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34화 (134/193)

134화 : 굿바이 에드워드 (1)

“벌써 1910년이네.”

그리고 빨라지거나 느려지지 않는다면 세계대전까지 4년이 남았다.

내가 신궁전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이 바로 엊그제 일 같은데 시간이란 것은 가끔 보면 야속할 정도로 빨리 지나가는 것 같다.

물론 1910년 자체는 세계적으로 보면 큰 사건이 없었던 평화로운 해였던 만큼 다가오는 폭풍을 전혀 모르고 있는 유럽은 폭풍이 불기 전 바람이 고요해지는 것처럼 여전히 얼마 안 남은 벨 에포크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보스니아 위기와 페르시아 혁명 등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분쟁을 보고 전 유럽을 집어삼킬 대전쟁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대통령에서 퇴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얼마 전 나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에서 세상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며 투덜거렸을 정도다.

물론 그 편지에 적힌 말 중 대부분은 루스벨트와 정반대의 노선을 걸으며 슬슬 루스벨트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는 루스벨트의 전 심복이자 현 미국 대통령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에 대한 악담과 욕설이었지만.

물론 태프트 쪽도 루스벨트에게 할 말은 많을 것이다.

특히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아직도 자신을 부하 취급하며 사사건건 자신에게 태클을 걸어 대는 것에 말이다.

‘결국, 한때 친구였던 두 사람은 얼마 안 가 완전히 갈라서게 되지.’

그리고 이는 내후년인 1912년에 있을 차기 미국 대통령 선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루스벨트가 태프트 떨어트리겠다고 3선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고 진보당을 창당, 대통령에 다시 출마하는 바람에 공화당의 표가 갈렸고 어부지리로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이득을 봐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말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우드로 윌슨이라.”

그를 간단히 표현하자면 겉은 새하얀척하지만 속은 시꺼먼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도덕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도덕주의와 이성주의를 부르짖었지만, 현실에서 그가 보인 행보는 사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패권주의와 별다를 게 없었다.

또한, 클레이턴 독점금지법으로 노동자들의 파업과 보이콧을 합법화시켰으면서도 정작 그의 치세에선 노동자 탄압이 활발했으며 특히 콜로라도 석탄 전쟁이 미국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노동운동으로 불리게 되는 데도 크게 이바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하고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으면서 정작 협상국 식민지들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는 건 너무 유명해서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게다가 백인우월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하지.”

다만 이건 그의 고향이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맹의 중심지였던 버지니아였다는 점과 민주당 자체가 FDR 이전까지는 딕시크랫이라 불리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보수 성향 정당이었단 점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향도 남부고 출신 당도 민주당인 인물이 백인우월주의자가 아니면 그게 더 충격적이다.

“그런데 이 세계에선 과연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려나?”

원 역사에서 우드로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키다가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치머만 전보 사건 등 끊임없는 독일의 도발에 결국 미국을 세계대전에 참전시켰지만 여기선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 해군력에서 이미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 독일이 굳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할 이유도 없고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치머만 전보 사건 같은 헛짓거리를 할 리도 없으니까.

그렇기에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미국은 계속 중립을 지킬 확률이 높다.

물론 미국의 중립은 말이 중립이지 어디까지나 친정인 영국과 협상국에 기울은 중립이었기에 이에 꼴 받은 러불동맹이 원 역사의 독일처럼 사고를 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지켜봐야지.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이 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하여튼 이제 제1차 세계대전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1910년이 되면서 다시 한번 돌아온 생일을 맞이한 나 또한 모두의 축하 속에서 드디어 만 18세가 되어 법적으로도 성인이 되었고 말이다.

이제 젊다는 소리는 들어도 어리다는 소리를 들을 리는 없겠지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나는 여전히 독일인들의 머릿속에서 나는 ‘카이저를 구한 소년’이라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소년 시절은 한참 전에 벗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다가 나이가 든 후에도 그 별명으로 불리지 않을까 살짝 걱정된다.

아무리 그래도 노인이 돼서까지 카이저를 구한 ‘소년’이라 불리는 건 좀 그러니까.

“그나저나 내년부터는 그야말로 전쟁의 연속이네.”

그것도 하필이면 독일의 동맹국(아직까지는)인 이탈리아가 스타트를 끊었다.

1911년에 이탈리아가 독일에 한마디 말도 없이 리비아를 먹겠다고 독일의 우호국인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며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와의 전쟁으로 오스만이 흔들리자 ‘이때다!’하고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가 발칸 동맹을 결성해 오스만 제국을 침공, 1912년에 제1차 발칸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1913년 5월 30일에 런던조약으로 발칸전쟁이 끝나자마자 한 달도 안 돼서 6월 29일에 전리품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가 제2차 발칸전쟁을 일으키니 그 꼴을 직접 보아야 하는 나로선 상상만 해도 위장이 쓰려 올 정도다.

‘게다가 다음 해는 사라예보랑 제1차 세계대전이니.’

그러니 적어도 마지막으로 평화로운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올해만큼은 조용히 보내고 싶은 기분이지만 아쉽게도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 * *

1910년 5월 6일, 영국으로부터 씁쓸한 소식이 전해졌다.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 사망.]

에드워드 7세가 68세를 일기로 끝내 서거했다.

고손자인 찰스 3세처럼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장수하여 오랜 세월을 왕세자로만 보내다 겨우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왕관을 쓴 지 10년도 안 되어 눈을 감았으니 국왕과 친했던 나로서도 그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게 담배 좀 줄이고 운동 좀 하라니까…….’

그러나 하루에 시가 12대, 담배 20대를 꼬박꼬박 피워 대고 48인치(약 122cm)에 달하는 허리둘레가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듯 코스 요리 정식을 하루에 10번이나 먹었을 정도로 대식가였던 에드워드 7세에겐 들리진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이쯤 되면 자연사가 아닐까?

“외숙부도 결국 갔는가…….”

평소 에드워드 7세를 뚱보 에두아르트라 부르며 투덜거렸을 정도로 외삼촌과 사이가 좋다고 말할 수 없었던 빌헬름 2세가 복잡한 감정이 서린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밉상이었다 해도 가족의 죽음은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을 느끼게 하는 법이니까.

물론 영국과 독일의 관계 악화로 사사건건 부딪쳤던 원 역사와 달리 여기선 영국과 독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오랜만에 런던에 가야겠군.”

“조문 사절단을 꾸려야겠군요. 황실 가족 중 참석자는…….”

“전부. 아들 녀석들을 비롯해 루이제도 함께 데려갈 생각이다. 루이제도 이젠 다 컸으니까.”

빌헬름 2세의 말에 나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도 함께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그렇게 며칠 뒤, 나와 황실 가족들은 조문 사절단과 함께 런던에 도착했다.

독일 제국 사절단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대규모였는데 이는 사절단 빌헬름 2세의 가족뿐만 아니라 하인리히 왕자와 마르가레테 공주를 비롯한 카이저의 동생들, 그리고 바이에른의 루프레히트 왕세자를 비롯한 독일 제후국 왕족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내가 마지막으로 런던에 왔었을 때가 라디오 문제로 에드워드 7세를 만나러 왔을 때던가?’

그리고 다시 런던에 오게 된 것이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이라니 마음이 참 착잡해진다.

“빌리, 왔나.”

“조지, 메리. 애도를 표하네.”

내가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황실 가족들이 에드워드 7세의 관이 안치되어 있는 버킹엄 궁전에 도착했다.

궁전 앞에는 상주인 웨일스 공 조지, 이제는 새롭게 영국 국왕이자 인도의 황제가 된 조지 5세가 가족들과 함께 직접 궁 앞에 나와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조지 5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해 보였지만 그 또한 아버지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닌지 눈동자에 구슬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빌, 빌, 빌리 아저씨.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그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셨어, 어요?”

빌헬름 황태자 부부와 빌헬름 2세의 자식들이 조지 5세에게 애도를 표하는 사이 어째 어린 시절 봤을 때보다 말더듬이 더 심해진 것 같은 훗날의 조지 6세, 앨버트 왕자가 카이저에게 안부를 전했다.

“그래. 너도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구나. 버티.”

빌헬름 2세는 앨버트 왕자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카이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엄한 교육으로 말더듬이가 된 앨버트 왕자를 언제나 상냥한 태도로 대했다.

아무래도 카이저 자신도 팔에 장애가 있었고 이 때문에 부모님과 갈등을 맺은 적이 있었기에 앨버트 왕자에게 나름대로 동병상련을 느끼는 모양이다.

이윽고 루이제를 비롯한 6촌 형제들과도 인사를 마친 앨버트 왕자는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남, 남작. 그대도 정말 오, 오랜만이군. 옛날에 봤, 봤, 봤을 때보다 훨씬 커졌어.”

“우유를 많이 먹은 탓이죠.”

나는 앨버트 왕자와 반갑게 손을 맞잡으며 농담처럼 말했지만 사실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다.

성장기에 폭풍 성장을 하며 쭉쭉 자란 루이제보다 키가 작은 건 아무리 그래도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하겠더라.

“그런데 데이비드(에드워드 8세)는 어딜 갔나?”

빌헬름 2세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말하자 그 로봇 같던 조지 5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와, 이 사람이 이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었구나.

나야 물론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쯧, 그 망나니라면 어딘가에서 또 여자나 꼬시고 있겠지.”

그리고 내 예상대로 조지 5세는 못난 장남에 대해 불만스러운 얼굴로 투덜거렸다.

아무래도 에드워드 8세는 벌써부터 아버지의 속을 썩이는 모양이다.

여기에 아직은 어린애인 넷째 아들인 켄트 공작 조지까지 합류하면…….

음, 조지 5세의 위장에 애도를 표하자.

“제 할아버지 장례식인데 곧 왕세자가 될 녀석이 아직도 철이 없으니 원.”

“큭큭, 자네도 고생이 많구만. 그나저나 다른 이들은 아직인가?”

“칼(노르웨이의 호콘 7세)과 모드(노르웨이의 모드 왕비, 에드워드 7세의 막내딸)는 이미 와 있네. 나머지도 곧 오겠지.”

빅토리아 여왕이 유럽의 할머니라면 에드워드 7세는 유럽의 아저씨, 유럽의 삼촌이라 불릴 정도로 대부분의 유럽 왕실들과 혈연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장례식엔 유럽 전역의 왕족과 귀족들이 총출동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 중엔 빌헬름 2세와 방금 조지 5세가 말한 호콘 7세를 비롯한 유럽의 군주들이 8명이나 포함되어 있었고 덕분에 경호를 맡은 스코틀랜드 야드와 영국 근위대는 못된 짓을 꿈꾸는 나쁜 친구들이 없나 눈에 불을 켜고 런던 전역을 감시 중이었다.

아, 참고로 의외지만 에드워드 7세의 처조카인 니콜라이 2세는 유럽 군주 명단에 없었다.

그 대신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이자 에드워드 7세의 처제인 덴마크의 다우마, 즉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와 그녀의 넷째 아들인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그리고 니콜라이 2세의 장녀인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여대공이 러시아 제국 대표로 참석할 예정이라 들었다.

‘그나저나 올가 여대공이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 참석했나?’

원래 어린 시절부터 장녀로서 니콜라이 2세를 대신해 유럽을 돌아다녔다고 알고는 있었는데 이게 바뀐 역사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도 참석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 명단을 외우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어쨌든 유럽 말고도 일본이나 청나라 등지에서도 왕족들이 조문하러 올 예정이라니 그야말로 장관이겠네.’

적어도 빅토리아 황태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에드워드 7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자, 그럼 다들 들어가지.”

조지 5세의 말에 나는 에드워드 7세의 관이 안치되어 있는 버킹엄 궁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와 더불어 대영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상징했던 에드워드 시대(Edwardian period)의 종말을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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