 메멜을 공격할 이유도 없었다.

이는 원 역사에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아 러시아군은 1915년 초에 메멜을 며칠 동안 점령하고 물러난 것에 그쳤다.

다만, 러시아군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못 버린다고, 그 며칠이란 시간 동안 자신들에게 저항하려 했다는 명분으로 메멜에서 민간인 학살과 약탈 파티를 벌였지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하지만 질린스키에게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철군 준비를 시작한 1군의 후방에 적군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대체 네놈들은 독일군이 메멜에 상륙하는 동안 뭘 한 거야. 그냥 구경이나 한 건가?!”

“사령관님, 하지만…….”

“이 무능한 놈들! 쓸모도 없고, 아까운 식량이나 축내는 쥐새끼 같은 놈들!”

러시아 참모들이 뭐라 변명하려 했지만, 질린스키는 머리끝까지 분노하며 독일군이 후방에 상륙하는 것을 눈뜨고 지켜본 무능한 부하들을 향해 욕설과 고함을 있는 대로 쏟아 냈다.

물론, 순식간에 질린스키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 참모들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지만.

그도 그럴 게 대체 자신들이 독일군이 메멜에 상륙할지 어떻게 알았겠나?

항공 정찰은 독일군 비행기 때문에 시도도 못 하는 중이고, 독일 해군을 견제해야 할 발트함대는 크론슈타트에 틀어박힌 상태인데!

“병력! 독일군을 막을 병력이 필요해!”

하지만 질린스키는 후방에 적이 상륙했다는 최악의 상황에 눈이 돌아가 부하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붙잡고 지혜를 짜내는 사이, 독일 9군은 이미 네만강을 건너 러시아 1군의 후방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 * *

쾅! 콰광!!

1913년 8월 30일.

러시아 1군의 엉덩이를 노리는 독일 9군에 호응하기 위해 독일 8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모두 준비!”

디트리히와 그의 부대원들 또한 참호 안에 쭈그려 앉아 조마조마한 얼굴로 장교들의 돌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삐이이이이이───!

“돌격어억!!”

“와아아아아아아──!!”

이윽고 장교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짐과 동시에 거대한 함성과 일며 독일군 병사들이 일제히 참호 밖으로 뛰어나가 러시아군을 향해 달려 나갔다.

디트리히 또한 총을 놓칠세라 손아귀에 힘을 잔뜩 쥐고 함성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 내며 앞으로 미친 듯이 내달리고 또 내달렸다.

타다다다다! 타다다다다다!

“으아앜!”

“엎드려!”

그러나 독일군의 포격은 참호 안의 러시아 병사들을 완전히 지워 버리지 못했다.

살아남은 러시아 병사들은 서둘러 맥심 기관총의 러시아 버전인 PM M1910 중기관총을 붙잡았고, 돌격해 오는 독일군 병사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독일 병사들은 종잇장처럼 순식간에, 그리고 너무나도 쉽게 죽어 갔다.

디트리히는 운이 좋게도 날아오는 총알을 피해 포격으로 생긴 구덩이 안에 급히 몸을 숨긴 덕에 무사할 수 있었지만, 디트리히의 부대원 몇은 운이 좋지 못했다.

“커헉!”

“마테우스!”

지금까지 동고동락해 온 부대원 하나가 목에 총알을 맞고 바닥에 쓰러진다.

함께 싸워 온 8군 전우들이 내장을 흩뿌린 채 땅바닥을 굴러다닌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기관총은 냉혹한 기계처럼 계속해서 불을 뿜어 댔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디트리히는 벌써 이 광경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우우우웅──

디트리히가 구덩이에 엄폐해 거친 숨을 내쉬는 사이 머리 위에서 익숙해진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독수리들.

독일 제국 항공대의 전투기들이다.

“#@$^#!!”

디트리히가 고개를 들어 멍하니 형형색색의 비행기들을 바라보는 사이 러시아 병사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그의 고막을 때렸다.

디트리히는 고개를 밖으로 살짝 내밀었다.

휘이이잉───쿠웅!

독일 전투기들이 참호 안 러시아군의 정신을 쏘옥 빼놓기 위해 기관총을 갈기고, 로켓을 쏘고, 폭탄을 떨어트렸다.

“와아아!”

“엉덩이 무거운 파일럿 나으리들이 납셨다!”

“공격! 공격!”

러시아 병사들이 혼란에 빠지고, 기관총 소리 또한 덩달아 잦아들자 여기저기서 환호 소리와 함께 독일군 병사들이 다시 러시아군 진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디트리히 또한 구덩이를 기듯이 빠져나와 침묵에 빠진 러시아 참호를 향해 달렸다.

“으윽…….”

그때 러시아 참호 안에서 앓는 소리와 함께 러시아 병사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달려오는 디트리히를 보자마자 서둘러 기관총을 잡으려고 했지만,

탕!

디트리히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더 빨랐다.

러시아 병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고꾸라졌고, 마찬가지로 살아남은 이름 모를 병사 하나가 디트리히를 향해 잘했다며 씨익 웃어 보이곤 묵직한 러시아 기관총을 뒤로 엎어 버렸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독일군 병사들이 하나둘씩 참호로 뛰어들어 정신을 못 차리는 러시아군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병사 중 상당수는 반격하려 하다가 개머리판과 야전삽에 머리를 얻어맞고 뇌수를 흩뿌리며 쓰러지거나 기관단총에 벌집이 되어 사망했고, 이대로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았던 이들은 제발 살려만 달라는 얼굴로 무기를 던지고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총성이 잦아들었고, 남은 것은 포로로 잡힌 채 터덜터덜 걸어가는 러시아군과 전장 여기저기를 굴러다니고 있는 시체들뿐이었다.

“후우……, 오늘도 어찌어찌 살아남았구만.”

신체와 정신 두 쪽 모두 지친 디트리히는 참호에 걸터앉은 채 수통을 꺼내 흙먼지가 잔뜩 묻은 얼굴에 물을 흩뿌렸다.

그때 그의 옆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헉……. 디트리히 아저씨!”

“볼프, 무사했구나!”

돌격이 시작되고 헤어진 볼프가 조금 지치긴 했어도 해맑은 얼굴로 다가오자 디트리히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볼프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총알은 계급도 나이도 가르지 않으니까.

잔혹하지만, 그것이 디트리히가 전쟁에서 보아 온 현실이었다.

“이번엔 힘들었네요. 마테우스 아저씨도 죽고…….”

“아군이 이반 놈들 후방을 공격하고 있다지 않냐. 녀석들도 절박한 거겠지.”

쥐가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도 무는 법, 러시아군이라고 별반 다를 바는 없었다.

다만, 볼프는 러시아군의 상황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호숫가에서의 전투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란다는 표정이었지만.

“러시아인들이 얼른 이대로 도망치든 항복하든 했으면 좋겠네요.”

“뭐, 곧 결과가 나겠지.”

디트리흐는 품속에서 아껴 두었던 담배를 꺼내며 입에 물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전투의 결과가 나오는 것은 그리 머지않아서였다.

* * *

“끝이군.”

렌넨캄프는 이젠 화낼 기운도 없다는 듯 축 처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후방에서 독일군이 나타남과 동시에 독일 8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아슬아슬하던 방어선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러시아군은 인슈터부르크를 잃었고, 렌넨캄프는 참모들과 함께 굼빈넨을 빠져나와 서둘러 퇴로에 올랐다.

본래 계획했던 질서정연한 퇴각이 아닌 정신없이 허겁지겁 도망치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리고 그것은 렌넨캄프의 주변에서 힘없이 터덜터덜 걷고 있는 러시아군 병사들의 모습에서 잘 나타나고 있었다.

“부관, 독일군은 어디까지 왔다고 하던가?”

“죄송합니다, 장군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찰병들을 보냈지만, 그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어서…….”

“독일군에게 당한 모양이군.”

아니면 탈영했거나.

사실 확률은 후자가 더 높을 것 같았지만, 렌넨캄프는 굳이 그 사실을 입에 담지 않았다.

이를 인정해 버렸다간 가뜩이나 참담한 기분이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기에.

부우우우웅───

“적 비행기다!”

“모두 엎드려!”

렌넨캄프가 우울한 얼굴로 무거운 한숨을 내쉴 때, 이젠 진저리가 날 것만 같은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또’ 독일군 비행기들이 나타났다.

독일 제국 항공대에 너무 참교육을 당한 나머지 트라우마에 걸려 버린 러시아 병사들이 대열을 이탈하며 급히 땅바닥에 엎드렸다.

부우우우웅─

“?”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 파일럿은 러시아군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기총을 쏘지도, 폭탄과 수류탄을 떨구지도 않은 채 러시아군의 머리 위를 유유히 지나가며 다시 기수를 위로 올렸다.

“날아다니는 프로이센 돼지 새끼들이 이젠 아예 우릴 가지고 노는군.”

렌넨캄프와 러시아 병사들은 지금만큼은 신분과 계급을 잊고 하늘 저편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독일군 비행기에 이를 갈았다.

그러나 눈물이 앞을 가리다 못해 이젠 메말라 붙을 정도로 현실은 암담했다.

러시아군은 퇴각을 위해 대포는 물론, 보급품 대다수를 버리고 오느라 소총의 탄약조차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분노의 반격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렌넨캄프는 아까보다 더욱 무거운 한숨을 내쉰 채 병사들에게 다시 이동하라 명했다.

그러나 그의 수난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 * *

“피우수트스키 장군님, 전방 30분 거리에서 이동 중인 러시아군을 발견했습니다!”

“이동 방향은?”

“남동쪽입니다.”

“퇴로로 후퇴 중인 모양이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평범한 부대가 아닌 것 같습니다.”

9군과 함께 메멜에 상륙 후 대다수가 기병대인 폴란드 군단을 이끌고 별동대로 활동 중이던 피우수트스키는 정찰병의 말에 더 말해 보라는 듯 귀를 기울였다.

“일단 적의 규모부터가 심상치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많아 봐야 수백에서 수천이었는데, 지금 후퇴 중인 러시아군은 족히 만은 넘어 보였습니다.”

“만이라고? 설마 렌넨캄프의 본대인가?”

누군가의 말에 피우수트스키를 따라 폴란드 군단에서 종군 중이던 폴란드 장교들이 웅성거렸다.

만약 지금 눈앞에서 이동 중인 것이 정말 렌넨캄프의 러시아 1군 본대라면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전후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라도 지금 폴란드 군단은 최대한 많은 공적을 쌓을 필요가 있었고, 적 사령관만큼 좋은 공적은 없었으니까.

“운이 좋으면 렌넨캄프를 사로잡거나 끝장낼 수 있겠군.”

피우수트스키는 입맛을 다시며 말고삐를 강하게 붙잡았다.

“독일인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좋은 기회다. 이걸 놓치고 싶은 자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가자, 폴란드의 아이들이여! 이럇!”

피우수트스키와 폴란드 군단은 험악하게 이빨을 드러내며 렌넨캄프의 본대로 추정되는 부대를 향해 고삐를 붙잡고 말을 몰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후퇴 중인 러시아 부대를 발견한 것은 폴란드 군단뿐만이 아니었다.

“마켄젠 장군님. 항공대에서 이동 중인 러시아군을 발견했다는 보고입니다. 규모나 군기로 봤을 때 렌넨캄프의 본대로 파악됩니다.”

“호오,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아니 그런가, 젝트?”

“물론입니다. 장군님!”

눈을 빛내는 마켄젠의 말에 그의 참모장이자 영원한 콤비, 한스 폰 젝트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군단의 기병대를 모두 집합시켜라. 수가 부족하다면 게으름 피우고 있는 귀족 애송이들도 말을 태워! 우리는 지금부터 렌넨캄프의 목을 가지러 간다!”

마켄젠이 어깨에 걸친 외투를 펄럭이며 명령하자 젝트와 참모들은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말없이 경례를 올렸다.

자신들 17군단이 8군 중 가장 큰 공훈을 세울 기회를 놓칠 수야 없었다.

그렇게 마켄젠의 독일 기병대와 피우수트스키의 폴란드 기병대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마주리안 호수지대를 질주했다.

“에취!”

그러나 집 나와 개고생인 중인 렌넨캄프는 그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