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33화 (133/193)

133화 : 계속되는 위기 (5)

“은혜도 모르는 배신자 주제에 뻔뻔하게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내가 정녕 믿을 자를 잘못 골랐구나!”

“내가 배신자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으나 적어도 당신에게선 듣고 싶지 않군.”

1909년 말, 독일령 키아우초우.

열강들의 중재로 각자 청나라와 중화민국의 대표로 협상장에 나온 위안스카이와 돤치루이가 서로를 보자마자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자 협상 장소를 제공한 주청 독일 공사 아르투어 폰 렉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마치 썩은 고기를 두고 다투는 늑대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역시나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며 투덜거리는 것은 덤이었다.

‘젊은 한스 폰 초이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을 떠맡게 되는군.’

물론 이게 최선이라는 것은 렉스 공사도 머릿속으론 이해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자자, 얼굴을 붉히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시고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이야기가 시작되질 않고 있지 않습니까.”

렉스 공사를 비롯한 열강 5개국의 외교관들과 함께 중재역을 맡은 주청 영국 공사이자 훗날 워싱턴 해군 조약에도 영국 대표로 참가한 존 조던(John Newell Jordan) 경이 엄하게 말하자 돤치루이와 위안스카이가 기 싸움을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렉스 공사와 주청 프랑스 공사 피에르 드 마제리(Pierre Jacquin de Margerie), 주청 러시아 공사 이반 야코블레비치 코로스토베츠(Иван Яковлевич Коростовец), 주청 미국 공사 윌리엄 우드빌 록힐(William Woodville Rockhill)도 따라서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우선 우리 독일 제국을 포함한 여기 모인 5개국이 청 정부와 중화민국 정부 양쪽에 보낸 권고에 양쪽 모두 동의했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물론이오.”

렉스 공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듯이 말하자 평온한 얼굴의 돤치루이와 위안스카이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다만 돤치루이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던 데 비해 위안스카이는 정말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인 듯 얼굴이 죽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돤치루이가 뒤통수를 치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기 일보 직전이었던 위안스카이다.

싸우지 말고 그냥 중국을 반으로 뚝 잘라서 나눠 가지라는 열강들의 명판결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꿈에도 그리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황제를 또다시 배신한 것도 모자라 평생을 섬겨 온 왕조까지 저버렸는데 얻은 것은 고작 중국의 절반이라니.

이 무슨 금나라와 남송이 20세기에 부활하는 개소리란 말인가.

이 때문에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야망을 눈앞에서 물거품으로 만든 돤치루이를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요절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열강 공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을 뿐.

“이젠 하다 하다 양이들의 손에 나라가 절반으로 갈리게 생겼구나. 내 어찌 죽어서 선조들을 뵐 명목이 있단 말인가!”

다만 열강들의 권고라 쓰고 협박이라 읽는 짓거리에 분노를 터트리는 것은 위안스카이만이 아니었다.

돤치루이로부터 권고안을 전해 받은 순친왕 또한 중국 남부를 반란군에게 떼 주라는 말에 노기를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그 또한 머리로는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인간은 합리와 이성으로만 움직이지 않기에 인간인 법이다.

게다가 중국을 분열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장본인이 하필이면 또 그놈의 한스 폰 초이였다.

순친왕은 솟구쳐 오르는 분을 참지 못하고 기어코 집안의 도자기를 전부 박살 내고 말았다.

물론 새롭게 청의 실권자가 된 돤치루이이야 청의 목숨줄을 붙여 놓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시간을 번다는 목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리고 이것은 쑨원 같은 혁명파들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청을 무너트리지 못해 아쉬워하긴 했지만, 열강들에게 중화민국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소소하게 기뻐하며 권고를 받아들이고 훗날을 도모하자 주장했다.

절반의 성공이긴 했지만 어쨌든 혁명은 성공했고 또한 괜히 열강의 권고를 거절했다가 그들에게 괜히 밉보여 기껏 탄생한 중화민국을 말아먹고 싶지 않았단 이유도 컸다.

아직 그들은 9년 전 의화단의 난 당시 열강들이 어떻게 중국을 짓밟았는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위안스카이는 이래서 나약한 서생들이랑은 같이 일을 못 한다며 한동안 울분을 터트렸지만, 그 자신도 열강 군대에 맞서고 싶진 않았기에 결국 눈물을 머금고 중국의 주인에서 중국 남부의 주인으로 목표를 바꾸어야만 했다.

이제 남은 건 청과 중화민국이 중국을 어떻게 반으로 가르는가를 정하는가의 문제였고 오늘 이 자리에서 돤치루이와 위안스카이가 담판을 지어야 할 문제였다.

“깔끔하게 장강을 기준으로 국경을 정하시죠.”

“웃기지도 않는 소리! 쓰촨에서 산둥까지 중화민국을 지지하고 있는데 그게 지금 말이나 된다 생각하는가?!”

그리고 영토 협상이 언제나 그렇듯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자마자 돤치루이와 위안스카이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둘은 장난감을 두고 싸우는 어린아이들처럼 어떻게든 더 많은 영토를 가져가기 위해 격렬하게 부딪혔고 협상은 점점 길어졌다.

만약 열강 공사들이 빨리 끝내라는 듯 지루한 눈으로 자신들을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며 대륙의 기상을 만천하에 알렸을 것이다.

“후, 좋습니다. 안후이는 양보하겠습니다. 대신 산둥은 청이 가져가겠습니다.”

“그러면 후베이는 우리 것이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위안스카이와 돤치루이가 드디어 기적적으로 합의를 보며 지루한 말싸움에 종지부를 찍었다.

협상을 지켜보다 지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렉스 공사가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하암, 그럼 이것으로 양국의 국경 조정이 끝났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쯧, 그렇소.”

“좋습니다. 그럼 바로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렉스 공사가 말했다.

“조약에 따르면 청과 중화민국은 쓰촨과 후베이, 안후이, 그리고 장쑤를 경계로 삼아 그 이북은 청이 이남은 중화민국이 가져갑니다. 두 분 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또한, 청과 중화민국이 조약 체결 이후 5년간 휴전한다는 것에도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오.”

“좋습니다. 우리는 이로써 다시금 중국의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렉스 총리가 손뼉 치며 그리 선언하자 조던 경을 비롯한 열강 외교관들은 드디어 앓던 이가 빠졌다는 듯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돤치루이와 위안스카이는 악수도 없이 여전히 서로를 노려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당장은 이 문제를 매듭지은 듯 보였지만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이 평화는 절대로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평화가 깨지는 날, 청과 중화민국은 다시금 대륙의 천명을 거머쥐기 위해 부딪히리라는 것을.

* * *

덜컹─덜컹─

“이토 상, 곧 선양(瀋陽, 심양)에 도착합니다.”

“청나라 관리들이 미리 나와 있었으면 좋겠군. 기다리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키아우초우에서 청과 중화민국이 평화조약을 맺으며 중국이 금나라와 송나라 구도로 양분된 이후.

서구열강들은 중국에서 시선을 돌려 다시 자신들의 눈앞에 놓인 문제로 돌아갔지만, 러일전쟁이 끝나고 권력의 중심으로 돌아온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은 중국의 분열을 기회로 다시금 대륙에 손을 뻗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아우초우 조약 당시 열강들 사이에 끼지 못한 채 어떠한 목소리도 내지 못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이대로 중국 이권을 포기하기엔 아직 일렀다.

휴전 조약 이후 청과 중화민국은 다가올 천명대전을 준비하며 힘을 기르고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는 청과 중화민국 양쪽에게 무기를 팔아먹으며 그 대가로 돈과 이권을 뜯어 올 생각이었다.

“멍청한 야마가타 자식은 오로지 전쟁이 해결책인 줄만 알지. 그렇기에 실패했고.”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 자신은 달랐다.

그는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야마가타가 얻길 원했던 모든 것을 얻을 자신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외교’이며 이토 히로부미의 방식이었고 여론의 질타와 메이지 천황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권력을 잃은 채 집에서 손주 재롱 잔치나 보고 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자신의 차이점이었다.

“그나저나 나이가 드니 몸이 예전 같지 않군. 이번 청과의 거래도 잘 끝내면 휴가를 내고 푹 쉬어야겠어.”

현재 일본이 가장 힘을 쏟고 있는 조선 괴뢰국화도 얼마 전 외교권을 ‘양도’받으면서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었으니 걱정할 것은 없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조선 황제가 살짝 난리를 치긴 했지만, 궁에서 한 걸음도 못 나오는 상태이니 신경 쓸 필요도 없었고.

‘오히려 난 조선보다 군부 놈들이 더 걱정되는군.’

이토 히로부미는 러일전쟁 이후 권력을 잡으면서 더는 군인들이 설치는 것을 보고만 있진 않겠다는 듯 그들을 권력에서 배제하려고 시도했다.

그 때문에 현재 이토 히로부미는 육군과 해군을 가리지 않고 공공의 적으로 찍힌 상태였고 틈만 나면 그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끌어내리려 하는 중이었다.

어리석은 작자들이었다.

동시에 위험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이대로 저들을 놔두면 언젠가 폭주하며 종국엔 일본을 망하게 만들 것이다.

러일전쟁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둘 순 없지.’

막부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토 히로부미는 죽기 전에 문민통제를 더욱 강화해 군인들이 영영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만들겠다고 맹세했다.

끼이이이익───취이이익~!

“오, 도착했나 보군.”

그렇게 그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어느새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수행원들과 함께 느릿느릿하게 열차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원 역사에서 조국을 빼앗아 간 그를 처단했던 황해도 출신의 젊은 독립운동가가 그때와 같은 장소에서 다시 한번 그의 목숨을 끊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단 사실을.

철컥─

“이토 상, 여기입니다!”

이토를 맞이하러 온 일본인 중 누군가가 이토 히로부미를 불렀다.

그리고 이토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하는 순간, 허공에 총성이 울렸다.

타앙───!

“얽!”

“이토상?!”

“꺄아아아아악!”

단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단 하나의 탄환이 이토 히로부미의 미간을 깔끔하게 꿰뚫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 기차역 바닥에 널브러져 즉사했고 수행원들과 그를 경호하기 위해 선양에 온 일본군은 사방에 비명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눈과 고개를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의 명줄을 끊은 사나이, 안중근(安重根)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기차역에서 멀리 떨어진 건물 위에서 스코프를 달은 소총을 손에 든 채 유유히 서 있었으니까.

“……코레아 후라(Korea Hooray).”

안중근은 작은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외치며 퇴역한 예거 출신의 늙은 독일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대로 총성을 들은 일본군이 달려오기 전에 서둘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와 달리 이토 히로부미는 이번에도 자신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 * *

“이토 히로부미가 결국 죽었구만.”

“그게 누군데?”

커피를 홀짝이며 조간신문을 읽던 도중 이토 히로부미가 스나이퍼로 전직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되었단 소식에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을 터지자 내 옆에 앉아있던 루이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본 정치인. 네가 신경 쓸 사람은 아니야.”

“그래?”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원 역사에서나 이 세계에서나 국제적으로 봤을 때 그다지 큰 사건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유럽에서도 틈만 나면 왕족들이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인데 일본의 늙은 정치인 하나 죽었다고 전 세계가 뒤집히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나저나 올해는 여러모로 시끄러웠네.”

“그러게나 말이야.”

“부디 앞으로는 분쟁이나 혁명 같은 소리 없이 쭉 평화로웠으면 좋겠는데.”

루이제의 말에 나는 말 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루이제의 바람과 달리 유럽의 평화는 여전히 지칠 줄 모르고 끝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고 달력의 연도는 어느새 1909년에서 1910년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전 세계가 전화(戰火)가 물들 광란의 1910년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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