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59화 (159/193)

159화 : 타넨베르크 (2)

독일 제8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 제2군이 란나를 점령한 이틀 후인 8월 17일이었다.

“그러니까 렌넨캄프의 1군은 한동안 굼빈넨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거지?”

“응, 빌헬름 형…… 아니, 그렇습니다. 사령관 각하.”

마르가레테 공주와 카를 폰 헤센카셀 방백의 장남, 프리드리히 폰 헤센카셀은 사촌 형인 빌헬름 황태자의 물음에 평소처럼 무심코 대답했다가 다른 이들의 앞이란 것을 깨닫고 급히 말을 고쳤다.

본래 원 역사에서 서부전선에서 전사하는 동생 막시밀리안에 이어 루마니아 전선에서 앞장서서 싸우다 총검에 목이 잘려 아들들을 매우 아낀 마르가레테 공주를 절규하게 했던 프리드리히지만, 테슬라와의 만남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다.

프리드리히는 어린 시절 동생 막시밀리안과 함께 테슬라의 라디오 실험에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과학자의 꿈을 가지게 되었고, 동생과 함께 공대에 진학해 버렸다.

물론, 이는 카이저의 조카라는 고귀한 신분으론 흔치 않은 일이었고, 덕분에 기어코 마르가레테 공주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마르가레테 공주의 아들들은 위험한 최전방이 아닌 통신대 장교로 자원했기에 아들들을 잃을 확률이 현저히 낮아진 마르가레테 공주에겐 어찌 보면 잘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본인들은 운명이 바뀌었단 사실을 전혀 모르겠지만.

“정확히는 쾨니히스베르크 공략 준비를 위해 1군은 점령지를 지키며 대기하라는 명령문입니다.”

러시아군은 보안 의식 따윈 개나 줘 버린 채 여기저기에 암호화되지도 않은 평문을 날려 대는 중이었다.

그리고 테슬라로 인해 극도로 발전한 통신 기술에 힘입어 러시아군의 무선 전신을 감청 중이던 독일군 통신대는 보다시피 러시아군의 명령문을 아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황태자 전하, 1군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역시 무리한 진군으로 지친 상태인 삼소노프의 2군을 먼저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음, 내 생각도 그게 좋을 것 같소. 하여튼 수고했다. 프리드리히. 네가 큰 공을 세웠어.”

빌헬름 황태자는 칭찬에 헤실거리는 사촌 동생의 어깨를 두들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독일군은 감청뿐만 아니라 막강한 항공력을 이용한 항공 정찰, 그리고 피난 명령에도 불구하고 고향에 남아 있는 동프로이센 민간인들의 적극적인 정보 제공 등을 통해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군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삼소노프의 러시아 2군은 더운 여름날에 너무 급하게 진격하느라 지쳐 있는 상태.

독일의 사냥꾼들은 사냥감이 약해진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숄츠 대장, 제1예비군단, 제3예비군단과 합류하여 러시아 제2군의 남쪽을 공격하시오.”

“옛, 전하!”

프리드리히 폰 숄츠(Boje Friedrich Nikolaus von Scholtz) 포병대장이 지휘하는 20군단과 제1, 제3예비군단은 남하해서 우즈다우(Usdau, 오늘날의 우즈도우)에 주둔 중인 러시아군을 공격했다.

“마켄젠 대장, 프랑소와 대장의 제1군단과 합류하여 북쪽에서 러시아군을 목을 죄시오.”

“명 받들겠습니다.”

이와 동시에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이 지휘하는 제17군단과 프랑소와 대장의 제1군단은 북쪽에서 러시아 제2군에 압박을 가했다.

본래 숄츠나 프랑소와나 마켄젠이나 다들 한 개성 하는 인물들이었기에 이들을 전부 통제하기란 꽤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확고한 황위 계승자인 빌헬름 황태자의 부정할 수 없는 권위는 장군들을 말 잘 듣는 순한 양으로 만들기엔 충분했다.

물론, 그 순한 양들은 러시아군 앞에선 흉악한 늑대로 변모했지만.

그렇게 제8군은 남쪽과 북쪽에서 러시아군을 둘러싸며 러시아 제2군에 공세를 가하는 척하면서 러시아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고 거대한 대규모 포위망을 만들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온 한 편의 예술 작품과도 같은 독일의 전쟁 기술이 동프로이센에 다시 한번 꽃을 피우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삼소노프는 여전히 독일군의 공격을 막는 것에만 급급했을 뿐, 독일군의 올가미가 자신의 목에 걸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3일 후인 1913년 8월 20일.

러시아 2군을 둘러싼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삼소노프와 러시아 2군의 운명도 결정이 났다.

* * *

“오늘은 특히나 햇살이 눈부시게 밝군. 전쟁만 아니었으면 일광욕이라도 즐겼을 텐데 말이야.”

러시아 제2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삼소노프는 그리 넉살 좋은 소리를 내뱉으며 차갑게 식은 맥주를 쭉 들이켰다.

지금 그가 다리를 펴고 앉아 있는 저택과 마찬가지로 이름 모를 독일 융커에게 ‘징발’한 물건이었다.

물론, 주인은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군이 오기 전에 도망친 모양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에 허락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독일군도 오늘 같은 날엔 좀 조용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지난 3일 동안 독일군은 러시아군을 몰아내기 위해 안간힘(삼소노프가 보기에)을 썼다.

그러나 주께서 보우하사 러시아군은 아직 점령지를 지키고 있었고, 1군을 따라잡느라 상당히 무리하게 동프로이센으로 달려온 것 때문에 불안해하던 삼소노프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렌넨캄프는 뭐 하고 있다던가?”

“제1군도 우리처럼 독일군과 싸우고 있다는 것 정도밖에는 모릅니다. 1군과의 거리도 거리고 호수와 습지 때문에 전령을 보내는 것도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라…….”

거기다 몇 없는 러시아군 정찰기들도 날아오르자마자 대체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몰라도 기관총을 빵야빵야 쏴대는 독일군 비행기에 격추되기 일쑤였으니.

덕분에 러시아 북서전선군 사령관인 야코프 질린스키(Я́ков Григо́рьевич Жили́нский)는 이러다 비싼 비행기들을 전부 잃어버릴까 봐 항공대에 비행 금지 명령을 내렸을 정도였다.

“무선 전신은?”

“더위에 맛이 갔는지 기계들이 자주 먹통이 되더군요.”

삼소노프는 부관의 말에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이를 딱히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러시아군의 열악한 장비 사정을 생각해 보면 전신기들이 엉망인 것도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기술자들을 닦달해서 어떻게든 고쳐 보게.”

“예. 사령관님.”

물론, 북선전선군 사령부에 제대로 된 전신기를 요청하는 편이 더 낫겠지만, 질린스키가 이걸 들어줄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총과 총에 넣고 쏠 총알조차 부족한 것이 지금의 러시아군이다. 비싼 전신기는 어림도 없을 확률이 너무 높았다.

삼소노프는 러시아군의 암담한 현실에 한숨 쉬며 타는 속마음을 달래려는 듯 맥주를 더욱 들이켰다.

쾅! 콰앙!

“음?”

그러나 삼소노프가 차에 입도 대기도 전.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멀리서 들려왔다.

삼소노프는 심각한 얼굴로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신의 귀가 틀리지 않았더라면 이것은 분명 포격 소리.

삼소노프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하는 찰나, 장교 하나가 문을 벌컥 열며 사색이 된 채 사령관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사령관님, 큰일 났습니다!”

“그래, 그건 자네 얼굴만 봐도 알겠네. 대체 무슨 일인가?”

“독일군이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쯧, 이 더운 날에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군. 그런데 그게 이리 다급하게 달려올 일인가?”

“그, 그것이…….”

삼소노프의 의문에 장교는 이걸 대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로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

그리고 이내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독일군의 공세가 지금까지와는 다릅니다. 사방, 사방에서 놈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뭐? 사방이라니 그게 무슨…….”

“삼소노프 장군님!”

삼소노프가 이해하지 못하겠단 얼굴로 재차 다시 질문하려는 찰나, 또 누군가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보고! 1군단을 향해 독일군의 대규모 포격을 동반한 강력한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레오니드 아르타모노프(Леони́д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Артамо́нов) 장군이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번엔 전령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삼소노프에게 달려온 전령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23군단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키프리안 칸드라토비치(Киприа́н Анто́нович Кондрато́вич) 장군이 어찌할지를 묻고 있습니다!”

“6군단에 대규모 독일군 접근 중!”

“13군단도 시급히 지원을 요청…….”

“으아, 으아아아…….”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보고에 삼소노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1군단에 23군단? 거기에 6군단과 13군단, 15군단까지 공격받고 있다고?

‘사실상 2군의 모든 부대가 공격받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정도로 삼소노프는 멍청하지 않았다.

“포위당했다……. 우린 지금 포위당했어!”

독일군은 힘이 약해서 자신들을 밀어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가둘 포위망을 만들려고 일부러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지 않은 것뿐이었다.

“당장 질린스키 사령관께 상황을 알리고 증원군을 요청해라. 렌넨캄프와 1군에도 서둘러 지원을 보내 달라 하고!”

“하지만 무전은…….”

“어떻게든 고쳐 봐! 안되면 전서구나 전령이라도 내보내. 무슨 수를 써서든 렌넨캄프에게 당장 엉덩이 들고 여기로 뛰어오라고 하란 말이다!”

“Д, Да!”

이대로 있으면 자신과 2군은 끝장이다.

2군은 끝장나면 다음은 1군이다.

‘그리고 1군이 끝장나면…….’

삼소노프는 그다음은 도저히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이제 렌넨캄프에게 자신의 연락이 닿아서 그가 빨리 지원군을 보내 주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 * *

쾅! 콰쾅!

“누가 전화기! 전화기 가져와!”

“방금 포격에 선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전서구는?”

“끼애엑─!!”

“방금 독일군 매에게 잡아먹혔네요.”

“젠장, 전령이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사방에 독일군 예거들이 깔려 있던데.”

그러나 삼소노프의 바램과 달리 독일 8군은 러시아 2군이 다른 부대에 연락을 보내는 것을 매우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었다.

독일군의 포격은 땅을 갈아엎으며 전화선을 끊어 버렸고, 러시아군 비둘기들은 하늘에 뜨는 족족 매들에게 사냥당했으며 전령들은 숨어 있던 저격수들에게 머리를 꿰뚫리는 일이 허다했다.

덕분에 러시아군은 외부는 물론, 근처에 있는 옆 부대와도 제때제때 명령을 주고받지 못했고, 독일군은 혼란에 빠진 러시아군을 겁먹은 사슴 무리를 사냥하는 늑대처럼 자비 없이 물어뜯으며 포위망을 점점 조여 갔다.

타다다다다! 타다다다다!!

“으아앜!”

“젠장, 나 저거 극동에서 봤어! 당장 떨어져. 붙으면 끝장이야!”

타넨베르크의 숲속에서 독일군이 기관단총을 앞세워 자신들의 조국에 겁도 없이 발을 들인 러시아군을 차례대로 벌집으로 만들었다.

독일군 포병대의 105mm 곡사포는 끊임없이 불벼락을 쏟아 냈고, 독일 제국 항공대는 서부전선에서 활약 중인 동료들처럼 하늘 위에서 러시아군을 향해 총알과 로켓을 퍼부었다.

부우우웅──투두두두두두!

[어이, 포스 꼬맹이! 네 실력이 좋은 건 인정하지만, 너무 앞서가지 마라!]

“칫, 알고 있다고요. 에른스트 아저씨.”

그리고 이 중엔 크레펠트 군사학교에서 하사관 후보생으로 교육을 받다 세계대전이 터지자 평소 관심이 많던 항공대에 자원한 만 16살의 베르너 포스(Werner Voß)도 있었다.

물론, 훗날의 명성과 달리 아직 그는 이제 막 정찰기를 몰고 다니는 애송이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원 역사에서도 최연소 비행 교관으로 활동했을 정도로 포스의 뛰어났던 비행 재능은 현재 서부전선에서 날뛰고 있는 선배 독수리들을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사령관님! 도저히 독일군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전멸입니다!”

“이런 씨……! 빌어먹을 렌넨캄프 놈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삼소노프가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지만, 1군에게선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리고 그사이에도 러시아 제2군은 무기력하게 독일군에게 쓰러지거나 무기를 버리고 겁에 질린 채 항복했다.

가마솥 전투(Kesselschlacht).

훗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소련군을 상대로 자주 써먹었던 적들을 고립부에 가둔 뒤, 포위 섬멸하는 전술이 지금 동프로이센의 숲과 호수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렌넨캄프으으으으으─!!!!”

그러나 렌넨캄프는 여전히 깜깜무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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