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61화 (161/193)

161화 : 미주리안 호수 전투 (1)

“2군이 벌써 무너졌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1913년 8월 24일.

러시아 북서전선군 사령관 야코프 질린스키는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듯 핏발선 눈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독일군의 포위망을 뚫고 사령부로 연달아 달려오는 2군 전령들의 보고에 뒤늦게나마 렌넨캄프에게 2군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린 게 다름 아닌 바로 어제다.

그런데 그새를 못 버티고 단 하루 만에 2군이 날아가 버려?

23만에 달하는 대병력이 16만조차 안되는 독일군 1개 야전군에게 전멸했다 그 말인가?

“삼소노프 이 빌어먹을 똥 멍청이는 대체 무엇을 한 거야! 무엇을 하면 고작 며칠 만에 20만을 날려 먹을 수 있어!”

“그, 그게…… 삼소노프 장군은…….”

사령관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참모들이 이걸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말을 버벅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군이 조금 전 자랑스럽게 공표한 전과에는 러시아 2군의 반이 죽고 나머지 반은 포로로 잡혔다는 충격적인 소식 말고도 제2군을 이끌던 삼소노프의 최후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삼소노프 장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뭐?”

누군가가 눈을 질끈 감고 내뱉은 진실에 질린스키는 그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삼소노프가 죽어? 그것도 자살했다고?”

“예……. 독일군이 권총으로 자결한 삼소노프 장군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거짓 정보일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애초에 독일군이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요.”

“제기랄…….”

삼소노프가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날렸다는 말에 질린스키는 얼굴을 구기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죽은 이상 질린스키가 2군의 전멸에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더는 삼소노프를 비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솔직히 삼소노프가 자살을 택한 것은 2군을 제때 지원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도 있었으니까.

물론, 질린스키가 그 책임을 진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지만.

“독일군의 공세로부터 살아남은 2군 병사들의 수는 얼마나 되나?”

“1만이 조금 안 됩니다. 세르게이 셰이데만(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Шейдеман) 장군이 어떻게든 이들을 추스르고 있습니다만…….”

그마저도 뿔뿔이 흩어지거나 탈영이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중이었다.

“후우……. 셰이데만에게 어떻게든 병력을 재집결시켜서 1군 지원에 나서라고 해.”

“예.”

독일군의 무자비한 공격으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2군 병사들에겐 가혹한 일이었지만, 2군이 무너진 이상 독일군이 노릴 것은 1군이다.

그리고 1군까지 무너지면 제2군이 전멸하면서 전력의 3분의 1이 넘는 병력이 날아간 상태인 북서전선군의 야심에 찬 동프로이센 공세는 그날로 끝이다.

질린스키의 모가지도 함께 말이다.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다.

“그리고 바실리 플루크(Василий Егорович Флуг)에게 10군을 이끌고 서둘러 렌넨캄프의 측면을 지원하라고 하도록.”

“예, 사령관님.”

참모들이 경례를 올리며 빨리 이 불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서둘러 사령부를 빠져나가자 지친 얼굴의 질린스키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담배를 입에 꼬나물었다.

“제기랄, 이 소식이 스타프카(Ставка, 최고사령부)에 전해지면 차르께서 나를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차르가 아무리 사람이 좋아도 패전을 봐주진 않는다.

그것이 두고두고 회자 될 대참패라면 더더욱.

그러니 질린스키로선 여기서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그들이 전과를 확대하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패배를 만회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 * *

덜컹덜컹─

“전투가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다음 전투라니. 이틀 정도만 더 쉬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걱정하지 마라, 볼프. 굼빈넨에 있는 러시아 놈들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동프로이센에서 쫓아내면 당분간 싸울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랬으면 정말 좋겠네요. 디트리히 아저씨. 시체는 이제 지긋지긋해요.”

1913년 8월 25일, 동프로이센 에일라우(Eylau) 인근.

트럭을 타고 부대원들과 함께 새로운 전장으로 이동 중이던 디트리히는 부대원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볼프의 말에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었음에도 낯빛은 상당히 어두웠다.

디트리히 역시 아군이 대승을 거둬 전투에서 살아남은 것은 좋았지만, 습지대와 숲을 가득 메운 러시아군의 시체들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불전쟁에 참전한 아버지가 매일같이 자랑하듯 들려주던 전쟁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 광경들.

지금까지 전쟁과는 먼 세상에서 살아왔던 디트리히에게 있어선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아니리라.

“통신대 애들에게 들었는데, 서부전선은 여기보다 더 심하대. 거긴 전선 전체가 기관총이랑 참호로 도배돼서 매일 같이 수천씩 죽어 나간다더라.”

“으, 동부전선에 배치돼서 다행이네.”

동부전선의 러시아군은 기관총은 고사하고 소총조차 부족해서 몽둥이와 도끼를 든 병사들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디트리히는 흔들리는 트럭 안에서 눈을 감고 자신의 운에 감사했다.

“저길 봐, 마을이다.”

누군가의 말에 트럭에 타고 있던 병사들이 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디트리히도 보았다.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그다지 좋은 상태는 아닌 모양이었지만.

“나 저기 어딘지 알아. 압슈방겐(Abschwangen, 오늘날의 티시노)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할아버지가 근처에 사셨거든.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적어도 전쟁은 보지 않고 돌아가셔서 다행이지 뭐.”

그 말에 디트리히와 그의 동료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고향이 적군에게 짓밟히고 불태워지는 것을 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닐 테니까.

“모두 정지!”

병사들이 수다를 떠는 사이, 중대장의 명령과 함께 트럭 행렬이 압슈방겐 앞에서 정지했다.

“다들 내려서 마을을 수색한다. 러시아군은 이미 마을을 버리고 후퇴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을 테니.”

“알겠습니다. 하인리치 중위님.”

상관이자 훗날 제2차 세계대전 독일 명장 중 한 명이 되는 고트하르트 하인리치(Gotthard Fedor August Heinrici) 중위의 말에 디트리히는 총을 챙기고 부대원들과 함께 트럭에서 내려 어쩐지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압슈방겐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은 보이지 않네요.”

“다들 피난 갔겠지.”

실제로 동프로이센 일대는 러시아군이 오기 전에 대대적인 피난령이 내려진 지 오래였다.

물론, 평생 살아온 고향을 버릴 순 없다며 피난 가지 않고 남아 있던 사람들도 상당수였지만, 적어도 이 마을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일단 흩어져서 둘러보자.”

“네, 디트리히 아저씨.”

디트리히는 볼프와 헤어져 마을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마을 건물들이 죄다 새까맣게 탄 것을 제외하면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이반 새끼들이 도망치면서 불이라도 지른 모양이네.”

“약탈할 게 없으니까 애꿎은 마을에 화풀이라도 한 모양이지.”

옆에서 러시아군에 대한 욕을 내뱉는 부대원들의 말에 디트리히도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비롯한 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인식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이, 디트리히! 이만 돌아가자.”

“그래. 건물들은 안됐지만, 다른 문제점은 없어 보이니…….”

“으아아아앜!!”

“볼프?!”

이 이상 마을을 살펴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디트리히와 독일군 병사들이 트럭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마을의 구석진 곳에서 볼프의 앳된 비명이 들려왔다.

철컥!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 디트리히와 그의 부대원들은 그 즉시 총을 장전하고 서둘러 비명이 들린 곳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볼프에겐 큰 문제는 없었다.

그저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은 채 몸을 벌벌 떨고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젠장, 깜짝 놀랐네. 볼프, 대체 무슨 일이야? 귀신이라도 봤어?”

“저, 저기…… 저 구덩이에 사, 사, 사람들이…….”

디트리히는 미친 듯이 요동치는 볼프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곳엔 구덩이가 있었다.

탄내와 악취가 뒤섞인 불쾌한 냄새를 풍겨 오는 구덩이가.

“페터, 엄호해 줘.”

“알았어.”

머릿속에 불길한 느낌이 든 디트리히는 땀방울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천천히 구덩이 쪽으로 다가갔다.

“흡?!”

그러나 구덩이 안쪽을 본 순간 디트리히는 손에 쥔 총을 떨어트릴 뻔했다.

“씨발, 다 피난 간 줄 알았는데…….”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압슈방겐 사람들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인간이란 것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새까맣게 타 버린 채 쓰레기처럼 구덩이에 던져진 시체로 말이다.

“우웩! 우웨엑!”

“오, 주여…….”

디트리히를 따라 구덩이 안쪽을 확인한 독일군 병사들이 역겨움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일인지 뒤늦게 확인하러 온 하인리치 중위도 구덩이를 보자마자 코를 가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빌어먹을 스키타이 새끼들 같으니.”

“중위님, 저 불쌍한 사람들을 저리 썩게 놔둘 순 없습니다.”

“그래, 누구도 이런 식으로 죽어선 안 되지. 다들 삽 가져와.”

디트리히와 병사들은 중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누구 하나 할 것이 삽을 가져와 마을 공동묘지에 땅을 팠다.

그리고 아직도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 압슈방겐 주민들의 시체를 조심스럽게 묻어 주었다.

“종군 사제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어쩔 수 없지. 사령부에 보고를 보냈으니 나중에라도 제대로 장례를 치러 주길 바라자고. 그나저나 이토록 작은 마을까지 이 모양이라니. 굼빈넨은 무사했으면 좋겠는데.”

새롭게 만들어진 무덤 앞에서 러시아군에게 학살당한 마을 주민들의 묵념을 빌며 간단하게 기도를 마친 디트리히의 아쉬운 목소리에 굼빈넨이 나고 자란 하인리치 중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말대로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였다.

그들은 갈 길이 멀었으니까.

전쟁이 만들어 낸 비극에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낀 디트리히는 몇 번이고 압슈방겐을 뒤돌아보며 다시 트럭에 올랐다.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 빌어먹을 모든 것을 끝낼 전쟁을 하루라도 더 빨리 끝내기 위해.

* * *

부우우웅──

“저 빌어먹을 하루살이 같은 놈들은 계속해서 나타나는군.”

같은 날, 러시아 제1군 사령관 렌넨캄프는 러시아군의 머리 위를 제집처럼 날아다니고 있는 독일군 정찰기의 모습이 마음이 들지 않는 듯 불안한 얼굴로 사령부 안을 서성거렸다.

“저것들을 어떻게든 떨어트릴 순 없나?”

“잘 맞지도 않고 또 아시다시피 탄약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라…….”

“젠장!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삼소노프 녀석도 그렇다.

녀석이 2군을 말아먹고 그런 식으로 죽어 버리는 바람에 지원군을 제때 보내지 않았다며 질린스키 사령관에게 죄 없는 자신만 욕먹지 않았나.

‘그러면 얼른 지원하라고 말을 하던가!’

2군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굼빈넨을 함부로 비울 수 없다는 것은 질린스키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리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부당해도 너무 부당했다.

“렌넨캄프 사령관님. 방금 정찰병들에게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독일군이 미주리안 호수지대를 지나 북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쳇, 역시 남쪽인가.”

부관의 보고에 정신을 차린 렌넨캄프가 지도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예상대로 독일군은 2군을 전멸시킨 후, 곧장 1군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도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군.”

1군은 2군이 독일군에게 박살 나는 것을 잘못된 판단으로 본의 아니게 방치한 대신, 그만큼 진격해 올 독일군을 막기 위한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물론, 죽은 삼소노프와 희생당한 2군 병사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겠지만.

“플루크의 10군은?”

“이미 대기 중입니다.”

10군은 독일 8군이 공세를 시작하면 예정대로 그들의 측면을 찌를 것이다.

그렇기에 렌넨캄프는 8군을 향해 어디 올 테면 한번 와 보라는 심정이었다.

아무리 기세 높은 독일군이라도 2군 때와 달리 이번에는 쉽지 않을 테니까.

‘난 삼소노프와는 다르다. 삼소노프와는!’

렌넨캄프는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끊임없이 되뇌며 지도 위에 놓인 말들을 노려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