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 발칸전쟁 (2)
[발칸 동맹에 무릎 꿇은 오스만 제국. 런던에서 강화 회담이 열리다!]
1912년 7월.
발칸 동맹의 더러운 다구리에 못이긴 오스만 제국이 결국 두 손을 들고 못 해 먹겠다 선언하고 발칸 동맹과의 강화에 나섰다.
그리하여 런던에서 오스만 제국을 어떻게 나누면 좋을지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가 열렬한 토론이라 쓰고 말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는 가운데, 나 또한 회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하기 위해 런던을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초이 후작님.”
“오랜만입니다. 그레이 외무장관. 아, 저기 보이는 것이 스콧의 동상입니까?”
“예, 우리 영국의 위대한 모험가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죠. 그 옆엔 미스터 아문센의 동상을 같이 세울 예정입니다.”
자랑스럽다는 눈으로 한창 건설 중인 동상을 바라보는 그레이 외무장관.
물론, 원 역사에서 영국이 스콧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채 아문센에게 얼마나 치졸하게 굴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조소가 나오는 광경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스콧이 이길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원 역사의 아문센은 북극점을 피어리에게 NTR 당한 탓에 남극점 정복이 절실한 상황이었다면 여기선 아무래도 평생의 소원인 북극점 정복을 이룬 탓에 남극점 정복에 대한 열의가 상대적으로 떨어졌던 것이 컸던 모양이다.
갑자기 북극을 간다고 했다가 남극으로 기수를 돌려 스콧의 뒤통수를 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스콧은 원 역사처럼 남극에 말을 끌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아문센보다 먼저 남극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이후 힘이 빠져 버린 탓인지 살아서 돌아오진 못했지만 어쨌든 명예는 챙겼고, 아문센도 남극점을 먼저 정복하진 못했지만 본래는 찾지 못했던 스콧의 시체를 회수하고 돌아와 영웅이 되었으니, 누이가 좋고 매부가 좋은 일 아닐까?
“그나저나 오스만 제국과 발칸 동맹 간의 강화 회담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하, 강화 회담 말입니까.”
목숨을 대가로 바친 스콧의 승리로 결판이 난 남극점 승부에서 벗어나 본론으로 돌아오자 그레이 장관이 피곤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음, 역시나 예상대로 난장판이 펼쳐진 모양이다.
“사실 오스만 쪽은 문제가 아닙니다. 패배자는 원래 할 말이 궁색한 법이니까요.”
“그럼, 발칸 동맹 쪽이 문제라는 거군요.”
“예, 벌써부터 누가 더 많은 전리품을 차지할지 서로 물어뜯고 있더군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들이 동맹이 아니라 원수로 보일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이란 공동의 적만 없었으면 진작에 서로 죽자 살자 싸우고도 남는 것이 발칸 국가들이고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게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알바니아 독립을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덕분에 세르비아인들이 입에 거품을 문 상태입니다.”
발칸 동맹의 뒤에 있는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한 수였다.
실제로 제1차 발칸전쟁이 끝나고 알바니아는 독립하게 되었고, 알바니아 영토를 원했던 세르비아의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헤이트 수치는 또다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물론, 보스니아 위기로 인해 이 둘의 관계는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라 여기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의 관계가 더 나빠진다고 해도 그다지 의미는 없었지만.
“그래도 제 생각으론 회담이 얼마 가지 않을 것 같군요. 조만간 발칸 동맹의 발등에 불이 떨어질 것 같으니까요.”
“예? 후작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듣자 하니 발칸 동맹과 강화 문제로 현 오스만 제국 정부가 꽤 곤욕을 치르는 모양이더군요.”
특히 아드리아노플, 튀르키예어로 에디르네를 불가리아에 할양하는 문제를 두고 말이 많았다.
에디르네가 어디인가.
정복자 메흐메트 2세가 갈망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함으로써 2,000년에 걸친 로마의 명맥을 완전히 끊어 버리기 이전,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던 상징적인 도시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 정부가 강화 조약을 맺는 조건으로 불가리아에 에디르네 할양을 결정하면서 이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냐는 튀르크인들의 목소리로 덩달아 높아지고 있었다.
“후작께서는 설마 현 오스만 제국의 정권이 무너지리라 생각하는 것입니까?”
“전쟁의 패배와 치욕스러운 강화 조건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현 정권을 차지하고 있는 자유연합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를 굴욕적인 강화에 반대하고 있는 연합진보위원회(CUP)가 다시 정권을 되찾을 좋은 기회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지요.”
본래 오스만 제국의 권력은 모두가 알다시피 청년 튀르크 혁명 이후 혁명을 주도한 연합진보위원회가 잡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군바리들 아니랄까 봐 CUP가 점점 강압적으로 변하면서 민심이 이반, 작년인 1911년에 선거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흔히 자유연합으로 불리는 ‘자유와 합의당’이 정권을 차지했다.
그런데 자유연합이 발칸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모자라 발칸 동맹과의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으려 하는데, 과연 군인들로 이루어진 연합진보위원회가 가만히 있을까?
‘그럴 리가 없지.’
이미 한차례 쿠데타를 통해 술탄을 내쫓았던 연합진보위원회다.
같은 일을 다시 못할 리가 없다. 실제로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실세가 되는 자가 바로 이스마일 엔베르.
처칠의 전함 NTR을 계기로 동맹국 편으로 참전, 오스만 제국을 제1차 세계대전에 끌어들이는 장본인 되시겠다.
‘엔베르라. 이 양반도 한 뇌절해서 여러모로 불안한 인간이란 말이지.’
물론, 그는 오스만 제국 내 친독파의 대명사 같은 인물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은 영국이 우리 편이 된 만큼 미스터 갈리폴리 때문에 이스마일 엔베르가 독영협상을 뒤로하고 러불동맹 쪽으로 붙을 가능성이 없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는 없었다.
당장 오스만 제국의 세계대전 참전도 술탄인 메흐메드 5세를 비롯한 많은 이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이스마일 엔베르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것에 가까웠으니.
‘아무리 그래도 영국한테 전함을 빼앗겼다고 오스만 제국이 독일을 등지고 적국인 러시아와 같은 편을 먹으려고 하진 않을 것 같지만.’
하지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세상의 무서운 점이었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스마일 엔베르의 성향상 주의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처칠이 여기서도 금발 대머리 양아치 성격을 못 버려 또 전함을 빼앗으면 나중에 전쟁 끝나고 우리가 영국한테 보상 얻어 내주겠다고 약속이라도 하지 뭐.’
“후작님?”
“아,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하느라. 어쨌든 오스만 제국 내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큰 만큼 강화 회담도 한번 엎어질 확률이 높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군요.”
생각만 해도 절로 머리가 아프다는 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 그레이 외무장관,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비하면 이건 약과라는 것을 그는 알까?
* * *
우당탕!
“이스마일 엔베르 베이,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무슨 짓이긴. 조국을 슬라브 놈들에게 팔아먹은 매국노들을 쫓아내고 제국을 지켜 내는 것이지.”
예상대로 얼마 안 가 콘스탄티니예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스마일 엔베르는 후에 그와 삼두정치를 형성하는 메흐메트 탈라트 파샤(Mehmed Talaat Pasha), 아흐메드 제말 파샤(Ahmed Djemal Pasha)와 함께 오스만의 문(Sublime Porte, 오스만 제국 정부의 별칭)을 군홧발로 짓밟고 오스만 제국을 장악했다.
“발칸 동맹과의 강화는 없다. 에디르네 할양도 물론이다. 오스만 제국은 끝까지 싸울 것이다!”
그렇게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런던에서 승리를 자축하며 전리품 분배에 정신이 팔려 있던 발칸 동맹은 창백해진 얼굴로 부랴부랴 전장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예상 못 한 오스만의 반격이었다.
“오스만군이 생각보다 격렬하게 저항하는군요. 차탈카 전선과 갈리폴리 전선이 정체되었습니다.”
“결국,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에디르네 점령에 달려 있군.”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반격은 전황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스마일 엔베르가 호기롭게 강화조약을 걷어차고 전쟁의 반전을 꿈꿨던 것과 달리, 승리의 여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오스만 제국을 외면한 지 오래였으니까.
특히 이미 강화 회담이 열리기도 전에 불가리아군은 에디르네를 포위한 상태였고, 여기에 세르비아군이 프랑스에 사들인 38문의 공성포와 120mm, 150mm 곡사포들을 가지고 불가리아군에 합류하면서 더욱 상황이 안 좋아졌다.
펑! 퍼펑! 펑!
“제길, 저 망할 도시가 끈덕지게 버티는군.”
“포탄으로 무너트릴 수 없다면 더 많은 포탄을 떨어트리면 뿐.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공격합시다.”
그러나 에디르네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에디르네는 독일 군사 고문단과 공성전 전문가들에 의해 요새화된 요새도시.
오스만군에겐 무적이라고 불리는 도시였다.
하지만 니콜라 이바노프 장군이 이끄는 불가리아군과 세르비아군은 에디르네 공략을 포기하지 않았고, 강화 회담이 파투 나고 전쟁이 재개되자 야간 공격까지 감행하면서 에디르네를 향해 더욱 격렬하게 공세를 가했다.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포병대의 자비 없는 포격에 에디르네는 철저히 파괴되어 갔다.
그러나 불가리아군은 이조차도 부족하다는 듯 여기서 그치지 않고 롤모델인 독일군을 보고 따라 도입한 비행기까지 투입했다.
부우우웅~
“하늘에 적 비행기!”
“씨발, 모두 엎드려!!”
피유우우우~펑! 퍼펑─!
에디르네 상공을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면서 오스만 병사들을 향해 특수개조한 수류탄을 던지는 플라잉 요구르트들.
물론 수백 킬로짜리 항공 폭탄도 아니고, 고작 수류탄으론 적에게 대단한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하늘 위에서의 공격에 익숙지 않은 오스만군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데는 충분했다.
결국, 공성전이 시작된 지 5개월.
휴전 조약이 끝나고 전쟁이 재개된 지 2주 만에 에디르네는 무너졌다.
“……항복하겠소.”
에디르네 방어군의 지휘관이자 5개월 동안 최선을 다해 싸웠던 메흐메트 쉬크뤼 파샤(Mehmed Şükrü Pasha)는 눈물을 머금고 항복했고, 에디르네의 무슬림들과 유대인들은 승리에 취한 슬라브인들에게 사정없이 약탈당했다.
에디르네가 결국 발칸 동맹의 손에 떨어지자 이스마일 엔베르과 오스만 신정부는 절망했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잃은 채 얼마 안 가 강화에 동의, 콘스탄티니예 인근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발칸 동맹에 헌납해야만 했다.
그러나 총성은 멈췄더라도 발칸반도에서의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건 그냥 발칸전쟁이 아니라 제1차 발칸전쟁.
그 뒤엔 당연하게도 두 번째 발칸전쟁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씨앗은 아이러니하게도 제1차 발칸전쟁을 종결지은 에디르네 공성전으로 인해 탄생했다.
[불가리아의 용감한 군인들이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하고 오스만 제국을 패배시킨다!]
“응? 뭐야, 왜 우리 세르비아 이야기는 홀라당 빠져 있어?”
“불가리아 이 새끼들이 미쳤나!”
갈등은 불가리아가 발칸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온 외국 특파원들에게 에디르네 공성전에서 세르비아의 역할을 쏙 빼고 자신들의 공적만 부각하는 짓을 저지르면서 시작되었다.
당연히 세르비아는 어디서 이딴 같잖은 짓거리를 하나며 항의했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갈등은 곧 북부 마케도니아의 분배 문제로까지 번져 나갔다.
두 군대는 동맹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듯 공동 점령지에서 군사적 대치를 시작했고, 친구에서 원수가 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관계는 제1차 발칸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런던 조약에서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 * *
“합의한 영토 분할안을 이행하지 않겠다니, 이게 무슨 소리요!”
“그 문제에 관해서 우리 세르비아는 다시 합의를 거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소. 단지 그뿐이요.”
1912년 10월.
독일 제국 대표로 런던 조약 체결을 지켜보기 위해 다시 한번 런던을 찾은 나는 조약서의 잉크가 말라붙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대표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발칸 동맹을 통해 발칸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굳건히 하려 했던 러시아 제국 대표단들은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발칸 동맹이 박살 나기 일보 직전이라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결국, 말씀하신 대로 두 번째 발칸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나 보군요.”
“적은 바뀌겠지만요. 그리고 그것은 높은 확률로 불가리아가 될 것입니다.”
내 말에 베니젤로스는 음흉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본래라면 마케도니아의 지분을 주장하며 저 자리에 끼었을 그리스다.
그러나 베니젤로스는 발칸전쟁이 끝나고 나면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갈등으로 인해 발칸 동맹이 폭발하고, 전쟁이 다시 시작되리란 내 말을 듣고선 오히려 한 발짝 물러선 채 싸움을 관망하는 중이었다.
“역시 불가리아가 패배할 확률이 높겠지요?”
“세르비아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도 불가리아에 이를 갈고 있으니까요. 거기다 루마니아까지 움직일 겁니다.”
불가리아 바로 위에 있는 루마니아는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접하지도 않은 탓에 얻을 이득이 하나도 없었기에 제1차 발칸전쟁엔 참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있을 제2차 발칸전쟁에서는 아랫집 불가리아가 나쁜 놈이 되니, 그제야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불가리아에 선전포고한다.
‘그리고 패배한 불가리아는 원한을 잇지 못하고 세르비아와 루마니아에 복수하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동맹국 편으로 참전하지.’
그 결과, 복수심을 증명이라도 하듯 불가리아는 미친 듯이 날뛰며 세르비아를 부수고, 루마니아군과 그리스군을 박살 내며 심지어 발칸으로 원정 온 영국군과 프랑스군까지 털어 버렸다.
얘네 별명이 괜히 발칸의 프로이센이 아니다.
‘물론, 동맹국의 패색이 짙어지니까 가장 먼저 항복하고 탈주하지만.’
어찌 되었든 독일로선 쓸 만한 아군이 하나 늘어나는 것이니, 굳이 제2차 발칸전쟁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루마니아는…… 왕가가 호엔촐레른 방계이긴 한데, 원 역사에서처럼 그냥 러시아 편에 붙을 확률이 높았다.
현 국왕인 카롤 1세는 친독파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페르디난드 1세는 국익을 중시하는 실리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실은 독일계라도 루마니아 정부는 명백한 친러성향이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인 트란실바니아와 부코비나에 침을 흘리는 중이니.’
전황에 따라서 중립을 지키도록 할 수 있겠지만, 일단 루마니아 쪽은 주의하며 두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지금은 그저 나중에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리스를 한 발짝 물러서게 만들고, 불가리아의 원한을 온전히 세르비아에 집중시키는 것으로도 충분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