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 굿바이 에드워드 (2)
1910년 5월 17일.
버킹엄 궁전, 왕좌의 방에 안치되어 근위병들의 경호를 받고 있던 에드워드 7세의 관이 검은색 말이 이끄는 마차에 실려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그랬듯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향했다.
영국 전역에서 모인 영국인들이 위대한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으로 흔들리던 대영제국을 훌륭하게 이끌어 온 유쾌한 뚱보의 마지막 행차를 지켜보는 가운데, 에드워드 7세의 가족들과 그의 애견이었던 카이사르가 국왕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윽고 마차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도착하자 조지 5세와 빌헬름 2세를 비롯한 아들들과 조카들이 묵직해 보이는 에드워드 7세의 관을 사원 안에 안치했다.
이후 조지 5세를 비롯한 왕족들은 짧은 기도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떠났고 17일부터 19일까지 총 3일간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총 40만 명이 넘는 영국인들이 위대했던 자신들의 국왕을 추모하고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발걸음을 옮겼고 마지막 조문객을 끝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문을 닫으며 1909년 20일에 드디어 장례식 본식이 시작되었다.
빠~빠바바~밤~
사원 안에 파이프오르간 연주와 성가대의 노랫소리를 배경으로 장례식에 참석한 왕족과 귀족들이 경건한 태도로 앉아 있는 가운데 잉글랜드 성공회의 최고 성직자인 96대 캔터베리 대주교 랜들 데이비드슨(Randall T. Davidson)이 입을 열었다.
“그레이트 브리튼 및 아일랜드의 국왕이자 인도의 황제이신 에드워드 7세 폐하께서는 59세의 나이에 대영제국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겠다고 맹세하셨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설교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마치 관 속에 누워 있는 에드워드 7세를 떠나보내기 싫다는 듯.
그러나 이제는 국왕을 보내 주어야 할 때가 되었고 캔터베리 대주교 또한 이를 알았기에 아쉬운 마음으로 설교를 마무리 지었다.
“국왕께서는 우리의 곁을 너무나도 빨리 떠났지만, 그분이 남기신 위업과 영국과 영국인들을 사랑하셨던 마음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 곁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아멘.”
빰~빠바밤~빠암~
캔터베리 대주교의 설교가 끝나자 영국 왕실 사용인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었다.
그리고 에드워드 7세를 위한 마지막 국가 제창이 시작되었다.
“신이시여, 우리 국왕 폐하를 지켜 주소서. 고귀하신 국왕께서 만수무강케 하소서. 신이시여, 국왕 폐하를 지켜 주소서! (God save our gracious King. Long live our noble King. God save the King!)”
울려 퍼지는 국가 아래 에드워드 7세는 우리 곁에서 영원히 떠났다.
그가 부디 저세상에서도 잘 지내길.
* * *
“아버지께선 의사를 불러야 한다니까 이를 물리시며 말했소. ‘아니, 나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계속할 것이다. 나는 끝까지 일할 것이다.’라고. 그리고 바로 기절하셨지. 나는 솔직히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 알았소.”
장례식이 끝나고 에드워드 7세의 관은 왕실 열차에 실려 버크셔에 있는 윈저성으로 와 그의 선조와 후손들처럼 윈저성의 성 조지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윈저성에선 국왕을 기리기 위한 조촐한(왕족들 기준으로) 추모 연회가 열렸다.
“그런데 우리가 당황해서 사람을 부르려고 할 때 다시 눈을 뜨시더군. 그리고는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소. 조지, 오늘 더비에서 누가 이겼냐?”
“하하하하하!”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지. ‘아버지의 말인 위치 오브 더 에어(Witch of the air)가 이겼어요!’라고. 그리고 아버지께선 ‘오! 그거 매우 기쁘구나!’라고 함박웃음을 터트리셨소. 그리고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으셨지.”
“와하하하하하!!”
“그분답구만!”
“그래, 그래야 유쾌한 에드워드지!”
조지 5세의 말에 연회에 참석한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럽 상류사회에서는 이렇게 추모 연회에서 서로 고인과 있었던 재미있는 일들을 이야기하며 서로 웃고 떠든다.
고인을 떠나보낸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에드워드 7세는 유쾌한 뚱보라는 별명답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넘쳐났다.
“아, 나도 모르게 웃겨서 눈물이 나는군. 에드워드 고모부님이 벌써부터 그리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세자님.”
“우리들의 뚱보 에드워드에게 안식이 있기를.”
“예, 안식이 있기를.”
중간 올림픽 이후 오랜만에 보는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와 나는 잔을 부딪치며 에드워드 7세를 기렸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여전히 대화 삼매경 중이시군.”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는 것일 테니까요. 오늘은 즐기시게 놔두시죠.”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의 말대로 근처에선 그의 아버지인 요르요스 1세가 형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와 누나인 에드워드 7세의 부인인 알렉산드라 왕비, 여동생인 마리아 황태후와 남매 간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선 요르요스 1세의 4남이자 필립 마운트배튼 공의 아버지인 안드레아스 왕자와 에드워드 7세의 외조카 사위였던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에드워드 7세의 6촌 형제인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와 불가리아 국왕 페르디난트 1세가 이야기꽃을 피웠다.
얼핏 보면 각국 왕실의 우애를 다지는 훈훈한 장면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은 세계 각국의 국왕들과 왕족들이 참석한 마지막 장례식이었다.
곧 일어나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 왕실 상당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또한 역사가 만들어 낸 안타까운 일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이 유럽 군주들이 모인 마지막 장례식이었다면 그들이 제1차 세계대전 전에 모인 마지막 결혼식은 다름 아닌 빅토리아 루이제의 결혼식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녀의 애정을 내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과연 이 세계에선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루이제의 모습이 안 보이네.’
“왕세자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음? 아, 그러게나.”
영국에 온 이래 루이제의 컨디션이 상당히 나빠 보였던지라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 나는 그녀를 찾기 위해 연회장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요아힘 왕자와 함께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여대공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루이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루이제, 여기 있었구나.”
“아, 한스.”
“남작님.”
여전히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루이제와 함께 나와 루이제보다 3살 어린 올가 여대공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와는 내가 꼬꼬마 시절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을 때 처음 만났고 이번 장례식에서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이젠 숙녀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이 자란 상태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라스푸틴이란 신부 이야기.”
하필이면 그 양반이냐.
“올가 말을 들어 보니까 꽤 대단한 사람 같더라.”
어, 음. 어떤 의미론 대단하긴 하지.
“그런데 요즘은 여러모로 힘든가 봐.”
“네, 스톨리핀 총리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다들 라스푸틴을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이라니까요. 심지어 헤르모게네스 사제는 그를 적그리스도라며 십자가로 때리기까지 했어요. 참 좋은 사람인데 왜 이렇게 다들 그를 싫어하는 건지.”
루이제의 물음에 올가 여대공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니콜라이 2세의 딸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라스푸틴을 꽤 좋아했다던가?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라스푸틴이 로마노프의 황녀들 앞에선 자신의 변태성을 숨기고 아픈 남동생을 도와주는 친절한 아저씨인 척 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궁 밖의 일들을 알기 힘든 나이인 올가 여대공으로선 다른 사람들이 죄 없는 라스푸틴을 괴롭힌다고 착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가? 이리 잠깐 와 보렴!”
“네, 할머님. 그럼 여러분 전 이만 실례하도록 할게요.”
내가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의 부름에 올가 여대공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총총걸음으로 할머니에게 갔다.
“그나저나 네 오빠는 왜 이렇게 조용해?”
“나도 몰라. 아까 올가를 보자마자 입을 다물더라.”
나와 루이제는 대화에 끼지 않고 조용히 서 있던 요아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작 요아힘의 시선은 할머니의 자매들에게 둘러싸여 이쁨을 한 몸에 받는 중인 올가 여대공을 향해 있었다.
“아, 너무너무 예쁘다.”
“……저 왕자님?”
“한스, 아무래도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오, 주여.”
요아힘아, 요아힘아. 그 길은 안 된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
“오빠, 올가는 우리 둘보다 어린 거 알지?”
“……그쪽으로 화내는 거야?”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애초에 너희보다 어려도 3살 어릴 뿐이잖아. 그러니까 3년만 기다리면…….”
“한스, 오빠가 아무래도 미쳤나 봐.”
“동감이야.”
“으, 어쩐지 머리가 아프네. 한스, 나갈래?”
루이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랑이라는 그 무엇보다 지독한 병에 걸려 여전히 멍청한 얼굴로 헤실거리고 있는 요아힘을 뒤로하고 연회장을 떠났다.
물론 내가 요아힘보고 뭐라 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 *
“시씨(루이제의 애칭), 좀 괜찮아졌어?”
“응,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어.”
함께 윈저성의 정원을 산책하던 루이제가 바람을 쐬니 좀 나아졌다는 듯 밝은 미소를 지었다.
“피곤하면 들어가서 쉴래? 요즘 몸도 좀 안 좋아 보이던데.”
“아, 괜히 신경 쓰게 만들어서 미안해. 장례식 때문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싱숭생숭해졌거든.”
“이해해. 가족이 죽으면 누구나 그런 감정을 느끼니까.”
“그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루이제가 정원 중앙에 있는 정자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새해에 내가 세상이 쭉 평화로워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적이 있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혁명이다, 전쟁이다 뭐다 해서 재작년부터 여러모로 시끄러운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으니까.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워드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시니까 이제는 내가 알던 세상이 점점 사라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
루이제의 말에 나는 그 기분에 동감한다는 듯 그녀의 등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빅토리아 루이제가 태어나고 자란 시대는 벨 에포크.
유럽 한정이긴 했지만 좋은 시절이라 불릴 정도로 평화롭고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으로 가득 찬 시대였으니까.
그러나 행복한 순간은 가끔은 덧없이 느껴질 정도로 찰나와도 같이 지나가고 결국은 그 끝이 찾아오는 법.
재작년부터 유럽에 전운이 조금씩 감돈 끝에 에드워드 7세의 죽음으로 유럽인들의 좋은 시절에도 드디어 끝이 다가오자 루이제 또한 이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한 번 높이 오르면 떨어지는 일밖에 없듯이 이 시대가 끝나고 찾아올 다음 시대는 분명 재와 피로 가득하겠지.”
루이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한스, 그날이 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
“두려워?”
“응, 내 소중한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질까 봐.”
나는 불안한 얼굴로 목소리를 떠는 그녀의 손을 말없이 잡아 주었다.
“네 말대로 얼마 안 가, 온 유럽이 불길에 휩싸이겠지. 모든 것을 불태울 전쟁이란 불꽃에.”
“한스…….”
“그러나 약속할게. 내가 절대 그렇게 두지 않겠다고. 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반드시 지켜 내겠다고.”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고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 약속 지킬 수 있겠어?”
“물론.”
내가 단언하자 루이제가 불안감이 가신 듯 볼을 살짝 붉히며 내 품에 안겼다.
루이제의 푸른 눈동자가 내 눈과 마주치고 우리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몇 분, 미래에 닥쳐올 일을 잠시나마 잊으며 행복한 꿈을 꾸고 있을 때.
“지금 뭣들 하는 게냐!”
“헉?!”
등 뒤에서 커다란 노호성이 우리 두 사람을 강타했다.
“……아.”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 서로 떨어진 나와 루이제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못 이은 채 멍하니 입을 벌렸다.
카이저, 빌헬름 2세가 배신감과 분노로 부들부들 몸을 떨며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엔 흥미로운 얼굴로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유럽의 로얄 패밀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어머나…….”
“크하핫! 남작, 자네도 사내였구만!”
“청춘이로군.”
올가 여대공이 볼을 발그레 붉힌 채 입을 가리고 콘스탄티노스 왕세자가 폭소를 터트리며 조지 5세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추억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나는 내 운명을 직감하며 눈을 감았다.
X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