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49화 (149/193)

149화 : 유럽의 결단

“폐하! 지금 당장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너무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는 것 아니오? 잘못하면 러불동맹과 전쟁이오, 전쟁!”

“다른 누구도 아닌 오스트리아 황제가 죽었어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가만히 둘리가 없잖습니까!”

그러나 내 결연한 각오는 빌헬름 2세의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내 동공과 함께 거침없이 흔들렸다.

우리 장인어른은 평소의 허세는 온데간데없이 창백한 얼굴로 책상에 얼굴을 파묻은 상태였고, 카이저의 집무실은 장관들과 군부의 장성들이 서로를 향해 고성을 질러댔다.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구만.’

이해는 한다.

본래라면 태평하게 노르웨이로 휴가나 갔을 빌헬름 2세지만, 아무래도 여기선 내 보고서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확인했으니.

만약 그걸 보고도 카이저가 태연하게 굴었으면 그건 그것대로 놀랐을 것이다. 안 좋은 의미로 말이다.

“폐하.”

“오, 한스, 드디어 왔구나! 왜 이렇게 늦은 것이냐. 자, 얼른 이쪽으로 와라!”

눈 앞에 펼쳐진 난장판에 머뭇거리다 이내 한숨 쉬며 집무실에 발을 들이자 그제야 나를 발견한 빌헬름 2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나를 반겼고, 방금까지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기 일보 직전이었던 사람들도 침묵하며 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래,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는 뭐라고 하더냐?”

“전쟁입니다, 폐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미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결의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동맹으로서 우리 독일 제국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하느님 맙소사…….”

내 말에 누군가가 잔혹한 현실에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나 카이저를 비롯한 대부분은 이를 예상했다는 듯 어두운 얼굴로 침음성을 흘릴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세르비아 극단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원 역사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했을 때도 독일을 비롯한 열강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초강경적으로 나서리라 예상했던 만큼 예정된 일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선전포고하면 러시아가 움직일 것입니다. 그리고 러시아가 움직이면 프랑스도 움직이겠죠. 그들로선 유럽의 주도권을 완전히 영독협상에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러시아가 무너지는 것을 용납할 리가 없으니.”

“그, 그건 아직 모르는 일 아닌가. 니키도 프란츠 황제를 죽인 세르비아를 돕고 싶어 할 리가 없어. 그러니 내가 그와 직접 이야기를 해 보면…….”

뷜로 총리의 말에 빌헬름 2세가 아직 성급하게 판단하긴 이르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폐하, 황실 간의 교류와 혈연은 이 상황에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러시아로선 발칸, 더 나아가 범슬라브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세르비아를 버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다른 나라들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황제를 죽인 발칸의 미치광이 세르비아를 욕할 때 러시아 제국 내에선 오히려 같은 슬라브 민족인 세르비아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고 있었다.

특히 로마노프 황실에 시집간 페타르 1세의 장녀인 옐레나 공주와 몬테네그로 국왕 니콜라 1세의 딸들인 밀리카 공주, 아나스타샤 공주 등이 세르비아에 대한 동정 여론을 부채질하고 상황.

“니콜라이 2세 폐하가 개인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더라도 세르비아를 도와야 한다는 귀족들과 신민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순 없습니다.”

아니, 그 우유부단한 양반이라면 100% 그런다.

“그리고 그것은 애석하게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후, 그래. 우리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버릴 수 없지. 오스트리아를 돕지 않는 것은 그냥 동맹을 저버리는 것이 아닌 같은 독일 민족을 저버리는 것이니.”

“네. 명분도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있으니까요.”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있어 그냥 동맹국이 아니라 같은 피와 언어를 공유하는 같은 민족이다.

게다가 차라리 오스트리아인이 세르비아 국왕을 쏴 죽였으면 모를까, 앞서 말했듯이 명분과 정의는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있었다.

‘게다가 프란츠 요제프는 그냥 황제가 아니야.’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계보를 잇는 합스부르크 황제.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독일 제국의 독일인들에게도 많은 존경과 경외를 받는 인물이었다.

만약 우리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돕지 않았다간 민족주의의 광기에 지나치게 심취한 독일인들이 지금 오스트리아 형제들을 버리려고 하는 것이냐며 황실과 정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살아서도 골칫거리였던 프란츠 요제프가 죽어서도 문제를 남기는 셈이다.

“결국, 우리도 러시아도 이 전쟁에 끌려들어 갈 수밖에 없다는 소리군요.”

여전히 딱딱한 얼굴의 팔켄하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묵시록의 적기사는 말 위에 올랐고, 전쟁의 여신은 창을 집어 들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전쟁밖에 없습니다.”

내 단언을 들은 카이저는 침음성을 흘리며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고민에 빠졌다.

군주로선 쉽지 않은 결정이다.

강해 보이는 척하지만, 속은 여린 빌헬름 2세에겐 더더욱.

그렇게 결코 짧다고 말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난 뒤, 카이저가 말했다.

“한스, 말해 다오. 우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폐하.”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언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제가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내 말에 카이저는 결심을 굳힌 듯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한스.”

“예, 폐하.”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에게 우리 독일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지지할 것이며 끝까지 옆에서 함께 싸울 것이라 전해라.”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카이저의 명령을 받들었다.

독일 제국은 결단을 내렸다.

이젠 다른 이들이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 * *

“폐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전달했습니다. 독일 제국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무조건 지지를 천명했습니다.”

“후우……. 빌리, 이 성질 급한 녀석 같으니. 최후통첩의 내용은?”

“무조건 항복입니다.”

곧 이름이 바뀌게 생긴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에서 니콜라이 2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다른 누구도 아닌 프란츠 요제프,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가 죽었다.

러시아 제국을 비롯한 다른 열강들조차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대해 초강경대응을 할 것이 분명하다며 여겼고, 그렇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지나치게 과한 요구를 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폐하, 이대로 세르비아를 버릴 순 없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행동이 정당하다 해도 러시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제국이 세르비아를 공격하는 것을 방관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방관할 수 없었다.

지난 두 번에 걸친 발칸전쟁의 결과 때문에 발칸반도를 완전한 러시아의 영역으로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불가리아가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서 이탈해 버린 참담한 상황에 부닥친 러시아다.

이미 보스니아 위기 때부터 여러 번 세르비아에 양보만을 강요해 온 러시아가 이번에도 세르비아를 버렸다간 러시아는 수십 년을 공들여 온 발칸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전부 잃는 것은 물론 범 슬라브의 기치 자체가 쓰러질 것이다.

러시아 귀족들과 군부는 이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고, 전쟁을 망설이는 니콜라이 2세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게다가 러시아 제국의 여론 또한 같은 슬라브족인 세르비아를 돕자는 소리가 더 많았고, 세르비아의 옐레나 공주와 몬테네그로의 왕녀들 또한 눈물을 흘리며 차르에게 애원하니, 마음 약한 니콜라이 2세 또한 점점 세르비아를 지원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지만…….

“그러나 꼭 총동원령을 내려야겠는가? 세르비아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고, 부분 동원령을 내리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차르는 그놈의 우유부단한 성격 어디 안 간다는 듯 여전히 총동원령을 내리는 것을 망설였다.

물론, 러시아 장군들로선 그야말로 속이 답답해서 터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지금 상황에서 부분 동원령은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폐하, 이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먼저 총동원령을 선포했다간 우리 러시아군이 불리해질 것입니다.”

“예, 최대한 빨리 총동원령을 마치고 전쟁 준비를 마치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하, 하지만 총동원령을 내리면 독일을 자극하진 않겠나?”

“저들도 양면 전선이란 위협 요소가 있는 이상, 적극적인 개입은 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니콜라이 2세의 우려에도 러시아군 수뇌부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물론, 이들 또한 총동원령이 독일을 자극할 확률이 높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머릿속에 전쟁의 승패는 결국 누가 빨리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느냐로 결정이 나는 것이라고 굳세게 못 받혀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 비단 러시아군 수뇌부만의 생각이 아닌 다른 나라 군 수뇌부가 모두 가지고 있던 생각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어쨌든 그들은 생각했다.

이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먼저 총동원령을 선포하면?

러시아 제국은 빠른 군사적 대응을 하지 못한 채 적들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꼴을 지켜만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전쟁에서의 패배로 돌아온다.

그렇기에 러시아 장성들과 귀족들은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빠르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총동원령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생각이 오히려 전쟁을 불러오고 있다는 것을 애써 무시한 채.

“후우, 알겠네. 그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우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면, 그 즉시 총동원령을 선포하도록 하지.”

결국, 니콜라이 2세는 장군들의 필사적인 설득에 못 이겨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머릿속엔 ‘이것이 정말 맞나?’라는 불안감이 여전히 강하게 맴돌았다.

* * *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러시아의 답은 아직인가?!”

한편 두 차례에 걸친 발칸전쟁에서의 승리라는 달콤한 과실을 즐기고 있다가 가브릴로 프린치프란 이름 모를 애송이 하나 때문에 갑자기 예고에도 없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전쟁을 벌이게 생긴 세르비아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Dragutin Dimitrijević) 이 새끼는 어디 갔어!”

“이미 짐 싸고 도망친 것 같습니다!”

“찾아! 그 빌어먹을 뱀 새끼랑 검은 손 새끼들을 찾아서 모조리 즉결 처형해 버려!”

세르비아 총리 니콜라 파시치(Nikola Pašić)는 ‘아피스’란 별명으로 더 유명한 검은 손의 수장이자 세르비아군 정보부장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가 부하들과 함께 야반도주했다는 사실에 분노를 터트렸다.

이 일이 대체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데 홀라당 도망을 친단 말인가.

검은 손을 하루라도 빨리 제거하지 못한 것이 그야말로 천추의 한이었다.

“주러시아 공사관에서 보내온 소식입니다! 러시아가 우릴 지원한답니다!”

“그게 정말인가?!”

원래도 검은 손과 사이가 안 좋던 파시치 총리가 아피스를 발견하기만 하면 사지를 찢어 버리겠다고 맹세하고 있을 때 주러시아 세르비아 공사가 급히 본국으로 보내온 소식에 세르비아인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협상의 여지도 없이 항복 아니면 전쟁만을 강요하고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최후통첩에 이를 받아들이지도 거절하지도 못한 채 고민에 고민만 거듭하고 있던 세르비아 정부다.

물론, 보스니아 위기 때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하겠다며 난리를 친 전적이 있었지만, 설마하니 진짜로 전쟁을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나?

세르비아로선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빠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그렇기에 막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도한 러시아의 지원 소식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나 다름없었다.

“러시아가 우리를 돕는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 굴복하지 말자! 나가서 싸우자!”

세르비아 정부는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항전 의지를 불태우며 분기탱천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최후통첩을 거절했다.

물론,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돕는다고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상대로 뭘 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원 역사와 달리 황제의 죽음에 눈이 돌아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곱게 죽을래? 맞고 죽을래?’라 물으며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기에 세르비아로서도 선택지가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폐하.”

“알고 있네. 베르히톨트,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하게. 주께서 우리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켜 주시기를.”

이에 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행동은 빨랐다.

세르비아가 항복을 선택할 리 없다는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이니까.

“……이에 결론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는 세르비아 왕국 정부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통보하는 바이다.”

1913년 7월 1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뷜로, 팔켄하인.”

“말씀하십시오.”

“제국 전역에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슐리펜 계획을 발동하게. 우리 독일 제국이 1871년 이후 다시금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설 시간이 왔네.”

“명 받들겠습니다.”

오헝의 선전포고로부터 1시간 후, 독일 제국이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독일 제국은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폐하, 이미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이젠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후우……. 총동원령 선포하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선전포고가 있던 다음날인 1913년 7월 11일.

러시아 제국이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에 이어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발령했습니다!”

“정녕 황제 살해자를 돕기 위해 전쟁을 벌이겠다고? 이건 미친 짓이야!”

“하지만 여기서 방관을 택한다면 러시아가 무너질 것입니다. 전 유럽에 전쟁의 나팔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젠 결정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젠장, 주께서 위대한 조국 프랑스를 지켜 주시기를.”

그리고 1913년 7월 12일.

프랑스가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유럽은 결단을 내렸다.

이제 그 결단의 대가를 치를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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