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 둘에서 하나로 (1)
“그런 연유로 여기 있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한스 너를 기꺼이 양자로 들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나는 빌헬름 2세 옆에서 똥 씹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하노버의 왕자이자 컴벌랜드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를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기꺼이’란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억지로 참는 것에 가까웠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와 내가 따로 일면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가 나를 기꺼워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카이저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위 상속을 인정하는 대신 내가 루이제와의 결혼을 위해 그쪽 집안의 형식상 양자로 받아들이라고 딜을 걸지 않았으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거다.
그나저나 루이제와 결혼을 허가받은 이상 더 높은 작위를 받거나 적당한 귀족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는 것은 나도 생각했지만 설마하니 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라니.
왠지 무능하고 선민의식에 찌들어 있다가 금발 애송이에게 죽을 것 같은 이름이지만, 실제론 유럽 역사에 관심 많은 사람이라면 종종 들어 봤을 독일 제국 내에서도 이름 높은 명문가 중 명문가다.
그 역사는 무려 신성로마제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라이벌이었던 사자공 하인리히가 바로 이 가문 출신이었고 영국의 하노버 왕조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가의 게오르크 1세가 영국의 조지 1세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물론 양자인 내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라 칭하지는 못하겠지만.’
가문이 곧 작위이고 작위가 곧 가문인 독일 제국이기에 공작을 칭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겠지만 내가 정말로 한스 폰 초이 공작이라 칭하고 다녔다간 눈치를 소시지에 섞어 버린 또라이 취급을 받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일종의 포대갈이에 불과했다.
한스 폰 초이란 싸구려 밀가루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가란 고급 밀가루 포장지로 바꿔 치기하는 눈속임 말이다.
그러나 내가 포대갈이 밀가루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루이제와 결혼만 할 수 있다면 충분했고 고급 포장지 안에 든 싸구려 밀가루 취급을 받아도 딱히 상관없었으니까.
“이걸로 여기 있는 한스 폰 초이 남작은 공식적으로 우리 가문의 일원이오. 빌헬름, 이걸로 됐소?”
“충분하네. 에른스트. 곧 의회에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위 상속이 통과될 테니 집에 가서 소식을 기다리게나.”
내 입양 서류에 서명을 마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가 그거면 충분하다는 듯 내 쪽엔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자리를 떠났다.
뭐, 정말 자식 취급받을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부자 관계에 불과했으니.
하여튼 빌헬름 2세의 약속대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위 상속은 일주일도 걸리지 않아 라이히스탁의 만장일치로 고속으로 통과되었다.
물론 의원들은 아직 내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2세의 양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냥 카이저가 또 변덕을 부려 벨프 가문과 화해했다 생각하고 있겠지만.
사실이 밝혀지면 의원들이, 특히 융커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참으로 궁금해진다.
보나 마나 또 시끄럽게 굴겠지만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뭘 할 수 있냐고 물으면 나로선 그저 웃음밖에 지을 수 없다.
“그래, 빅토리아 루이제 공주님과 결혼한다고? 결혼 축하하네.”
그에 비해 뷜로 총리의 반응은 내 생각보다 상당히 심심했다.
적어도 의자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매우 놀랄 줄 알았는데 말이지.
“사랑의 감정은 연기나 기침을 감추기 어렵듯이 오래 감춰 두기 어려운 것이지. 당장 자네가 꼬맹이 시절부터 공주님과 찰싹 붙어 다니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봐 왔는데 인제 와서 두 사람이 결혼한다고 놀라는 건 좀 그렇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하긴 뷜로 총리와 내 인연도 카이저만큼이나 오래되었으니.
그가 나를 처음 본 것은 무려 빌헬름 2세가 나를 신궁전에 막 데려왔을 때였으니까.
그리고 그 때문인지 오히려 뷜로 총리는 아이였던 내가 이렇게 커서 결혼까지 하니 나름 감회가 새롭다는 얼굴이었다.
“어쨌든 총리로서 말하자면 굳이 반대할 생각은 없네. 게다가 폐하께 듣기론 이번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가의 양자가 되었다면서?”
뷜로 총리가 잘되었다는 듯 입꼬리 한쪽을 올렸다.
“어디까지나 명목상이긴 해도 독일 제국의 제후국 군주 중에서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가의 일원이 되었으니 융커들도 자네 결혼을 앞에서 대놓고 반발하긴 어렵겠지. 덕분에 나도 귀찮은 일을 덜었군.”
“그래도 여전히 욕하는 사람은 욕하겠지만요.”
독일 속담 중에 질투 없이는 사랑도 없는 법이라던가?
이젠 익숙한 일이다.
“그러면 이제 국혼을 준비해야 하겠는데 결혼식은 언제 할 생각인가?”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선 내년 4월에 하기를 원하시더군요.”
“거의 1년 뒤인가. 그럼 결혼 공표도 내년 초에 하면 되겠군.”
다만 루이제는 빨리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는지 가을이나 겨울에 결혼식을 하길 원했다.
그러나 이는 아우구스테 황후도 반대했다.
가을은 너무 빠르고 겨울은 추우니 따뜻한 내년 봄이 가장 좋을 것이란 이유를 들면서 말이다.
우리가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우구스테 황후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기에 루이제는 결국 고집을 접고 어머니의 말을 따랐다.
나? 나는 지금 루이제와 결혼을 시켜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다.
슬프지만 내겐 발언권 따위는 없었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어째 벌써부터 내 결혼 생활이 눈에 보인다.
처가살이하는 남자들의 심정이 이해되는 것은 덤이었다.
* * *
“한스, 그래서야 우리가 루이제를 믿고 맡기겠어?”
“남자라면 맥주 정도는 원샷 해야지!”
결혼식 준비가 착착 진행될수록 루이제와 카이저 부부의 사이에 낀 채 이리저리 휘둘리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곧 처남들이 될 빌헬름 황태자와 왕자들까지 날 가만히 두지 않았다.
나는 매제와의 관계를 돈독히 한다는 명분으로 왕자들에게 끌려와 일명 ‘남자들의 파티’에서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강제로 위장에 쏟아부어야만 했다.
“그나저나 한스가 루이제와 결혼한다니. 언젠가 이렇게 될 것 같긴 했지만 역시 기분이 묘하네.”
내가 본고장 맥주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와중에 요아힘이 자우어크라우트를 술안주 삼아 집어 먹으며 말했다.
다른 왕자들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하면 신궁전에 나갈 거야?”
“끄윽, 글쎄요~?”
술기운 때문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한 가운데 내가 말했다.
“루이제는 베를린의 쇤하우젠 궁전(Schloss Schönhausen)에 살고 싶은 모양이던데~딸꾹! 황제 폐하랑 황후 마마께서는 계속 우리가 결혼하고 나서도 당분간은 신궁전에 계속 머무르길 바라시는 모양이에요~.”
일단은 내 소유인 프리드리히쇼프 성도 있긴 한데 거긴 지방이라 너무 멀고.
“나도 결혼할 때 처음엔 그곳에 살려고 했지. 도중에 생각이 바뀌어서 다른 곳으로 이사했지만.”
빌헬름 2세의 4남,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과거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는 1905년에 결혼한 빌헬름 황태자와 1906년에 올덴부르크의 조피 샤를로테와 결혼한 아이텔 왕자의 뒤를 이어 2년 전인 1908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알렉산드라 빅토리아와 결혼한 상태였다.
다만 내가 알기로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처음에는 행복했지만, 나중엔 불화를 겪으며 결국 1920년에 결국 이혼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원인은 다름 아닌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의 동성애 성향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그 마켄젠의 차남이자 친구였던 한스 게오르크 폰 마켄젠과 상당히 깊은 관계였다는데 정말 둘이 그렇고 그런 관계였는지는 나도 모르고 딱히 알고 싶지도 않다.
진실이 어떻든 간에 취향은 존중해 줘야 하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가장 어린 루이제와 한스도 결혼하는데 너희는 대체 결혼 언제 할 거냐?”
장남으로서 질문하는 빌헬름 황태자의 말에 아직 미혼인 아달베르트 왕자와 오스카 왕자, 요아힘 왕자가 술을 마시다 말고 서로를 바라봤다.
“난 아직 결혼할 생각 없어.”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달베르트 왕자였다.
“뱃사람에게 연인은 곧 바다일지니. 때가 되면 어련히 결혼하겠지.”
“지랄하네.”
그러나 다른 형제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오히려 ‘쟤 또 저런다.’라는 분위기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어휴, 이래서 물개는…….”
“뭐?!”
땅개인 아이텔 왕자의 말에 발끈하는 아달베르트 왕자.
빌헬름 황태자는 익숙한 형제 싸움을 막으려는 듯 빌헬름 2세의 5남, 오스카 왕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스카 너는?”
“어, 그게…….”
“에이, 형. 오스카 성격에 여자를 만날 수나 있…….”
“나 사실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어.”
아우구스트 왕자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오스카 왕자가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연애 사실을 고백하자 빌헬름 황태자를 비롯한 왕자들의 동공이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격하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오스카 왕자가 형제 중에선 존재감이 옅고 조용한 사람인지라 오스카 왕자가 연애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충격적인 모양이다.
물론 나는 그가 연애 중이라는 것은 물론 사귀는 여성이 누군지 역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기에 여전히 알딸딸한 기분으로 소시지나 집어 먹고 있었지만.
“세상에, 내가 오스카에게 놀랄 일이 다 생기네.”
“한스랑 루이제도 그렇고 요즘은 비밀 연애가 유행이야? 물론 우리 친애하는 매제의 연애는 비밀이라 이름 붙이긴 좀 그렇지만!”
빌헬름 황태자와 아이텔 왕자가 애꿎은 나까지 걸고넘어지며 연달아 말을 쏟아 내자 오스카 왕자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오스카 왕자의 바로 위 형인 아우구스트 빌헬름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 동생이 홀딱 빠진 그 행운의 아가씨 이름이 누구야?”
“이나…….”
“이나?”
“그게 누구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긴 한데…….”
오스카 왕자의 마음을 빼앗아 간 이나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아가씨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왕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자신들이 아는 귀족 영애 명단을 쭉 읊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참 한심해 보였던지라 나는 그냥 답을 알려 주기로 했다.
“딸꾹! 오스카 왕자님, 왕자님이 좋아하는 사람 혹시 이나 마리 폰 바세비츠 양 아니에요~?”
“엉? 어떻게 알았어?”
“잠깐, 잠깐, 잠깐! 이나 마리 폰 바세비츠? 그거 어머니 시녀잖아!”
왕자들이 오스카 왕자에게 애인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하필이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어머니 아우구스테 황후의 시녀에게 연정을 품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에 도저히 말을 못 잇겠다는 듯 입을 손으로 가렸다.
충격과 공포가 방안에 감도는 가운데 빌헬름 황태자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오스카, 동생아. 너 그 바세비츠 양의 집안이 일개 백작가인건 알고 하는 소리지?”
“한스랑 루이제도 결혼하는 마당에 신분이 무슨 상관이야. 내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게 중요하지.”
“하아……. 한스야. 네 죄가 크다.”
“딸꾹?”
왜 날 탓해?
오스카 왕자는 원 역사에서도 원래 이랬어!
“나는 반대는 안 하겠는데 루이제에 이어 너까지 귀천상혼을 하게 되는 꼴이니 아버지가 안 좋아하실 거다. 어머니도 자기 시녀를 건드렸다고 화내실 테고.”
“알고 있어. 괜찮아. 게다가 난 어차피 5남이니까 루이제처럼 귀천상혼해도 딱히 상관없잖아?”
오스카 왕자가 순진한 목소리로 말하자 빌헬름 황태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장남은 고생이 많은 법이지.
“형, 사실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뭐?”
“예?”
근데 요아힘 얘는 또 왜 이러는 걸까?
오스카 왕자의 충격 고백에 영향이라도 받았는지 우리의 막내 왕자님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빌헬름 황태자는 물론이고 나도 멍청한 얼굴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설마 너도 귀천상혼이니?”
“아니, 아니야. 내가 마음에 품은 아가씨는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칠 정도로 격에 맞는 상대야. 아버지도 어머니도 마음에 들어 하실 테니 걱정하지 마!”
“하, 그래. 그것참 다행이네. 그럼 네 아가씨는 누군데?”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
“야, 야, 아이텔. 얘 취했다. 한스도 멀쩡하지 않은 것 같고 둘 다 방에 데려가서 재워라.”
“알겠어. 형.”
힘이 센 아이텔 왕자가 옆구리에 각자 나와 요아힘을 끼고 방을 나섰다.
물론 요아힘은 자신의 취급이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 버둥거렸다.
“나도 올가를 좋아해! 나이만 차면 청혼할 거라고오!!”
“그래, 그래. 동생아. 꿈꾸는 건 자유지.”
아이텔 왕자는 안쓰러운 눈으로 막냇동생을 바라보았다.
요아힘은 계속해서 항변했지만, 아쉽게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형제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해프닝 속에서 어느새 평온했던 1910년이 끝나고 1911년이 찾아왔다.
그리고 새해가 되자마자 나와 빅토리아 루이제의 결혼이 독일 전역에 공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