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 세 독수리
한스와 루이제의 결혼식이 성황리에 끝난 후, 두 사람은 영국령 몰타로 한 달 동안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우리들의 젊은 신랑·신부가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 아래 성 요한 기사단과 오스만 제국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성벽 위에서 푸르른 바다를 구경하며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을 보내는 동안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은 소위로 임관되어 임지로 향하는 중이었다.
‘젠장, 한스 녀석은 지중해에서 미인 공주님과 꽁냥거리고 있는데 난 냄새 나는 사내놈들이랑 트럭에 실려 군대로 가네.’
분명 장교로 임관하는 것은 꼬꼬마 시절 사관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꿈꿔 왔던 일이지만 왜 이리 배알이 꼴리는 것일까.
어쩌면 얼마 전 한스 녀석이 신혼여행 중 루이제와 꿀이 흘러넘치는 신혼여행이라 쓰고 염장질이라 읽는 편지를 보낸 것 때문에 옆구리가 너무나도 시려서 일지도 모른다.
‘씨, 나도 여자친구 만들고 만다!’
사소한 잘못에도 체벌을 가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엄격한 사관 학교 규칙 탓에 학창 시절 내내 본의 아니게 독신으로 지내야 했던 리히트호펜이지만 이제는 아니다.
리히트호펜은 올해 안에 반드시 애인을 만들겠다며 남몰래 주먹을 쥐고 다짐했다.
물론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은 남아 있는 사진으로도 알 수 있듯이 잘생겼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금발의 독일 미남이었기에 다른 사람들 눈에는 기만으로밖에 안 보이겠지만 말이다.
끼익──!
“항공대 장교분들은 여기서 하차해 주십시오!”
운전병의 목소리에 자동차 산업이 활발해지면서 군에서 그 모습이 많이 보이기 시작한 트럭에서 내린 리히트호펜은 눈 앞에 펼쳐진 광활한 비행장의 모습에 한스의 염장질도 잊은 채 감탄을 내뱉었다.
그는 오늘부터 이곳 독일 제국 항공대의 일원이 되었다.
우연히 하인리히 왕자의 비행 장면이 찍은 영화를 본 이후 가슴에 품어 왔던 꿈인 파일럿이 된 것이다.
물론 그가 파일럿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로 마음먹은 것엔 붉은 남작을 빨리 비행기에 태우려는 한스의 은밀한 부추김도 있었지만.
그러나 늦든 빠르든 리히트호펜은 파일럿의 운명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는 독수리였고 독수리는 하늘을 떠나 살 수 없는 생물이니까.
물론 리히트호펜이 항공대에 들어오기까지의 길이 순탄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아직 독일군 내에서 항공대의 입지가 높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처음 항공대에 지원하겠다고 말했을 때 가족들의 반대가 심했으니까.
만약 삼촌이자 자신과 이름이 같은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소장이 남자가 자신이 믿는 바를 향해 똑바로 걸어간다는데 이보다 자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며 두둔해 주지 않았더라면 꽤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여기가 항공대인가!”
만프레트가 속으로 삼촌에게 감사를 전하는 사이, 옆에서 누군가가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외쳤다.
자신과 같은 장교복에 같은 소위 계급장.
비행장에 정신이 팔려 있느라 미처 몰랐는데 아무래도 항공대에 지원한 괴짜는 만프레트 혼자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안녕, 친구! 너도 항공대에 새로 온 소위야?”
“그래,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라고 해. 너는?”
“왠지 얼굴에서 귀티가 난다 싶었더니 역시 귀족이었구나. 나는 막스 임멜만. 앞으로 잘 부탁해.”
리히트호펜은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눈을 반짝이는 임멜만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나 임멜만을 그저 재미있는 녀석으로 생각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과 달리 한스가 여기 있었다면 속으로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릴의 독수리, 막스 임멜만(Max Franz Immelmann).
그는 항공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봤을 임멜만 기동의 창시자이자 1916년에 전사할 때까지 오스발트 뵐케와 쌍벽을 이루었던 독일의 전설적인 파일럿 중 한 명이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리히트호펜과 마찬가지로 애송이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저 소위님들? 임관 신고하러 안 가십니까?”
“아, 맞다!”
전설은 전설을 알아본다고 금방 친해진 리히트호펜과 임멜만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우자 새로 온 소위들이 부대 입구 앞에서 계속 얼쩡거리는 모습을 보다 못한 초병 하나가 그리 말했다.
마음이 맞는 친구와 만났다는 사실에 정신줄을 놓고 있던 리히트호펜과 임멜만은 첫날부터 징계를 받기 전에 서둘러 항공대 사령부로 향했다.
“독일 제국 항공대에 임관을 명 받은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소위입니다!”
“마찬가지로 독일 제국 항공대에 임관을 명 받은 막스 임멜만 소위입니다!”
“제국 항공대에 온 것을 환영하네. 리히트호펜 소위, 임멜만 소위.”
사령부실에 도착하자마자 큰 목소리로 경례를 하는 두 사람.
이에 엄격해 보이는 얼굴의 나이 든 대령과 그보단 젊은 뚱뚱한 소령이 리히트호펜과 임멜만의 경례를 받아 주며 그들이 항공대에 온 것을 환영했다.
“독일 제국 항공대 사령관을 맡은 에른스트 회프너(Ernst Wilhelm Arnold Hoeppner, 1913년 이후 폰 회프너) 대령일세. 그리고 이쪽은 참모장인 폰 데어 리트 톰센 소령이네.”
“헤르만 폰 데어 리트 톰센(Hermann von der Lieth-Thomsen)일세. 앞으로 잘 부탁하네.”
에른스트 회프너와 헤르만 폰 데어 리트 톰센.
두 사람 다 원 역사에서도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 항공대 사령관과 참모장을 맡았던 인물들로 이 중 리트 톰센의 경우엔 전후 소련에서 비밀리에 항공대를 만들며 루프트바페의 창설에도 관여했던 인물이다.
본래라면 그들은 다른 보직에 있었겠지만, 여기선 항공대가 일찍 생겨나면서 두 사람 다 일찍 항공대를 책임지게 되었다.
“항공대는 육군 내에선 아직 소규모의 조직이지만 점차 그 규모가 커지고 있는 만큼 자네들과 같이 열의 넘치는 장교들의 역할과 책임이 중요하네. 그러니 앞으로 항공대의 발전을 위해 여러모로 힘써 주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하하, 젊은 친구들답게 목소리가 커서 좋군. 부관, 뵐케 장교후보생(Fahnenjunker)을 불러 주게나.”
“옛, 대령님.”
리히트호펜과 임멜만의 기운찬 대답이 흡족한지 미소를 지은 회프만 대령이 말했다.
그리고 몇 분 안 지나 그의 부관이 리히트호펜, 임멜만의 또래로 보이는 젊은 예비 장교를 데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대령님.”
“음, 여기는 오스발트 뵐케(Oswald Boelcke)일세. 자네들보다 한 달 먼저 항공대에 온 선배지. 그는 사관 학교 출신이 아니기에 아직 장교후보생의 신분이지만 군에 들어온 시기도 비슷하고 어차피 내년에 자네들처럼 소위로 임관할 예정이니 서로 격식 없이 대하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그럼 뵐케 장교후보생. 우리 신참 소위들에게 항공대를 구경시켜 주겠나?”
“옛, 대령님.”
뵐케는 경례를 올리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리히트호펜과 임멜만을 바라보았다.
붉은 남작 리히트호펜과 릴의 독수리 임멜만, 그리고 항공전의 아버지이자 뵐케의 금언으로 유명한 독일 최초의 에이스 파일럿 오스발트 뷜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 *
“오스발트, 넌 어쩌다 항공대에 들어오게 된 거야?”
“어렸을 때부터 비행기나 비행선에 환장했거든. 그래서 항공대가 생긴다는 말에 망설임 없이 군에 들어가기로 했지.”
리히트호펜과 임멜만이 뷜케와 친해진 것은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것만큼이나 빨랐다.
나이도 비슷하고(임멜만 90년생, 뵐케 91년생, 리히트호펜 92년생) 원 역사에서도 이 세 사람은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저쪽이 우리 소중한 비행기들이 고이 모셔져 있는 격납고야.”
“와, 우리는 언제 탈 수 있어?”
얼른 비행기를 타고 싶어 안달 난 임멜만이 말했다.
하지만 뵐케는 어림도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몇 달은 걸리지. 우선 비행기 조종부터 배워야 할테니까.”
“비행기 조종할 줄 알면 그거 안 받아도 돼?”
“뭐?”
리히트호펜이 무심코 뱉은 말에 임멜만은 물론이고 뵐케 또한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뵐케와 임멜만은 각각 부친이 학교 교장에다 사업가라 결코 못 사는 집안 출신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직접 비행기를 타 보진 못했다.
“설마 귀족들은 개인용 비행기를 가지고 있는 거야?”
“뭐? 당연히 아니지. 내가 한스 폰 초이와 ‘절친한’ 친구거든. 그리고 그 인연 덕에 라이트 사에도 종종 놀러 갈 수 있어서 비행기를 탈 기회가 꽤 있었지.”
“우와, 대박….”…
임멜만과 뵐케가 부러운 눈빛으로 리히트호펜을 바라봤다.
역시 명문 귀족쯤 되면 그 유명한 카이저를 구한 소년과도 친구를 먹는구나 싶었다.
“만프레트, 그러면 한스 폰 초이가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님을 놓고 17대 1로 결투했다는 게 사실이야?”
“푸흡?!”
임멜만이 대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를 가십을 입에 담자 리히트호펜은 그만 웃음이 빵 하고 터질 뻔했다.
그 한스가 17대 1로 결투?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신이 아는 한스는 오히려 1명을 조지기 위해 반대로 16명을 고용하고도 남을 놈이었다.
하지만 리히트호펜은 임멜만의 잘못된 상식을 교정하는 대신 지금쯤 지중해 해변에서 사랑스러운 신부와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친구를 골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나중에 소개해 줄 테니까 직접 물어봐. 아무래도 그런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를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는 좀 그래?”
“오, 정말?!”
한스를 소개해 준다는 말에 귀족 인맥을 가지고 싶었던 임멜만이 눈을 반짝이며 환한 미소를 짓자 리히트호펜은 한스가 자신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들을 때마다 보여 주는 얼빠진 표정을 기대하며 사악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타진 못해도 비행기 구경은 할 수 있지?”
“물론이지. 비행기를 구경도 하지 못하면 항공대에 들어온 보람이 없잖아?”
그리 말한 뵐케는 두 사람을 가장 가까운 격납고로 안내했다.
격납고 안에는 여러 대의 비행기가 누가 독일군 아니랄까 봐 정확한 간격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이건 지금 우리 항공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라이트-포커 D.Ⅲ 단엽기야.”
“와~.”
사진이나 영화, 또는 멀리서 항공 우편용 비행기가 나는 모습만을 본 임멜만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라이트-포커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리히트호펜 역시 라이트 사에서 이미 몇 번 본 기체였지만 이리 제국 항공대의 파일럿 신분으로 비행기를 보니 감회가 새로운 얼굴이다.
“정찰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체야. 이것 말고도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만든 타우베도 몇 대 있긴 한데 솔직히 성능 면으론 라이트-포커가 훨씬 앞서지.”
“무장은 따로 안 달린 것 같은데 상대방 전투기가 날아올 땐 어떻게 해?”
임멜만의 질문에 뵐케가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독일 제국보다 한참 늦긴 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제 비행기인 타우베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국가들도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한 상황이다.
여기 모인 세 사람은 어디까지나 군인이었던 만큼 하늘에서 적국 파일럿과 부딪힐 경우를 산정해 두어야 했다.
“라이트-포커 정찰기와 타우베 모두 무장은 따로 달려 있지 않아. 그래서 적 비행기가 가까이 다가올 때 소총과 권총으로 적 파일럿을 노리는 수밖에 없어.”
“……무슨 마상 창 시합이야?”
임멜만이 살짝 실망한 듯 중얼거렸지만 뷜케는 무언가가 더 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 실망하긴 일러.”
뷜케는 격납고 깊숙한 곳으로 임멜만와 리히트호펜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들이 발을 멈춘 곳엔 각진 라이트-포커와 달리 유선형의 잘빠진 몸매를 자랑하는 복엽기 한 대가 고고하게 놓여 있었다.
“이건…….”
리히트호펜은 홀린 듯한 눈으로 눈앞의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라이트사를 수도 없이 들락거렸던 그조차도 처음 보는 기체였다.
임멜만 또한 눈을 떼지 못한 채 비행기를 바라보는 사이, 뷜케가 입을 열었다.
“아들러 전투기(Die Adler D.Ⅰ). 군에 막 도입된 따끈따끈한 최신형 기체지. 이제 막 생산이 시작된 거라 항공대에도 아직 한 대밖에 없는 거야.”
“와……. 전면부에 달린 거 혹시 기관총이야?”
“그래, MG08을 항공기용으로 개조한 MG10이 부착되어 있지. 그야말로 전투만을 위해 만들어진 비행기야. 듣자 하니 라이트-포커도 후속기엔 기관총을 장비할 수 있도록 개조한다더라.”
“끝내준다…….”
리히트호펜은 당장이라도 저 비행기에 타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임멜만도 이에 동감하는 듯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긴 마찬가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항공력이 전쟁을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올 거야. 그리고 아들러 전투기는 그 시작을 알리는 효시가 되겠지.”
제공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기의 필요성을 주장한 항공전의 선구자답게 뵐케는 반드시 그리될 것이라는 듯 장담했다.
그리고 이는 독일을 시작으로 프랑스, 영국 등이 연이어 항공대를 창설하면서 이미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심지어 아직 소문이긴 했지만, 해군 또한 하인리히 왕자의 주도 아래 항공기를 운용할 수 있는 함선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지 않은가.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전쟁을 지배한다.
이 자리에 모인 미래의 독수리들은 이를 확신하며 한동안 아들러 전투기를 바라보았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이 활약할 전쟁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