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 둘에서 하나로 (2)
“하느님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새해가 밝자마자 황실에서 발표한 공식적으로 소식에 독일인들의 얼굴은 충격과 경악, 그리고 물음표로 가득 찼다.
그리고 그 이유는 뻔했다.
[빅토리아 루이제 전하와 한스 폰 초이 남작 결혼 발표!]
빅토리아 루이제.
카이저의 고명딸이자 황실 가족의 막내로 그만큼 독일인들에게도 사랑받았던 왕녀가 결혼한단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카이저를 구한 소년, 한스 폰 초이와 말이다.
독일인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입을 떡 벌렸고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에 빠졌다.
물론 한스가 황실과 매우 가까운 존재라는 것은 모두가 익히 아는 사실.
그러나 설마하니 카이저가 그를 사위로 삼을 줄은 다들 꿈에도 몰랐다.
덕분에 독일인 3명이 모이면 4가지 의견이 있다는 속담답게 독일의 맥주 홀과 사교장은 결혼이 발표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어떤 의미로 세기의 결혼식이라 불릴 만한 이번 결혼식에 관한 토론으로 말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하노버의 왕자이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 한스 폰 초이를 양자로 들이다!]
그러나 충격적인 소식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에이씨! 왜 카이저가 뜬금없이 벨프 가문이랑 화해했나 싶었다!”
“지금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 이 양반, 공작위 상속받으려고 황제랑 짜고 한스 폰 초이를 양자로 삼은 거 맞지?”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찬성 안 했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와 빌헬름 2세의 야합에 아무것도 모른 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위 상속에 찬성한 융커들, 그중에서도 반한스파 융커들은 말로는 표현 못 할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었다.
빅토리아 루이제와 한스의 결혼이라는 충격적인 대사건에 어이가 없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런 뒤통수를 당하다니.
이러면 눈 가리고 아웅이긴 했지만, 형식상 두 사람의 결혼에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융커들은 당장이라도 포츠담 신궁전으로 달려가 카이저 앞에서 통촉을 외칠 기세였지만, 이어진 소식에 발걸음을 멈추고 입을 떡 벌렸다.
[영국 국왕 조지 5세, 빅토리아 루이제 왕녀와 한스 폰 초이 공작의 결혼을 축하. 결혼식에도 반드시 참석할 것!]
[젊은 연인들을 축복하는 그리스 왕실.]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 두 사람의 결혼 대환영!]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군주들이 한스와 빅토리아 루이제의 결혼 발표에 연달아 축전을 보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결혼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조지 5세와 빌헬름 2세가 피와 피로 이어진 왕실 네트워크를 움직여 사촌들과 친척들을 동원한 것이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의 뒤통수도 모자라 유럽 군주들까지 이구동성으로 한스와 루이제의 결혼을 지지하자 융커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졌다.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님과 한스 폰 초이 남작의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로맨스!]
[전 유럽을 설레게 한 황실 사랑 이야기. DRR 2채널에서 특집방송 예정!]
그리고 무엇보다 여론까지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한스에겐 낯간지러운 일이긴 했지만, DRR의 사장 한스 브레도프의 지휘 아래 독일 전역의 라디오가 한스와 루이제를 고난과 시련 끝에 사랑을 쟁취한 연인으로 포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호프만 부인, 어제 방송 들었어요?”
“물론이죠. 공주님과 초이 남작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설렜는지.”
그리고 이는 한스의 생각보다 훨씬 잘 먹혔다.
한스의 라디오 보급 노력이 빛을 발해 요즘 독일엔 라디오가 없는 집이 거의 없을 정도였고 라디오 청취자 상당수는 라디오 드라마에 심취한 독일 주부들.
그리고 주부들에게 있어 어려움 속에서도 끝내 사랑의 결실을 거머쥔 젊은 연인들의 이야기는 어느 시대건 잘 먹히는 정석 중의 정석이었다.
“그나저나 남작이 사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사생아라는 소문은 사실일까요?”
“전 사실일 거라 봐요. 그도 그럴 게 남작의 부모는 지금까지 그 정체가 불분명했잖아요? 분명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영국에서 신비로운 아시안 여성을 만나 가진 자식이 틀림없어요.”
“어머 어머, 그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친아들과 루이제 공주님을 두고 결투를 벌였다는 소문도……?”
물론 주부들의 가십이 입에서 입으로 퍼지면서 한스와 루이제가 어느새 음모와 치정으로 가득한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사소한(?) 부작용도 있었지만.
“젠장, 손쓸 도리가 없군.”
“이젠 나도 몰라. 공주랑 결혼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지.”
결국, 융커들은 강제로 분노 조절 잘해 상태를 맛보며 또다시 말로만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예전보다 한스에 대한 융커들의 반감이 약해진 것도 한몫했고.
그도 그럴 게 한스가 궁에 들어온 지도 어언 10년이다.
강산도 바꾸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한스는 변함없이 황실에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으니 아무리 고집불통인 융커들이라도 이젠 지쳐서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온갖 소문과 호기심 속에서 시간은 흐르고 흘러 봄이 찾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한스와 루이제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 * *
“후…….”
1911년 4월.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멍하니 예식장 문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 문을 지나면 나는 드디어 루이제의 남편이 되고 카이저의 사위가 된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무거운 책임감이 온몸을 짓무르지만 이를 겉으로 내색할 순 없었다.
그저 이 문을 지나는 순간 눈 깜짝할 새에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거라는 빌헬름 황태자의 말이 정말이길 바랄 수밖에.
“곧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시종의 말에 나는 긴장감을 풀기 위해 크게 심호흡하고 어깨를 폈다.
곧 커다란 소리와 함께 대성당의 커다란 문이 열리고 수많은 하객으로 가득 찬 예식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벌써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는 아우구스트 황후와 긴장 풀라는 듯 엄지를 들어 보이는 빌헬름 황태자, 장남인 빌헬름 왕자를 품에 안은 채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체칠리에 황태자비.
환호성을 지르는 요아힘을 비롯한 왕자들과 나를 대견하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하인리히 왕자와 마르가레테 공주를 비롯한 카이저의 동생들.
반드시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약속을 지킨 조지 5세,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와 조피 왕세자비,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 오랜만에 보는 니콜라이 2세와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미국에서 찾아온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소 지으며 박수를 치고 있는 뷜로 총리와 쇤 외무장관 등 내각 인사들, 슐리펜과 티르피츠, 몰트케, 루덴도르프, 팔켄하인 등의 군부 인사들과 내가 특별히 초대한 로이트바인과 레토포어베크.
정계에서 은퇴한 포사도프스키-베너 전 부총리와 베른슈타인을 비롯한 사민당 의원들.
여기에 라디오 건으로 돈방석에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구에 매진 중인 테슬라와 라이트 형제, 프리츠 하버, 슈마이서 부자와 브레도프 씨,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을 기다리고 있는 만트레프 폰 리히트호펜.
그리고 사정상 결혼식에 오지 못한 JP모건과 민영환을 비롯한 자유 정부 인사들의 결혼 축하 편지까지.
내가 독일에 와서 만난 인연들이 내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와 있었다.
나는 그들 하나하나에 감사의 마음을 품으며 가슴을 펴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짧은 기다림 끝에 빌헬름 황태자의 결혼식에 이어 나와 루이제의 결혼식에서도 악단 지휘를 슈트라우스가 지휘봉을 휘둘렀다.
빠바바밤~빠바바밤~빠바밤~빠바바밤~빰바밤~
그리고 오늘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워 보이는 루이제가 코를 훌쩍이는 빌헬름 2세의 손을 잡은 채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내가 눈을 떼지 못하자 면사포 사이로 루이제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킨 채 빌헬름 2세가 손을 떨며 마지못해 건네주는 루이제의 손을 살며시 받아들였다.
우리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며 뜨거운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 사이 주례를 맡은 주교가 흐뭇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참고로 여기 있는 주교는 재작년 나와 루이제의 견진성사를 맡은 주교와 동일 인물이었다.
“오늘 사랑스러운 두 젊은 신랑 신부가 결혼이란 성스러운 계약을 맺어 하나가 되기 위하여 하느님 앞에 섰습니다.”
주교가 말했다.
“두 사람이 이 자리에 서기까지 많은 고난과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인도 아래 두 사람의 사랑이 열매를 맺었으니 미천한 주의 종으로서 이보다 기쁜 일은 없습니다. 결혼은 주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래 가장 오래되고 성스러운 의식이니…….”
주교의 축사는 견진성사 때처럼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러나 지루하기만 했던 그때와 달리 오늘만큼은 말이 많은 주교의 설교가 대성당 안에 계속 울려 퍼질수록 우리는 서로가 점점 하나가 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신랑 한스 폰 초이와 신부 빅토리아 루이제 아델하이트 마틸데 샤를로테는 어떠한 강요도 없이 자신의 자유의사로 서로 혼인할 것을 결정하였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나와 루이제가 서로 미소를 주고받으며 일말의 망설임 없이 동시에 대답했다.
주교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해서 문답을 이어 갔다.
“두 사람은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중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두 사람은 혼인의 결실로 하느님이 안겨 주실 자녀들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으로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좋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혼인의 계약을 맺기에 앞서 천상의 주님과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앞에서 서로의 오른손을 잡고 두 사람의 뜻을 밝히십시오.”
내가 말했다.
“나 한스 폰 초이는 빅토리아 루이제 아델하이트 마틸데 샤를로테를 아내로 맞이하며 즐거울 때건 괴로울 때건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남편으로서 신의를 지킬 것을 약속합니다.”
루이제가 말했다.
“나 빅토리아 루이제 아델하이트 마틸데 샤를로테는 한스 폰 초이를 남편으로 맞아들이며 몸이 성할 때나 병이 들어 괴로울 때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지지하며 아내로서 의무를 다할 것을 약속합니다.”
“두 사람이 교회 안에서 고백하였으니 하느님께서 친히 견고케 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주교가 그리 말하고 갑자기 말을 멈추자 나와 루이제는 주교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향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무엇들 기다리는 것입니까? 신랑과 신부는 어서 맹세의 입맞춤을 하세요!”
“오오~!”
주교의 말에 하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모두의 기대를 배신할 순 없는 법이지.
나는 망설임 없이 루이제를 안고 입을 맞췄다.
루이제도 잠깐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 웃음을 지으며 나를 꽉 껴안았다.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 * *
결혼식이 끝나고 약속된 피로연의 시간이 찾아왔다.
전 세계에서 온 손님들이 신랑 신부에게 덕담을 건네는 가운데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항상 빼먹지 않고 참석하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또한 한스와 루이제에게 진심을 담아 축하를 전했다.
“결혼 축하하네, 후작. 두 사람의 결혼이 반드시 행복해지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페르디난트 대공 전하.”
한스와 루이제가 한시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손을 맞잡은 채 감사 인사를 하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진심으로 젊은 부부가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길 기도했다.
한스와 루이제의 결혼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있어서도 남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 조피는 잘 알려졌다시피 평범한 백작의 딸이다.
덕분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조피와 결혼하겠다고 밝혔을 때 숙부인 프란츠 요제프는 물론이고 황실 전체에서 반대가 엄청났다.
특히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자신의 계승권을 박탈해 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다만 이미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로 여론이 뒤숭숭했기 때문에 실제로 이를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지만 말이다.
결국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마지못해, 정말 마지못해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결혼을 허락했지만, 그 이후로도 프란츠 요제프는 자신의 아내를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공식 석상에서 아내가 자신의 얼굴을 쳐다볼 수조차 없게 했고 조피가 대공비이자 왕위계승자의 부인임에도 불구하고 궁중에서도 가장 낮은 서열로 대우하며 시녀들보다 박하게 대했다.
이는 왕위계승자의 정당한 부인이 아닌 정부들에게나 하는 취급.
덕분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아내에 대한 죄책감과 매정한 숙부에 대한 분노로 매일같이 울분을 삭여야만 했다.
‘그래도 이 두 사람은 가족들에게 결혼을 인정받았으니 정말 다행이군.’
물론 왕위계승자인 자신과 어차피 왕위계승은 꿈꿀 수도 없는 빅토리아 루이제의 차이 상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카이저 부부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스와 루이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나도 더 열심히 해야지.’
지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전에도 그랬지만 몇 년 전에 있었던 보스니아 합병으로 인한 민족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렇기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을 주장하며 민족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는 중이었는데 이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들 보고 기득권을 양보하라는 소리와 같아서 크나큰 방해에 부딪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오늘 한스와 루이제의 결혼식을 보고 무언가를 느낀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숙부는 질색하겠지만 개혁이 성공하면 제국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올라갈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가족들도 지금 같은 대우는 받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결의를 다졌다.
사랑하는 아내 조피와 아이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