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40화 (140/193)

140화 : 전쟁으로 가는 길 (1)

“드디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군. 남작. 아니, 이젠 후작이었지. 이것 참 오랫동안 자네를 남작으로 불러서 그런지 아직도 헷갈린다니까.”

“하하, 괜찮습니다. 어쨌든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쇤 장관님.”

루이제와 잊히지 않는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빌헬름 2세는 빌헬름 폰 쇤 장관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나를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성인이 된 지도 꽤 되었고 황제의 사위를 일개 보좌관으로 둘 수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청년 튀르크 혁명부터 중국의 분열까지 머리 아픈 일이 계속 터진 탓에 처음 봤을 때보다 10년은 늙어 버린 쇤 장관은 자신을 교체한단 말에 뛸 듯이 기뻐했다.

얼마나 기뻐했는지 내가 인수인계를 위해서 그의 집무실에 오기도 전에 벌써 방안의 짐을 다 뺐더라.

사실 작년에 임기 마치고 사임하려고 했는데 빌헬름 2세가 내가 루이제랑 결혼할 때까진 기다리라고 말렸거든.

덕분에 마치 폭탄을 떠넘기는 것만 같은 쇤 장관의 빠른 행동이 살짝 떨떠름하긴 해도 나 또한 쇤 장관에 대한 별다른 죄책감 없이 외무장관 자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당분간은 외교 쪽은 쳐다도 보지 않을 것이라네.”

“아, 네…….”

“그럼 열심히 하게나.”

쇤 장관이 행복한 얼굴로 자유를 찾아 떠난 뒤, 나는 그가 떠난 뒤 휑한 집무실 책상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드디어 이 책상의 주인이 되었다.

그만큼 내 어깨 위에 올려진 책임도 막중해졌지만.

어쨌든 마음 같아선 승진을 기념해서 오늘 저녁엔 술을 잘하지 못하긴 해도 와인을 따 루이제와 축배를 올리고 싶은 기분.

그러나 아쉽게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빌헬름 2세를 처음 만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911년 중순.”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까지 3년 남았다.

역사가 뒤틀려 빨라지거나 느려지거나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나도 세계대전에 대비해 많은 일을 해 왔고 어느 정도 결실을 보았다.

항공대는 순항 중이었고 전차도 내년 말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갈 예정이며 전차가 전장에서 활약하는 것은 보고 죽겠다며 건강 관리에 힘쓰고 있는 슐리펜은 자신의 전쟁 계획을 거의 마무리 지었다.

“이젠 전쟁 준비의 마무리에 들어가야지.”

외무장관이 되었으니 그동안 계획만 세워 왔던 내 구상을 현실로 옮길 때가 왔다.

물론 그 전에 집안 정리부터 해야겠지만 말이다.

“우선 몰트케를 참모총장 자리에서 치우자.”

이젠 때가 되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몰트케는 아직 자신의 무능함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터라 카이저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상태였고 우리 장인어른께선 아끼는 사람은 무진장 아끼니까.

보다시피 나도 그 덕을 크게 봤긴 했는데 몰트케의 경우엔 방해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여기선 번거롭지만, 카이저에게 경각심을 심어 줄 필요가 있었다.

다가올 위기에 있어 몰트케는 부적절하다는 밑밥을 깔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몰트케 건 말고도 내 계획을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행동이기도 했지만.

스윽─

하여튼 나는 두근두근한 표정으로 오랫동안 심혈을 들여 만들어 왔던 보고서를 꺼냈다.

드디어 이것을 공개할 때가 왔다.

* * *

“한스도 오늘부터 외무장관이군.”

빌헬름 2세는 집무실에서 서류를 결재하던 도중 여러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월이란 왜 이리 덧없을 정도로 빠른 것인지.

처음 만났을 땐 꼬맹이에 불과했던 한스가 어느새 제국의 장관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물론 큰 반발 없이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루이제와 결혼한 덕이 컸지만.

뚜둑─

“젠장, 나쁜 놈 같으니.”

결혼식은 진작에 치른 것도 모자라 신혼여행까지 다녀왔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위에 대한 괘씸한 감정에 카이저는 펜을 쥐고 있는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딸바보는 영원한 딸바보인 법이다.

“폐하.”

“무슨 일인가?”

“초이 외무장관이 폐하 앞으로 보고서를 보내셨습니다.”

악마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날개가 펄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더니.

아무래도 한스 녀석이 외무장관이 되자마자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빌헬름 2세는 뷜로에게 말해 사위를 위해 외무청의 업무를 늘려 줘야겠다 마음먹고 시종에게서 한스가 보낸 보고서를 받아들였다.

[외교적 시선에서 본 향후 유럽의 정세 분석 보고서]

“거, 이름 한번 쓸데없이 거창하게 지었군.”

하긴 옛날부터 이런 쪽 센스가 뒤떨어졌던 한스다.

카이저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보고서의 앞표지를 넘겼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모, 모든 것을 끝낼 전쟁이라고?”

빌헬름 2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사색이 되어 창백하게 질렸고 그의 목소리엔 전쟁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는 도저히 이 안에 적힌 글들을 믿고 싶지 않다는 듯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한스는 말했다.

작금의 유럽은 열강들의 갈등이 극에 달한 상태로 이미 여러 번의 위기를 통해 증명되었듯 조그마한 성냥불 하나가 전 유럽을 불태울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발생한 열강들의 전쟁은 지금까지 인류가 겪었던 그 어떤 전쟁보다 격렬하고 잔인하며 거대해질 것이며 종국엔 상대방이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못할 것이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끝낼 전쟁, 세계대전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미치겠구만……!”

먼발치에서나마 겪은 전쟁이라곤 그가 어렸을 때 일어난 보불전쟁이 전부였던 빌헬름 2세로선 이해하기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카이저는 외교적으로 무능했을 뿐, 적어도 융커들보단 현실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인물.

그리고 카이저의 이성과 판단은 이 망할 보고서에 적힌 일들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외치고 있었다.

“거기 누구 있나!”

“폐하? 무슨 일 있으십니까?”

“한스, 한스 이 자식을 당장 내 앞으로 데려와!”

카이저의 불호령에 깜짝 놀란 시종이 대답할 생각조차 못 한 채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이 망할 사위 놈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이 묵시록의 예언서를 자신에게 보냈는지 알기 위해.

* * *

“……끔찍하군.”

빌헬름 2세가 나를 집무실로 소환한 후.

마찬가지로 카이저에게 불려 와 내가 쓴 보고서를 본 뷜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일그러진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나도 젊었을 때 보불전쟁에 종군하면서 두 눈으로 직접 전쟁을 보았지. 그런데 이 보고서에서 가정하고 있는 전쟁은 내가 겪은 전쟁보다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더 끔찍해.”

하긴 뷜로로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괜히 대전쟁이라 부르겠는가?

인간성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그저 인간의 목숨을 숫자로만 계산하게 될 정도로 그 어떤 인류도 본 적 없는 참혹한 전쟁이었던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다.

이 시대에 이걸 보고 ‘와, 끝내준다!’라고 눈을 반짝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미치광이이거나 소시오패스가 분명했다.

“뷜로, 말해 보게. 자네가 보기엔 이 ‘대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보이나?”

“후우……. 불행하게도 그렇습니다.”

빌헬름 2세가 제발 아니라고 말해 달라는 듯한 얼굴로 물었지만 뷜로는 차마 이것만큼은 돌려 말하지 못하겠다는 듯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 이 보고서를 가져왔다면 그냥 질 나쁜 농담으로 여겼을 겁니다. 그러나 이 보고서를 가져온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새로운 외무장관이죠. 그리고 지금까지 그의 말이 틀린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나를 바라보는 뷜로의 얼굴은 그래서 더 문제라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 않은가.”

“예, 세상사가 어떻게 될지는 저 위에 계시는 주님만이 알고 계실 테니까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모로코, 보스니아, 페르시아 등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위기는 이미 여러 차례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평화롭게 일을 마무리 지었지만 이젠 그것도 점점 한계에 달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내가 말한 위기들 모두 자칫 잘못했다간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했던 사건들이었다.

그만큼 지금의 유럽은 언제 어디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제1차 세계대전이 사라예보가 아니더라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란 것은 결국 이 때문이다.

“으음, 그러고 보니 최근 군부 내에서도 유럽 열강들의 전쟁이 자주 논쟁거리가 되곤 한다고는 나도 들은 적이 있다.”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빌헬름 2세가 불현듯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몇십 년 후를 가정한 이야기였지. 하지만 한스 너의 보고서는 길어도 10년 안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상정하고 있구나.”

“그만큼 현 국제 정세가 겉으론 평안해 보여도 속으론 낭떠러지에 매달린 상태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외무장관으로서 제 임무는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 모두가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가 취임 첫날부터 대전쟁이 터질 것이라고 묵시록의 예언을 들고 온단 말이냐? 내가 사위만 아니었으면 진짜…….”

빌헬름 2세가 꿀밤이 마렵다는 얼굴로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뷜로도 툭하면 폭탄을 터트리는 게 어릴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며 투덜거린 것은 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종말의 가능성을 눈앞에서 보고도 한눈을 팔 수 있을 정도로 멍청하지도, 대범하지도 않았다.

“후……. 그럼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끝낼 전쟁이 일어날 불확실한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군. 참 간단한 일이 아닐 수가 없어.”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와 관련해 걱정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걱정?

“참모총장 말입니다.”

“몰트케? 그가 왜?”

빌헬름 2세가 여기서 왜 몰트케의 이름이 나오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 들어 몰트케 참모총장의 건강 상태가 나빠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의 몸이 걱정되는 것도 것이지만 전 이로 인해 참모총장이 만약의 경우에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으음…….”

내 말에 빌헬름 2세가 그럴 수도 있다는 듯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몰트케는 실제로 얼마 안 가 뇌졸중을 일으킬 정도로 요즘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는 원래도 신지학 같은 오컬트에 지나치게 의지할 정도로 상당히 심약했던 몰트케의 정신상태 큰 영향을 끼치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보여 주었던 그의 무능한 행동에 일조했다.

“지금 몰트케 참모총장의 몸으론 대전쟁이란 지금까지 그 어떤 전쟁보다 거대한 대전을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참모총장은 어디 보통 막중한 자리입니까?”

“하긴 나 또한 요즘 그의 안색이 날이 갈수록 안 좋아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다. 게다가 네 말대로 만약 전쟁 중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원 역사에서의 몰트케의 최후도 비슷했다.

몰트케는 왜 넌 네 삼촌보다 못하냐는 빌헬름 2세의 구박과 전쟁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참모총장에서 해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16년에 군 행사에 참석했다가 뇌졸중이 재발하는 바람에 다신 눈을 뜨지 못했으니까.

“저 또한 몰트케 참모총장과 친분이 있는 만큼 그의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참모총장 자리에 계속 앉아 있는 것은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 제국에게도 독이 될 것이다.

그러니 몰트케는 이만 퇴장해 집에서 몸조리에나 신경 써 줬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카이저는 이대로 몰트케를 내치긴 미안한 모양이다.

“하지만 몰트케를 이대로 군에서 물러나게 하는 건 조금 그렇구나.”

뭐, 이래야 우리 장인어른이다.

그러니 여기선 플랜 B로 가야 할 것 같다.

“그러면 몰트케 참모총장을 프로이센 전쟁 장관에 임명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전쟁 장관?”

“적어도 참모총장 자리보단 부담이 덜할 것이고 또 몰트케 참모총장은 참모총장이 되기 전엔 병참감이었지 않습니까? 오히려 참모총장보다 더 적격이라 생각합니다.”

“호오, 확실히…….”

사실 전차 도입도 보여 줬던 몰트케의 모습을 생각하면 전쟁 장관도 좀 그렇긴 한데 도입할 만한 신무기는 거의 다 도입했고 적어도 몰트케가 참모총장으로 있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문민통제를 바움쿠헨 해먹은 독일 제국 특성상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을 주도하는 것은 내각이 아닌 군부가 될 테니까.

적어도 전쟁 수행에 방해는 안 될 거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요. 몰트케 아저씨.’

이게 다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다.

오히려 잘하면 내 덕에 원 역사보다 수명이 늘 수도 있으니 나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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