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60화 (160/193)

160화 : 타넨베르크 (3)

“삼소노프가 지원을 요청한다고?”

삼소노프의 2군이 독일군의 포위망에 갇힌 채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을 때, 렌넨캄프는 가까스로 굼빈넨까지 달려온 2군 전령의 다급한 보고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위기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에 전령은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이내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예! 서둘러 지원군을 보내지 않으면 2군은 전멸하고 말 것입니다!”

“하하하! 전멸이라니. 삼소노프가 너무 과민반응을 하는 것은 아닌가?”

“예?”

전령은 렌넨캄프를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대체 지금까지 자신이 입이 아프게 떠든 것들을 귓구멍이 아닌 어디로 들은 것일까?

그러나 이해할 수 없다는 전령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렌넨캄프는 여전히 태연자약한 얼굴로 잼을 탄 홍차를 들이마실 뿐이었다.

“보나 마나 독일군의 반격 공세에 놀란 것뿐이겠지. 게다가 독일군이 남쪽에 그리 많은 병사를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어.”

당장 렌넨캄프의 1군이 동프로이센의 중심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를 노리는 중이다.

그리고 독일 8군은 일련의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공격을 격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물려야 했을 정도로 병력이 부족한 상황.

렌넨캄프가 생각하기엔 독일군은 쾨니히스베르크를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남쪽 어딘가에 있을 2군을 향한 공세에 그리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실제로 독일군은 우리 1군의 진격을 방해하기 위해 군 상당수를 쾨니히스베르크 방면에 배치했다. 그러니 삼소노프가 적 병력을 잘못 파악했거나 자네 보고가 과장되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물론, 적 병력을 오판하고 있는 것은 렌넨캄프 쪽이었다.

지금 렌넨캄프가 자신을 막기 위해 배치되었다고 믿고 있는 적은 렌넨캄프의 시선을 끌기 위해 미끼 역할을 맡은 독일 제1기병사단 하나뿐이었으니까.

‘지금 이 인간이 뭐라는 거야? 그럼 2군을 포위 중인 독일군은 대체 뭔데!’

두 눈으로 직접 독일군의 포위망을 본 것도 모자라 가까스로 그것을 뚫고 북쪽으로 달려온 전령이 보기엔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말이다.

“사령관님, 보고엔 어떠한 과장도 없습니다. 2군의 상황은 실제로 일분일초를 다투고 있습니다!”

“정말 삼소노프가 위기에 빠졌다면 북서전선군 사령부에서 2군을 지원하라 명령이 내려왔겠지.”

그리고 질린스키 사령관이 렌넨캄프에게 내린 마지막 명령은 어디까지나 굼빈넨을 지키고 쾨니히스베르크를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또한 잘못한 판단이었지만.

현재 질린스키와 러시아 북서전선군 사령부는 독일군의 방해와 러시아군의 열악한 통신 사정이 겹쳐 전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삼소노프의 2군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사령부의 판단도 없이 지원을 보냈다가 기껏 얻은 굼빈넨이 역으로 위험해지면 어쩌려고?”

“장, 장군님!”

“삼소노프에겐 우선 사령부에 ‘올바른’ 보고를 보내라고 전하도록.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네.”

렌넨캄프는 더는 이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전령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북서전선군 사령부는 당연하겠지만, 1군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벨라루스의 민스크에 있었다. 말을 타고 아무리 빨리 달려간다고 해도 도착했을 땐 이미 모든 게 끝난 뒤일 것이다.

‘아, 탈영 마렵다.’

그러나 지원군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전우들을 버릴 수는 없는 일.

결국, 전령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북서전선군 사령부로 향했다.

제발 늦기 전에 제때 도착할 수 있기를 바라며.

* * *

“……이젠 끝인가.”

그러나 전령의 바람과 달리 삼소노프와 러시아 제2군은 이미 붕괴 직전에 몰려 있었다.

렌넨캄프 놈은 깜깜무소식이고, 질린스키 사령관 또한 연락이 제대로 닿질 않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군은 피를 갈구하는 흡혈귀처럼 자신들을 전부 죽이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 멈추지 않고 계속 러시아군에 대한 공세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사령관님, 지금이라도 탈출하셔야 합니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참모 하나가 이대로 포로로 잡히는 것보단 낫다는 듯 절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삼소노프의 반응은 차가웠다.

“허, 탈출이라고? 퇴로를 만들던 알렉산드르 블라고베셴스키(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лагове́щенский)의 6군단도 마켄젠의 기병대에 이미 무너졌다. 대체 어디로 탈출하란 말인가?”

그 말대로 2군의 후방에 있던 러시아 6군단은 별동대를 보내 포위망을 뚫고 아군이 탈출하기 위한 길을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근처에서 제17군단을 이끌고 공세를 진행 중이던 마켄젠은 이를 눈치채자마자 휘하의 기병대를 보내 퇴로를 끊어 버렸다.

워낙 상황이 시급했던지라 빌헬름 황태자나 실질적으로 8군을 지휘하고 있던 루덴도르프에게 명령을 받진 않았지만, 임무형 지휘체계란 이름 아래 움직이는 독일군의 유연함은 이를 용납했고, 그 결과는 러시아군의 침울한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성공적이었다.

“병사들을 보내 독일군의 시선을 끈다면…….”

“닥치게! 지금 애먼 병사들을 독일군의 먹이로 던지고 우리만 살아남겠다는 건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또한 이대로 독일군의 포로가 되는 불명예를 감수하는 것보단 어떻게든 살아서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조국을 위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전장에서 살아나가기 위해 부하들을 미끼로 던지자는 말을 태연하게 내뱉는 참모들의 말에 삼소노프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지었다.

귀족이란 작자들이 책임과 의무는 대체 어디로 팔아먹고 자기들 살 궁리만 한단 말인가?

그러나 삼소노프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것이 러시아 귀족의 현실이었고, 러시아 제국의 현실이었다.

실제로 독일과 영국이 귀족은 물론, 왕족들까지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솔선수범해서 전장으로 나선 것에 비해 젊은 유스포프 공작을 비롯한 러시아 고위 귀족 일부는 권력과 돈의 힘으로 여전히 수도에서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삼소노프 장군님,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네. 다들 나가 있게.”

“예, 사령관님.”

머리가 복잡해졌는지 삼소노프가 미간을 찌푸리며 참모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리고 부하들이 사라지자 독한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도저히 술을 이 답답한 속에 쏟아붓지 않고선 이 암담한 현실을 버티기 힘들었기에.

“하하하하……. 신이시여. 대체 이 모든 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병사들에게 총이 아닌 몽둥이를 지급해야 했을 정도로 전쟁 준비가 미흡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작전에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국경을 넘어 진군한 것?

초전의 승리에 취해 겁도 없이 늪과 습지로 가득한 이곳까지 들어온 것?

아니면 독일군의 음모를 눈치채지 못한 채 멍청하게 포위망이 완성되는 것을 지켜본 것?

“……어쩌면 이 전쟁부터가 잘못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인제 와서 후회해 봤자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자신은 패배했다. 러시아 2군은 패배했다.

20만이 넘는 병사들은 과거 근방에서 일어난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죽은 튜턴 기사단처럼 무덤조차 남지 않은 채 비참하게 죽을 것이고, 살아남은 자들도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로 끌려갈 것이다.

“내 무능함이 병사들을 죽게 했군.”

삼소노프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자신의 나강 리볼버를 집어 들었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어찌 구차하게 살아남아 황제 폐하를 뵙겠는가.”

홀로 서서 그리 중얼거린 삼소노프는 천천히 자신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눴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러시아 2군이 독일군에게 포위된 지 3일 후인 1913년 8월 23일.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러시아 제2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삼소노프가 자살했다.

타넨베르크 전투의 끝이오, 러시아 북서전선군 전체에 빨간불이 켜지는 순간이었다.

* * *

“제8군에서 보고! 러시아 제2군 전멸! 대승입니다!!”

“그렇지!”

동부전선에서 날아온 승전보에 팔켄하인이 주먹을 꽉 쥐며 탄성을 터트림과 동시에 최고사령부 전체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독일의 장군 참모들은 다들 수고했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로의 어깨를 토닥였고, 나와 뷜로 총리 또한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타넨베르크 전투의 승리를 축하했다.

아, 물론 1410년에 폴란드가 독일 기사단을 쌈 싸 먹은 그룬발트 전투가 벌어진 타넨베르크는 전장하고 좀 떨어진 곳이었고, 전투의 이름도 독일 제국이 갖다 붙인 것이긴 하다만.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폐하.”

“그래, 장남 녀석이 이번에 큰일을 해냈군.”

빌헬름 황태자가 큰 공을 세우자 ‘훗, 그래야 내 아들이지’란 얼굴로 썩소를 짓는 빌헬름 2세.

원 역사에서 타넨베르크의 영웅이 된 힌덴부르크가 자신의 권위와 자리를 위협할까 봐 견제했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다.

하긴 시대가 어느 땐데 카이저가 후계자가 공을 세웠다고 견제할 리도 없고, 빌헬름 황태자가 전쟁영웅 되었다고 갑자기 썩시딩 유 파더를 외칠 리도 없으니.

“그러고 보니 팔켄하인, 이번에 러시아 2군의 절반 가까이 포로로 잡았다고 하던가?”

“예, 폐하. 사령관이 죽으니 알아서 무기를 내려놓더군요. 아, 그리고 보니 그 건에 대해서 외무장관께 할 말이 있습니다만…….”

“저 말입니까?”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팔켄하인이 남들이 알면 좋을 게 없는 이야기라는 듯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이번에 포로로 잡힌 러시아군 사이에 장관의 고향에서 온 자들이 있더군요.”

“아…….”

그제야 팔켄하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깨달았다.

왜냐하면, 타넨베르크 전투 때 포로로 잡힌 러시아군 중엔 조선인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신빙성 논란이 있는 ‘노르망디의 한국인’과 달리 증거 자료가 확실하게 존재하는 ‘타넨베르크의 조선인’들은 러일전쟁 당시 두만강 쪽에서 러시아군을 도와 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의병들과 병사들로 조선이 사실상 일본에 넘어가자 그대로 러시아군에 몸을 의탁한 자들이었다.

‘게다가 이들 말고도 연해주 등지에 살던 약 4천 명 정도의 조선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에 종군하기도 했고.’

“황태자 전하와 루덴도르프 참모장이 이들을 어찌하면 좋을지 장관께 의견을 구하고 싶다더군요.”

“말씀은 고맙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해방하거나 무턱대고 편의를 봐줄 순 없는 노릇입니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니 말입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들의 사정은 물론 안타깝다.

그러나 내가 개인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대한자유정부와 달리 타넨베르크의 조선인들은 엄연히 러시아군을 도와 우리 독일군과 싸우다가 포로로 잡힌 엄연한 적군.

내가 섣불리 이들을 돕겠다고 나섰다간 융커들만 미소 짓게 만드는 정치적 약점을 스스로 만드는 꼴밖엔 되지 않는다.

“저로선 그들을 그저 포로로서 제대로 대우해 주는 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대신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자유정부로 보내 주거나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 주자.

내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결국, 이 정도뿐이니까.

“그나저나 이번 전투의 패배로 우리가 싫다고 수도의 이름까지 바꾼 니키가 울상을 짓겠군.”

나와 팔켄하인이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살짝 취했는지 우리 장인어른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 마음 놓긴 이릅니다. 아직 렌넨캄프가 이끄는 제1군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이에 뷜로 총리가 입을 열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지금쯤이면 러시아군도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타넨베르크 전투는 끝났지만, 오히려 동프로이센에서 러시아군의 위협을 완전히 배제하기 위한 전투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팔켄하인. 헤링겐의 제7군은 어찌하고 있는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곧 갈리치아 전선에 투입될 예정입니다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회첸도르프가 직접 지휘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초전의 승리가 무색하게 또 패배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작전 하나는 잘 짜는데, 하필 지휘하는 군대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라 전투를 말아먹는 회첸도르프가 불쌍해질 지경이다.

“그래도 7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 갈리치아 전선의 상황도 어느 정도 호전될 것입니다.”

“후우……. 한스, 네 말이 맞길 바라마. 난 이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믿을 수가 없구나.”

빌헬름 2세가 이리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게 지금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갈리치아 전선뿐만 아니라 세르비아 전선도 말아먹고 있었다.

세르비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지휘 중인 포티오레크가 세르비아를 향한 2차 공세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또 패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2차례나 승리를 거둔 세르비아군은 이제는 역으로 강을 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로 공세를 펼치는 중이었다.

다만, 이건 세르비아군이 원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가 세르비아에게 무리한 공세를 강요한 것에 가까웠기에 원 역사를 생각해 보면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반격에 곧 세르비아 영토로 물러나겠지만.

“어쨌든 우리의 계획대로 일이 잘 풀리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 아, 그러고 보니 티르피츠 제독. 예의 ‘그 작전’은 잘 준비되고 있소?”

“물론입니다. 폐하.”

카이저의 물음에 해군장관 티르피츠가 눈썹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리히 왕자가 지휘하는 발트 함대가 곧 출항할 것입니다.”

“해군의 작전을 위해 예정되어 있던 파리 폭격까지 미루었소. 그러니 이번 승리처럼 해군 또한 큰 성과를 거두길 기대하는 바요.”

티르피츠는 명심하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육지에서도, 바다에서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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