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전쟁으로 가는 길 (4)
한스가 피우수트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서 독립을 꿈꾸고 있는 피지배 민족 대표들을 만나 자신의 구상을 현실로 옮기며 다가올 대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독일 제국의 대적자인 프랑스 또한 유럽의 평화가 나날이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보스니아 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불이 붙기 시작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갈등과 발칸 반도의 혼란은 프랑스에게 이러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에서 전쟁이 터지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감을 주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면 오헝의 우방인 독일 또한 반드시 참전할 것이고 프랑스 또한 러시아를 돕기 위해 따라서 전쟁에 참전해야 할 테니까.
여기서 프랑스가 오랜 동맹인 러시아를 버린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단순히 의리 문제 때문이 아니다.
만에 하나 러시아가 무너지는 것을 방관한다면 프랑스는 유럽에서 고립되고 말 것이고 그것은 곧 과거보다 더 굳건하고 강력한 비스마르크 체제의 부활을 의미했고 이는 위대한 프랑스가 독일과 영국에 굴복하게 되는 미래를 불러오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프랑스는 그 무엇보다 두렵고 끔찍한 악몽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특히 육군도 육군이지만 해군 전력의 경우, 프랑스 해군과 동맹국인 러시아 해군을 다 합쳐도 영국은 어림도 없고 독일 제국에게도 우세를 점하지 못하는 상황.
그렇기에 처음엔 프랑스 해군도 프리드리히급 전함을 건조해 이를 극복해 보려고 했지만, 얼마 안 가 독일에서 기어코 원 역사의 슈퍼 드레드노트에 해당하는 카이저급 전함을 진수해 버리면서 프랑스 해군의 작은 꿈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정석적인 방법으론 해적 놈들과 크라우트 놈들의 함대를 막지 못한다. 우리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이대로라면 프랑스 함대는 아무것도 못 해 본 채 위대한 프랑스의 바다를 게르만 향우회 놈들에게 내주어야 하는 것도 모자라 전쟁 내내 통상파괴전에 시달려야 한다.
또한, 영국이나 독일이 우세한 해군 전력을 앞세워 프랑스 해안에 상륙해 배후를 칠지도 모르는 일.
그렇기에 프랑스는 상륙이 가능한 해안이란 해안을 해안포대로 도배하는 한편, 비대칭 전력인 잠수함의 대량 도입으로 어떻게든 부족한 해군 전력을 메꿔 보려고 시도했다.
물론 프랑스 해군이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프랑스 육군도 놀고 있지만은 않아서 항공대 설립이나 포병 전력 확충 등 재정이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군사 증강을 이어 나갔다.
물론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 같은 프랑스 좌파들은 언제부터 프랑스가 프로이센이 되었냐며 하루가 멀다고 정부를 씹어 대기 바빴지만.
그러나 프랑스인 대부분은 독일 제국과 대영제국이란 사악한 동맹에 맞서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정부의 군대 증강을 방관하거나 도리어 지지했다.
아직 프랑스인들은 보불전쟁과 베르사유의 치욕을 잊지 않았다.
위대한 프랑스가 또다시 프로이센 돼지들의 더러운 군홧발에 밟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군대는 필수 불가결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라면 자유를 사랑하는 프랑스 시민들도 이번만큼은 정부의 군국주의적 행보를 눈감아 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프랑스의 거침없는 행보는 군대뿐만이 아닌 외교 쪽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는 현재 보스니아 위기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제대로 감정이 상한 이탈리아의 미수복영토에 대한 탐욕을 부추기며 삼국동맹에서 이탈시켜 러불동맹으로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1년 8월.
“조프르 참모총장님! 방금 독일 제국에 파견한 첩보원들로부터 독일군의 전쟁 계획을 입수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오오! 그것이 정말인가?!”
전쟁에서 프랑스가 승기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에 지난달 프랑스 육군의 참모총장 격인 총사령관이 된 조제프 조프르(Joseph Jacques Césaire Joffre)를 비롯한 프랑스 군부가 술렁였다.
* * *
“……그러니까 크라우트 놈들은 전쟁이 벌어질 시 알자스-로렌 방면이 아닌 벨기에를 통과해 우리 프랑스 방어선을 우회하려 한단 말이지.”
생각을 정리하듯 관자놀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조제프 조프르의 물음에 회의실에 앉아 있던 프랑스군 장성들과 참모들이 침음성과 안도의 한숨을 동시에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군의 전쟁 계획은 프랑스 군부가 생각하고 있는 대독일전략의 허점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 프랑스 참모본부는 독일과 전쟁이 발발했을 시, 독일군이 보불전쟁 때처럼 무조건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인 알자스-로렌으로 오리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1913년에 만들어지는 프랑스의 전쟁 계획인 제17 계획(Plan XVII)처럼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알자스-로렌으로 진격해 무적의 참호 방어선을 구축하고 독일군을 맞이하려고 했다.
그리고 독일군의 전력이 약화하면 대규모의 화력 공세와 함께 엘랑 비탈의 정신으로 반격을 개시, 알자스-로렌을 탈환한다.
그것이 프랑스가 구상하고 있던 전쟁 계획이었다.
물론 제17 계획이 그랬듯이 그 이후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독일군이 알자스-로렌이 아닌 벨기에에 방면으로 프랑스군을 우회해 파리로 달려온다?
이걸 모르고 당했다면 프랑스군은 완전히 닭 쫓던 개가 되어 또다시 독일군에게 파리를 헌납했을 것이다.
“독일 제국의 벨기에 우회 가능성은 작다고 보았건만, 이 전쟁 계획을 설계한 것이 전임 독일 육군참모총장인 슐리펜이라고 했나?”
“예. 계획의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 슐리펜계획이라고 하더군요.”
“역시 유럽에 이름을 떨친 명 전략가답군. 하마터면 완전히 허를 찔릴 뻔했어.”
조프르는 죽을 뻔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기분을 느끼며 그의 친우이자 육군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얼마 전 소장으로 진급해 사단장이 된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알자스-로렌에만 집착하는 것은 좋지 않다며 저지대 방면, 북부 해안가의 독일군 사단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포슈는 원 역사에서 영국 캠벌리 참모 대학의 교장이자 친프랑스파인 윌슨과 영불 협동에 대해 논하면서 독일의 벨기에 침공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것이 과연 전면 침공일지, 아니면 기만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침공인지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최초의 연합군 총사령관이란 명성은 헛되이 얻은 게 아니라는 듯 포슈는 이번에도 독일군의 벨기에 우회를 우려하고 있었고 그의 말대로 정말 독일군은 전쟁이 발발했을 시 벨기에 우회를 계획하고 있었다.
‘역시 포슈를 부사령관(참모차장)으로 삼아야 했는데.’
애초에 조프르 자신과 나이가 한 살 밖에 차이 나지 않은 포슈가 이제야 막 소장이 단 현실이 말이 안 되었다.
하지만 전 프랑스 대통령 에밀 뤼베가 못 박은 정교분리 정책으로 인해 현 프랑스 제3공화국은 가톨릭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포슈는 하필이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게다가 그의 형제인 제르맹 포슈가 프랑스 정부에 제대로 밉보인 예수회 수사였으니.’
덕분에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 포슈는 불이익을 당하며 군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
물론 그의 진급이 늦어진 건 보불전쟁 당시 독일군이 알자스-로렌을 군홧발로 짓밟는 것을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보며 독일에 대한 복수를 맹세한 포슈가 프랑스의 적은 오직 독일이란 이유로 빠른 진급이 보장되는 식민지 근무를 거부한 탓도 있었지만.
어쨌든 전 총리인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Benjamin Clemenceau)가 강경한 반교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포슈의 능력을 눈여겨보아 그를 육군대학의 감독(교장)으로 삼지 않았더라면 포슈는 한직을 떠돌다 나이 문제로 퇴역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클레망소는 1909년에 퇴임했고 현 전쟁 장관인 아돌프 메시미(Adolphe Marie Messimy)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포슈의 신앙심을 꺼렸다.
그렇기에 그는 조프르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포슈를 참모차장 격인 부사령관으로 삼는 것을 거절했다.
그리고 그 대신으로 부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 원 역사에서 제17 계획을 입안했던 에두아르 드 카스텔노(Édouard de Castelnau)였다.
물론 그 또한 유능한 장성이었지만, 조프르로선 어이가 없던 것이 카스텔노는 그 신앙심 깊은 포슈조차 못 참고 한마디 했을 정도로 보수적인 신앙심을 가진 가톨릭 신자였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다른 프랑스군 장성들은 그를 ‘싸우는 수사’, ‘예수회 장군’으로 부를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러나 영국이 과연 독일군이 벨기에에 발을 들이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이쯤 되면 그냥 메시미 전쟁 장관이 그냥 포슈를 부사령관으로 삼기 싫어서 대충 둘러댄 것이 틀림없다고 조프르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사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카스텔노가 손을 들고 말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벨기에는 중립국이었고 벨기에의 중립은 영국으로부터 보장받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영국은 독일의 동맹이지. 가능성은 충분히 있네. 게다가 이 슐리펜계획에도 ‘벨기에 통과는 영국과의 논의가 잘 풀리고 있기에 문제없을 것’이라고 나와 있지 않은가.”
하지만 슐리펜계획과 조프르가 신뢰하는 포슈의 말이 더해져 조프르의 생각은 독일이 벨기에로 올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벨기에 우회는 독일 제국에게 있어서 프랑스의 허를 찌를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협잡질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로 악명높은 독일의 노란 비스마르크, 한스 폰 초이라면 영국을 충분히 구슬리고 남을 것이라고 조프르는 생각했다.
처음 그의 이름을 들었을 땐 그저 운 좋은 동양인 꼬맹이라 생각했지만, 그 악마 같은 놈이 영독협상으로 프랑스의 뒤통수를 화려하게 갈겨 버린 이후 한스 폰 초이는 조프르와 프랑스인들의 머릿속에서 독일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요주의 인물로 떠올랐다.
괜히 그를 프랑스에 잊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 준 ‘비스마르크’라 부르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조프르는 한스 폰 초이라면 충분히 벨기에 문제에 대해 영국과 합의를 보고도 남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전후 프랑스 영토를 약속하며 벨기에까지 이미 한통속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재작년에 온갖 욕을 먹고 사망한 레오폴드 2세의 뒤를 이어 벨기에 국왕으로 즉위한 알베르 1세 또한 영국 왕실과 독일 황실의 친척이지 않은가.
물론 지금의 시대는 혈연을 통한 왕실 간의 커넥션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였지만 아무래도 공화국인 프랑스로선 영국과 독일의 왕실 네트워크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우리는 슐리펜계획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인 법. 필요하다면 전쟁 발발 시 벨기에를 독일보다 먼저 선제 침공해 참호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도 염두에 둬야겠지.”
중립국인 벨기에를 독일보다 먼저 공격하자는 호전적인 조프르의 말에 참모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조프르의 의지는 확고했다.
“독일 놈들을 다시 위대한 프랑스에 발을 들이게 둘 순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우리는 여전히 독일과 비교해 열세에 처해 있는 상황. 이를 타개하기 위해선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
특히 벨기에엔 리에주와 나뮈르로 대표되는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요새들이 있다.
이를 독일군이 오기 전에 먼저 손에 넣는다면 전황을 보다 프랑스에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벨기에에 대한 영국의 중립 보장은…….”
“하! 그것을 우리가 신경 쓸 이유가 있는가?”
없었다. 영국 놈들은 어차피 독일과 붙어먹은 지 오래다.
그렇기에 조프르는 전쟁이 터지면 독일을 도와 참전할 게 뻔한 영국의 중립 보장 따윈 신경 쓸 가치도 없다 생각했다.
그러나 조프르와 프랑스인들은 두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첫째, 영국은 프랑스의 생각보다 의리가 없었다.
영국은 위기에 빠진 친구를 돕기 위해 기꺼이 달려오는 소년 만화 주인공보단 필요하면 가차 없이 동료를 내버리는 냉혹한 악역에 가까웠으니까.
그리고 둘째, 한스가 과연 기밀 중의 기밀인 슐리펜계획이 프랑스에 유출되는 것을 멍청하게 지켜보고만 있었을까?
정답은 ‘아니오’였다.
* * *
“프랑스가 미끼를 덥석 문 모양이군요. 슐리펜 백작님.”
“허허, 그러게나 말이야. 이게 진짜로 통하는구만.”
강가에 낚싯대를 드리운 슐리펜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금쯤 프랑스는 슐리펜계획을 보며 독일군의 계획을 읽었다며 희희낙락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깨달았을 때 프랑스인들은 과연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들의 손에 들어간 슐리펜계획이 사실 내가 일부러 유출한 ‘가짜 슐리펜계획’이란 진실을 말이다.
“지금쯤 조제프 조프르와 프랑스 참모본부는 벨기에 선제공격을 고려하고 있을 것입니다.”
영독협상에 대한 프랑스의 두려움과 엘랑 비탈 한마디로 표현되는 현 프랑스군의 공세 지향 주의, 프랑스군 장성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참호전 만능주의를 생각해 본다면 가능성은 매우 컸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는 추측에 불과하고 막상 전쟁이 터지면 프랑스가 벨기에 선제 침공을 망설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것도 사실.
그러나 그때 독일군이 정말 벨기에로 갈 것 같이 움직인다면?
휘익!
“오, 월척이군!”
방금 슐리펜이 낚아 올린 물고기처럼 되는 거다.
덩달아 99.9% 확률로 참전을 망설일 영국도 같이 전쟁에 끌어오고.
물론 프랑스가 기어코 알자스-로렌으로 온다고 해도 그때를 대비한 플랜 B도 존재하니 걱정할 것은 없다.
어차피 프랑스가 자발적으로 독일에 대한 굴복을 선택하는 미친 결정을 내리지 않고서야 러시아를 도와 참전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외무장관님.”
오랜만의 프랑스 낚시로 웃음이 절로 나오고 있을 때, 비서가 다급한 얼굴로 내 귓가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방금 주러시아 독일 대사로부터 긴급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러시아 말입니까?”
“네. 표트르 스톨리핀 총리가 암살당했다고 합니다.”
비서의 말에 나는 고개를 올려 안도와 안타까움이 뒤섞인 복잡한 눈으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스톨리핀이 죽었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