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 전쟁으로 가는 길 (2)
“헬무트. 그동안 참모총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느라 고생 많았네. 이제부턴 전쟁 장관으로서 나를 계속 도와주게.”
“예, 폐하. 폐하의 신뢰에 앞으로도 계속 보답하겠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빌헬름 2세는 몰트케를 참모총장에서 프로이센 전쟁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몰트케는 의외로 반발 없이 순순히 이를 받아들였다.
카이저가 자신을 내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의 몸 상태가 안 좋은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오히려 한시름 놨다는 얼굴인 것이 어쩌면 위대한 삼촌을 따라잡는 것에 몰트케 자신도 큰 부담감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르지.’
몰트케는 멘털이 유리긴 해도 적어도 자기 분수는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원 역사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부터 몰트케가 무능한 행보를 보이자 화가 난 카이저가 구박했을 때도 자신은 단 한 번도 삼촌인 대 몰트케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울먹였을 정도였다니까.
삼촌만큼 능력이 없다는 것은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삼촌 같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주길 기대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몰트케가 참모총장에서 물러나자 빌헬름 2세는 나와 뷜로 총리를 불러 그의 후임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마켄젠 장군은 어떻습니까?”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뷜로 총리였다.
그는 ‘마지막 후사르’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Anton Ludwig August von Mackensen)을 참모총장으로 추천했다.
비록 말년에 나치에 반대하다 히틀러에게 뇌물로 땅(참고로 그 땅은 원래 황실 소유라 빌헬름 2세는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었다)을 받아먹고 입을 다문 흑역사가 있긴 하지만, 능력 자체는 뛰어난 명장 중 한 사람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때 영원한 콤비인 참모장 ‘스핑크스’ 한스 폰 젝트(Johannes Friedrich Leopold von Seeckt)와 함께 동부전선과 루마니아 등지에서 활약하며 수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고.
그러나 카이저는 영 시원찮은 얼굴이었다.
“흠, 마켄젠의 능력은 뛰어나고 나 또한 그를 신뢰하지만, 말은 마구간에만 가둬 놓으면 안 되는 법이네. 그는 참모본부보다는 전장을 뛰어다니는 것이 더 어울려.”
“그럼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Ludwig von Beneckendorf und von Hindenburg) 대장은…….”
“올해 3월에 퇴역했습니다.”
“아, 그랬지.”
내 말에 뷜로 총리가 잊고 있었다는 듯 혀를 찼다.
물론 퇴역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반대했겠지만.
그가 강경한 군국주의자인 게 문제가 아니다.
현 독일 제국 장성 중에 군국주의자가 아닌 사람을 찾는 게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려운 판국에 그런 걸 신경 썼다간 독일 제국에서 일 못 한다.
그러나 힌덴부르크는 배후중상설을 퍼트린 주범인 동시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 시절 히틀러에게 권력을 쥐여 줘서 독일의 민주정을 박살 냈다는 점은 둘째 치더라도 나이도 많고 그만큼 고집도 센 터라 나와 안 맞을 가능성이 너무나도 농후했다.
힌덴부르크와 짝짜꿍했던 루덴도르프야 젊은 데다가 내가 목줄을 잡고 있으니 괜찮지만, 그는 발더제 마냥 날 적대하지 않으면 다행이니까.
적어도 나와의 관계가 나쁘진 않았던 몰트케와는 다른 의미로 골칫거리가 될 것은 분명했다.
“그럼 한스 넌 누가 괜찮을 것 같으냐?”
빌헬름 2세도 힌덴부르크는 별로였는지 이에 관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이번엔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팔켄하인 소장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나는 예전부터 참모총장 후보로 염두에 둔 팔켄하인을 거론했다.
참고로 그는 본래 내년에야 소장이 되지만 내가 슐리펜을 통해 적극적으로 푸시한 덕에 작년 말에 소장 계급장을 단 상태였다.
“팔켄하인이라……. 좋은 생각이군.”
그리고 팔켄하인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카이저 또한 마음에 든다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다만 뷜로 총리는 우려하는 얼굴이었다.
“폐하, 팔켄하인 장군의 능력은 둘째 치더라도 소장을 참모총장에 임명하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소장을 군부의 탑으로 임명한단 말인가.
당장 군부의 장성들부터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뷜로의 말은 일견 타당했지만 잊지 말자.
여기는 독일 제국이었고 제국의 황제는 빌헬름 2세였단 것을.
“그거야 중장으로 진급시키면 해결될 문제 아닌가? 당장 몰트케도 참모총장에 임명할 때 중장이었고.”
빌헬름 2세의 말에 뷜로는 ‘이게 맞나?’라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포기하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말이다.
당장 빌헬름 2세는 원 역사에서 당시 소장에 불과했던 팔켄하인을 한 나라의 국방 장관이라 할 수 있는 전쟁 장관에 임명한 사람이다.
그리고 세계대전이 일어난 다음 해엔 몰트케를 자르고 그를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누누이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 친애하는 장인어른은 자기가 총애하는 사람은 정말 팍팍 밀어주는 사람이다.
짝!
“그럼 결정되었군. 한스, 가서 팔켄하인을 불러오거라.”
“예, 폐하.”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독일 제국의 차기 참모총장이 결정되었다.
* * *
“참모총장 취임 축하드립니다. 팔켄하인 장군님.”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되어 그저 어깨가 무거울 뿐입니다.”
카이저의 행동은 빨랐다.
몰트케가 물러난 지 2주도 안 지나 팔켄하인은 중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공식적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물론 내심 자신이 차기 참모총장이 되길 원하던 나이 든 장성들은 최연소 참모총장의 등장에 불만스러운 얼굴로 투덜거렸지만, 카이저가 자기 입맛에 맞는 코드 인사를 행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언제나처럼 불만은 그저 불만으로 끝났다.
“그나저나 후작께서 작성한 보고서는 저도 잘 보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개인적으로 평가하자면 저 또한 충분히 세계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에 동의합니다. 그것이 정말 이른 시기에 발발할진 아직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만. 그래도 염두는 해 두겠습니다.”
팔켄하인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이 양반은 능력은 좋은데 하필이면 조지 5세 과라서 사교성과 인망이 제로인 게 문제다.
실제로 그를 좋아한 건 빌헬름 2세랑 얼마 전에 세르비아에 이어 이탈리아 선제공격을 주장했다가 기겁한 에렌탈 외무장관과의 갈등으로 인해 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회첸도르프밖에 없었다고 하니.
‘당장은 괜찮겠지만 전쟁이 터지고 나면 이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을 확률이 높겠지.’
어쩌면 원 역사처럼 팔켄하인이 자신의 자리를 오래 유지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나도 그때를 대비하여 대체품인 루덴도르프를 기르는 중이니 걱정은 없었지만.
“군부 내에서도 다가올 대전쟁에 대비하여 이런저런 의견을 내는 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참모본부의 수석 참모장교인 후티어 소장을 비롯한 몇몇 참모들은 기관단총을 활용한 침투 전술과 이를 시행할 침투 부대를…….”
“죄송합니다. 외무장관님, 말씀하신 ‘손님’이 곧 도착하실 시간입니다.”
언제나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내뱉는 중인 팔켄하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외무청의 부하직원이 내 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는 팔켄하인을 향해 미안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참모총장님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선약이 있다는 것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군요.”
“아, 괜찮습니다. 바쁘신 몸이니 어쩔 수 없지요.”
나는 팔켄하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외무청으로 향했다.
지금부터 내가 만나야 할 손님은 어떤 의미론 팔켄하인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었으니까.
“손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두어 번 노크한 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엔 거친 콧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의 사내가 나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앉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유제프 클레멘스 피우수트스키(Józef Klemens Piłsudski).
폴란드의 독립 영웅이자 훗날 신생 폴란드 제2공화국 국부.
그리고 세계대전과 전후의 판도를 독일 제국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내 계획의 새로운 체스 말이었다.
* * *
“반갑습니다, 피우수트스키 장군. 이름과 명성은 오래전부터 익히 들었습니다.”
“입에 발린 말은 필요 없소. 한스 폰 초이 외무장관.”
피우수트스키는 한스의 방긋방긋한 미소에도 불구하고 외무청으로 오는 길 내내 그러했던 것처럼 여전히 퉁명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난 오늘 당신이 나와 폴란드에 관한 긴밀한 논의를 하고 싶다고 했기에 이곳에 온 것이오.”
“어째 전혀 안 믿는다는 듯한 목소리로군요.”
“장관이 내 입장이었다면 당신을 믿겠소?”
피우수트스키의 빈정거림엔 일리가 있었다.
피우수트스키가 한스를 신뢰하기엔 폴란드와 폴란드인에 대해 폴란드 분할 이후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프로이센과 그 후신인 독일 제국이 보여 준 행동이 행동이었다.
물론 피우수트스키와 폴란드인들이 가장 증오하는 것은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숙적인 러시아 제국이었지만 그 러시아와 함께 폴란드를 나눠 가진 독일 또한 러시아 못지않게 폴란드인들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특히 독일은 프로이센 시절 일어난 1848년 대폴란드 봉기 당시 프로이센은 군대를 보내 폴란드인을 무력 진압하고 포젠(Posen, 오늘날의 포즈난)을 프로이센 영토로 합병한 전적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폴란드인을 투옥하고 고문했다.
또한, 독일 제국은 현재 진행형으로 자국의 구 폴란드 영토에 대대적인 독일화 정책을 진행 중인 것은 물론 독일인을 대거 이주시켜 폴란드인들의 영향력을 줄여 나가고 있으니.
피우수트스키가 독일 제국을 향해 반감을 갖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한스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피우수트스키의 말을 부정하지 않고 그저 피식하고 씁쓸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장군의 태도는 이해합니다. 저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도요. 하지만 제 제안은 장군과 폴란드에도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하, 이익이라. 거기엔 물론 독일 제국도 포함되겠지.”
“예, 저는 어느 한쪽이 손해를 보는 것보단 조금 양보하더라도 양쪽 모두가 이익을 보는 것을 더 선호하거든요.”
그리 말한 한스는 손을 내밀어 여전히 믿지 못하겠단 표정을 짓고 있는 피우수트스키에게 자리에 앉으라 권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짧은 고민 끝에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 앉았다.
애초에 그는 믿음이 안 간다고 해서 한스의 말을 들을 생각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베를린에는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왜냐하면 이 상황에서 아쉬운 것은 결국 피우수트스키와 폴란드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장군께서는 작금의 유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평화 그 자체지.”
물론 그들만의 평화지만.
피우수트스키는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 열강들과 달리 러시아의 압제 아래서 고통받고 있는 폴란드를 떠올리며 그리 덧붙였다.
“네. 몇 번 흔들리긴 했어도 유럽은 평화롭지요. 하지만 그 평화가 언제까지 갈까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요?”
“이미 장군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유럽에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장군께서도 다가올 대전쟁을 기회로 폴란드 독립을 이루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폴란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
피우수트스키는 정곡을 찌르는 한스의 말에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실제로 피우수트스키는 유럽에서 열강 간의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한 인물 중 하나였고 폴란드 독립을 위해선 결국 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1906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묵인을 받아 준군사조직을 창설했고 이는 1908년에 적극 저항 연맹(Związek Walki Czynnej, ZWC) 재편성되어 훗날 폴란드 군단과 신생 폴란드군으로 진화를 하게 된다.
참고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프로이센과 함께 삼국 분할을 통해 폴란드를 갈라 먹은 장본인 중 하나인데 왜 피우수트스키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협력 중이냐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폴란드에게 있어 절대 악인 러시아의 적인 동시에 삼국 중에서는 그나마 폴란드인들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국가였기 때문이다
물론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호의엔 피우수트스키와 폴란드인들을 이용해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안심하십시오. 저와 독일 제국은 장군과 폴란드인들의 폴란드 독립운동을 훼방 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응원하는 쪽에 가깝죠.”
이어진 한스의 말에 피우수트스키가 무슨 말을 하고 싶냐는 듯 그의 수염만큼이나 거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에 한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독일 제국의 손을 잡으시죠. 그러면 그토록 바라시는 폴란드의 독립을 장군과 폴란드인들의 품에 안겨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