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 미주리안 호수 전투 (2)
콰광! 쾅!
“카이저 만세!”
“Los! Los! Los!”
1913년 8월 26일.
러시아 제1군에 대한 독일 제8군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미주리안 호수지대 남쪽에서 러시아군을 향해 공세를 펼친 독일군은 매서운 포격과 함께 돌격대를 앞세워 적 방어선 곳곳을 타격했다.
타다다다다다!!
“쏴! 쏴! 프리츠 놈들을 보이는 모조리 쏴 버려!”
“탄약 별로 없는데, 이래도 괜찮아?”
“젠장, 알 게 뭐야. 삼소노프 꼴 나기 싫으면 일단 저 새끼들부터 막고 봐야지!”
그러나 렌넨캄프의 1군은 삼소노프의 2군과 달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2군의 희생 덕에 1군은 독일군의 공세에 맞서 대비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으니까.
“공격! 공격!”
“22군단 전진! 삼소노프 장군과 2군의 원한을 갚자!”
또한, 1군은 2군과 달리 혼자가 아니었다.
독일 8군이 러시아 1군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자 바실리 예고로비치 플루크 대장의 지휘 아래 국경 쪽에서 대기 중이던 러시아 제10군과 타넨베르크에서 살아남은 2군 잔당들이 8군의 우측 측면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 10군은 전쟁이 터지자 예비군을 긁어모아 급히 편성한 부대라 사단 수는 6개 밖에 없었지만, 1군을 지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움직였고, 휘하의 22군단을 선봉으로 삼아 8군의 측면을 찔러 들어갔다.
“러시아 10군이 걸리적거리는군. 루덴도르프 소장.”
“예, 황태자 전하. 겁 모르고 나타난 러시아 10군에게 현실의 쓴맛을 보여 주겠습니다.”
그러나 렌넨캄프와 러시아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엔 너무 일렀다.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훤히 파악하고 있던 루덴도르프는 이미 10군이 자신들의 측면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22군단이 진격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군 제3 예비사단이 화끈한 화력 지원을 등에 업고 러시아 10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다.
요하니스부르크(Johannisburg, 오늘날의 피쉬)을 점령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던 22군단에겐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인 사태였다.
쾅! 콰쾅!!
“브링켄 장군님, 아군을 향해 독일군의 포격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라면 아군의 피해가 너무 커질 것입니다.”
“으음……. 독일군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빨라도 너무 빠르군. 이래서야 이 이상의 진격은 어려운가. 부관, 플루크 대장님께 전령을 보내라. 여기선 일단 방어선으로 물러나야 한다.”
“옛, 장군님!”
이래서야 요하니스부르크를 점령하는 것은 고사하고, 역으로 독일군에게 당하게 생겼다.
이 이상 공세를 이어가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한 제22군단 지휘관 알렉산드르 프리드리히비치 폰 덴 브링켄(Александр Фридрихович фон ден Бринкен)은 곧장 플루크에게 퇴각을 요청했다.
“후퇴라고? 공격을 시작한 지 아직 하루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후퇴란 말인가! 게다가 여기서 물러나는 것은 1군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플루크는 브링켄의 퇴각 요청을 듣자마자 노발대발하며 절대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22군단이 후퇴하면 22군단과 10군은 무사할 것이다.
그러나 독일군에게 사정없이 두들겨 맞고 있는 1군의 상황은 악화할 것이고, 이는 10군이 이곳에 온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브링켄에게 똑똑히 전해라. 후퇴는 없다. 끝까지 싸워라!”
결국, 플루크는 브링켄에게 퇴각하지 말고 계속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독일군을 몰아내고 1군을 계속 지원하라고 말이다.
물론, 플루크의 명령을 전달받은 브링켄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다.
“하! 플루크 대장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군!”
“장군님,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계속 퇴각 요청을 보내라. 이대로 전투를 지속해 봤자 군단의 전투력만 깎아 먹는 꼴이다.”
그리고 22군단이 만신창이가 되면 오히려 1군을 돕는 것은 더욱 요원해진다.
브링켄이 생각하기에 여기서 최선은 후퇴하고 재정비를 한 뒤에 다시 공세에 나서는 것이었다.
물론, 1군이 그때까지 버텨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플루크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고, 그렇게 22군단과 10군 사령부의 기 싸움이 계속되는 사이 독일 3예비사단은 22군단을 몰아내고 요하니스부르크를 지키는 것에 성공했다.
“36예비사단! 우리는 지금부터 3예비사단과 함께 저 스키타이 침략자 놈들을 국경 너머로 몰아낸다!”
“야볼!”
독일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요하니스부르크 탈환과 동시에 독일 제36 예비사단이 공세에 합류, 제3 예비사단과 함께 22군단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3예비사단 하나만도 벅찬데 36예비사단까지 나타나니, 브링켄이 아무리 용을 써도 버티기는 힘들었다.
브링켄은 제발 후퇴하게 해달라며 계속 전령을 보냈고, 22군단의 피해가 점점 커지자 플루크도 이쯤 되면 제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후우……. 질린스키 사령관께 22군단의 퇴각을 건의하도록 하지.”
부대 자체가 급하게 편성된 터라 타군보다 전력이 부족한 10군이다.
여기서 아까운 군단 하나를 잃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8월 26일, 22군단은 후방의 아우구스투프(Augustów)로 물러났다.
“10군이 물러나? 지금 장난치나!”
렌넨캄프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렌넨캄프 사령관님! 큰일 났습니다! 대규모 독일군이 쾨니히스베르크 방면에서 나타났습니다. 현재 우리 군의 측면으로 진격 중입니다!”
“뭐라고?!”
독일군이 어디서 나타났다고?
남쪽 미주리안 호수 지대가 아니라 서쪽 쾨니히스베르크?
“말도 안 돼. 지금 독일군은 남쪽을 공격하고 있지 않나! 설마 적의 증원인가?”
“그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독일 8군은 병력을 나누어 일부 병력이 남쪽에서 시선을 끄는 사이 본대를 우회시켜 쾨니히스베르크 방면으로 재배치한 모양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빨리 기동하는 게 말이 되나?!”
“동프로이센 전역에 깔린 독일의 철도망 대부분이 온전한 상황입니다. 아마도 이를 이용했으리라고…….”
철도뿐만이 아니었다.
독일군은 철도뿐만 아니라 대량의 트럭들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빌헬름 황태자와 루덴도르프는 러시아군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군을 움직일 수 있었고, 이는 타넨베르크 전투 당시 빠른 기동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렌넨캄프와 러시아 1군으로선 비명을 지를 일이었지만.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군은 독일군이 남쪽에서 오리라 예상하고 병력과 방어선도 죄다 남쪽에 배치한 상황이었다.
그만큼 쾨니히스베르크 방면의 방어선은 허술해진 상태.
“젠장, 안 돼! 안 돼─!!”
렌넨캄프는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트리며 절규했다.
저 멀리서 삼소노프의 유령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 * *
드르르륵! 드르르르륵!!
“이반 새끼들을 모조리 죽여 버려!”
“돌격! 돌격!”
쾨니히스베르크 방면에서 나타난 독일 8군의 공세는 그야말로 쾌 진격이었다.
독일군은 돌격대를 대량으로 투입해 포격으로 엉망이 된 러시아군 방어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기 시작했고, 러시아 1군은 10군의 후퇴까지 겹쳐 순식간에 인슈터부르크(Insterburg, 오늘날의 체르냐홉스크)까지 밀려났다.
“……렌넨캄프 사령관님. 이젠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사령부 내에서 참모들의 음울한 목소리에 그 어느 때보다 초라해 보이는 렌넨캄프가 어깨가 축 처진 채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제2군처럼 서쪽과 남쪽에서 몰려오고 있는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숨통이 끊어지리란 건 자명한 일.
그렇기에 1군 참모들은 렌넨캄프에게 하나 같이 퇴각할 것을 간언했다.
“적은 이미 굼빈넨의 코앞인 인슈터부르크까지 진격해 왔습니다. 물론 그곳에 2차 방어선에 있다 하나 적의 막강한 포병 전력과 기관단총을 앞세운 적의 침투 부대에 얼마 가지 않아 돌파당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렌넨캄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9년 전의 러일전쟁에도 참전한 렌넨캄프다.
그는 압록강과 랴오둥반도에서 기관단총이 무슨 활약을 했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
물론, 러일전쟁의 경험으로 기관단총이 좋은 무기인 것을 알고 있긴 해도 기본 무기인 소총조차 부족해 병사들에게 창과 몽둥이를 들려 주는 러시아군에게 막대한 탄약 소모량을 자랑하는 기관단총은 그림 속의 떡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독일군이 하버-보슈법이란 치트키로 탄약 걱정은 하지도 않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리는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미 전방 사단들이 안그라파(Анграпа) 강 너머로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남쪽의 독일군 또한 북상하는 상황. 여기서 머뭇거렸다간 아군의 퇴로가 끊길 것입니다.”
“예. 2군에 이어 우리 1군까지 무너진다면 전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될 게 분명합니다. 서둘러 국경 너머로 후퇴해 재정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동프로이센을 버릴 순 없네.”
그러나 렌넨캄프는 멘탈이 나가서인지 아직도 절망 속에서 헛된 희망을 찾는 중이었다.
물론, 참모들로선 그런 사령관이 답답할 뿐이었다.
“10군은 잠깐만 물러난 것뿐이야. 재정비를 마치면 곧 다시 공세에 나서겠지. 그러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10군이 재정비를 마치기 전에 우리 1군이 먼저 무너질 것입니다! 이미 독일군은 인슈터부르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슈터부르크가 무너지면 다음은 이곳 굼빈넨입니다!”
이미 1군에게 동프로이센 점령지를 지킬 여력은 없었다.
게다가 간신히 유지되던 병사들의 사기도 전황이 독일군에 유리하게 돌아가자 자신들도 곧 2군처럼 전멸할 것이라는 공포에 바닥을 치기 시작한 상황.
“질린스키 사령관께서는 후퇴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네.”
“지금은 우선 살아남아야 할 때입니다. 1군의 전력을 최대한 온존해야 다음을 기약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끄으응…….”
후퇴 말곤 답이 없다는 참모들의 아우성에 렌넨캄프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대로 겁쟁이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치긴 싫었지만, 그렇다고 삼소노프처럼 미련하게 죽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후우……. 전군에 철군 명령을 내려라. 계속 반격을 시도하면서 차례대로 후퇴해 전력을 최대한 온존한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긴 고민 끝에 나온 렌넨캄프의 선택은 생존이었다.
물론, 모가지가 간당간당한 상태인 질린스키는 이게 무슨 짓이냐며 날뛰겠지만.
그러나 이대로 병사들을 모두 잃고 돌아가 봤자 차르의 분노에 직면한 뒤 군사 법정으로 직행할 게 분명했던 만큼, 일단 후퇴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이 더 나았다.
‘솔직히 말해 질린스키에게 지킬 의리도 없고.’
그러니 일단 살고 보자.
살아남아야 나중에 다시 기회든 뭐든 생길 테니까.
* * *
“방금 8군으로부터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렌넨캄프가 동프로이센에서 도망치려 한다는군요.”
“조금만 더 버텨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상황이 다급해졌습니다그려.”
“그래도 늦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독일 제9군 사령관,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Emil Gottfried Hermann von Eichhorn)은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군 경력이 무려 보오전쟁 때부터 시작된 이 사람 좋은 노장은 원 역사에선 1914년 5월 낙마 사고로 인해 1915년이 돼서야 전장에 발을 들이지만, 여기선 세계대전이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전쟁이 터지고 신설된 9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나저나 폴란드 기병대라. 이거 나폴레옹 전쟁 때로 돌아간 기분이군요, 피우수트스키 장군. 아, 물론 그때 우리는 서로 적이었습니다만.”
“세월이란 그래서 무섭지요. 한때 적이었던 이들이 이렇게 손을 맞잡게 되는 일도 생기니 말입니다.”
“하하하하! 그 말이 맞습니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아이히호른의 웃음을 배경 삼아 저 멀리 보이는 항구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이날이 왔다.
수백 년간 이어진 러시아 제국의 압제 아래서 신음을 흘리던 폴란드가 발목에 묶인 족쇄를 끊고, 붉은 석양 속을 날아가는 흰 독수리처럼 다시금 비상할 날이.
“아이히호른 사령관님. 곧 메멜에 도착합니다.”
“음, 슬슬 하선 준비를 해야겠군요. 폴란드 군단은 준비가 되었습니까?”
“물론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1815년 바르샤바 공국이 멸망한 이래 백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날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거 든든하군요.”
투지를 불태우는 피우수트스키의 말에 아이히호른은 고개를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다른 프로이센 융커 장군들 같았으면 피우수트스키를 무시하거나 오만하게 굴었겠지만, 아이히호른은 달랐다.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근무하던 시절, 프로이센 싫어하던 프랑크푸르트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을 정도로 프로이센식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그렇기에 한스도 피우수트스키를 그에게 붙여 둔 것이지만.
그렇게 든든한 노장과 함께 갑판 위에 선 피우수트스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사랑하는, 폴란드여. 기다려라.
우리가 곧 돌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