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26화 (126/193)

126화 : 보스니아 위기 (2)

‘프란츠 요제프, 이 근친 턱돌이, 거지 같은 틀딱 노인네 같으니!’

나는 도저히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속으로 소리쳤다.

감히 코리안 앞에서 부모님 안부를 묻는 망발을 지껄여?

“미안하네, 남작. 내가 대신 사과하지. 숙부님께선 원래 저런 분이시라네. 자네가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길 바라네.”

내가 씩씩거리며 화를 삭이고 있을 때, 아무 죄도 없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로 나를 향해 대신 사과했다.

알고 있다. 그가 남의 의견을 듣기 싫어하는 독선적이고 고집이 센 인물이었단 것은.

그리고 외아들이었던 루돌프 황태자가 충격받고 자살을 선택할 정도로 자신의 가족에게조차 거침없이 막말을 쏟아 내는 작자였다는 것도 말이다.

‘내가 그것을 이해해 줄 이유는 없지만.’

하지만 화가 난다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를 공론해 봤자 결국엔 나만 손해였을뿐더러 패드립을 당했다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동맹 관계를 파탄 낼 수도 없었으니까.

당장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얼굴을 보고 참을 뿐이다.

아, 이런 X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이 대체 얼마 만일까?

발더제, 아니 알헤시라스에서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다 모든 것을 말아먹은 베조브라조프 이후 처음이었다.

다만 베조브라조프가 상황 판단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탐욕에만 눈이 먼 머저리였다면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일부러 이러고 있다는 점에서 더 악질이었다.

‘하긴 이러니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

흔히 불운한 가정사로 비운의 황제라 불리는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평생을 바쳐 지켜 온 제국이 멸망하는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가정 교육을 잘못 받은 탓인지 평생을 전제 군주로 남고자 했고 외교적으론 독일 제국에 의존만 했으며 다른 나라들이 부국강병에 힘쓸 때도 군대, 경제, 산업 발전에도 무관심했다.

당장 이번 보스니아 위기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오히려 경제적, 정치적으로 큰 손해를 보고 있음에도 프란츠 요제프는 무작정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만을 밀어붙이고 있었으니 말 다 했다.

심지어 조카이자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도 격 떨어지는 여자와 결혼했다고 싫어해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제국의 분열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와중에도 황제는 정작 그를 홀대하며 견제하기만 했으니.

‘괜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사망하자마자 2년 만에 붕괴한 것이 아니지.’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이 가장 큰 원인이긴 했지만.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또한 결국 세르비아를 집어삼키려는 프란츠 요제프의 야욕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의 책임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실책의 결과, 그가 한평생 지키려고 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과거의 영광을 모두 잃어버린 채 완전히 몰락한다.

‘후우, 왜 내가 만나는 군주마다 죄다 이 모양 이 꼴일까?’

나는 한숨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럽 군주국들이 세계대전을 전후하며 대부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 절로 이해가 된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군주 중 그나마 명군이라 불릴 만한 사람이라고 해 봤자 고작 에드워드 7세 하나 정도였으니까.

물론 에드워드 7세도 사생활 쪽으로 들어가면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이대로 포기하고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건 좀 그렇고 몇 번은 더 설득을 시도해 봐야지.’

오늘 그 똥고집을 봐선 가망은 없어 보이지만.

뭐, 안되면 별수 없다.

원래 나도 그리 큰 기대를 품고 온 것은 아니니까.

갑자기 황제에게 부모님 안부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다.

“남작, 이만 호텔로 돌아갈 텐가?”

“아니요. 잠시 근처에서 바람 좀 쐬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내가 봐도 머리 식힐 필요가 있어 보이네.”

나는 이해한다는 얼굴의 치르슈키 대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쇤부른 궁전 앞 공원으로 향했다.

바람을 쐬니 어지러웠던 머리가 조금이나마 맑아지는 기분이다.

“아, 그러고 보니 기념품 사 들고 가기로 루이제랑 약속했는데.”

프란츠 요제프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뭐가 좋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공원에서 그림엽서를 팔고 있는 화가가 시선에 들어왔다.

흠, 루이제는 화려한 선물을 그다지 안 좋아하니 오히려 저런 것이 더 괜찮으려나?

“안녕하세요. 그림엽서 좀 볼 수 있을까요?”

“아, 동양에서 온 유학생이신가? 마음껏 구경하세요. 다 제가 손수 그린 엽서들이랍니다.”

화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엽서들을 이리저리 살폈다.

보아하니 꽤나 멋들어진 그림들이 많은 것이 꽤 실력이 좋은 화가인가 보다.

‘그나저나 이 사람 왠지 낯이 익네.’

어디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의외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저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어……, 아돌프 히틀러라고 하는데요?”

시발, 이 새끼가 왜 여기 있어?

* * *

공원을 걷다 그림엽서를 사러 왔는데 아돌프 히틀러,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 범죄자이자 콧수염 총통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잘은 몰라도 로또 1등도 이보단 확률이 높을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아는 사람과 착각해서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젊은 히틀러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충 그리 둘러댄 나는 프란츠 요제프에 대한 분노는 이미 잊어버린 채 다른 의미로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아돌프 히틀러.

이대로 방관하기엔 그 이름이 가진 악명이 너무나도 높았다.

‘이놈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까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게 의미가 없었다.

내가 건재하고 독일 제국이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지 않는 이상, 히틀러와 나치가 원 역사처럼 권력을 잡을 확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돌프 히틀러는 어디까지나 베르사유 조약과 대공황의 피를 마시고 자라난 괴물.

게다가 정권을 잡게 된 것도 어디까지나 힌덴부르크를 비롯한 바이마르 공화국 권력자들의 머저리 같은 짓이 한몫했다.

‘무엇보다 히틀러가 없어도 제2차 세계대전은 일어났을 것이란 게 정설이니.’

솔직히 독일이 그 지경이 될 정도로 떨어지는 것을 두고 본다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이유도 없지 않을까?

‘게다가 써먹을 곳도 없어!’

내가 이 인간을 내가 대체 어디다 써먹겠나?

선전? 이미 라디오로 대중 언론을 장악한 마당에 굳이?

‘정 나팔수가 필요하면 차라리 박사 학위 딴 괴벨스를 쓰고 말지.’

그냥 내버려 두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손을 쓰기도 애매하다.

젊은 길거리 화가 히틀러는 그야말로 계륵 중의 계륵이었다.

‘역시 그 방법이 가장 최선이겠지.’

“손님?”

“아, 죄송합니다. 다 그림이 예뻐서 무엇을 고를지 고민이네요. 혹시 어느 미술 대학을 나오셨나요?”

“네? 하하, 그게 미대를 나오진 못했습니다. 제 그림이 대학이 원하는 것과는 맞지 않는다는군요.”

“그거 안타깝네요. 정말 잘 그리시는데.”

실제로 히틀러의 그림 실력은 그림으로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다만 그게 입시 미술 쪽 하곤 거리가 멀어서 그렇지.

그래서 미술 대학 교장도 히틀러에게 더 잘 맞는 건축대에 가는 것은 어떻겠냐고 권했지만, 교장은 몰랐다.

우리의 아돌프 히틀러 군은 중졸이라 건축대에 갈 학력이 안 되었다는 것을.

“그나저나 장사는 잘되십니까?”

“나름요. 그래도 슬슬 다른 곳으로 가고 싶네요. 특히 요즘은 오스트리아보단 독일이 훨씬 잘 나가잖아요? 그래서 돈이 모이면 독일로 가 볼까 생각 중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그럼 나중에 독일에 가시면 베를린 예술대학교(Universität der Künste Berlin)에 지원해보세요. 그곳에서 유학 중인 제 지인이 말하길 거기 교수들이 요즘 이런 그림을 선호한다고 하는군요.”

“오, 그렇습니까?”

아직 미술 대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귀를 쫑긋거리는 히틀러.

물론 뻥이다.

베를린 예술대학교의 교수들이 무슨 그림을 좋아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하지만 적어도 내겐 히틀러를 합격시키라 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솔직히 이대로 히틀러를 내버려 두느니 일단 미대에 집어넣고 어떻게 되나 지켜보는 것이 더 나았다.

솔직히 다들 궁금하잖아?

과연 히틀러가 정말 미대에 가면 어떻게 변할지.

감시도 할 겸 일종의 실험을 한다고 생각하자.

물론 나중에 우리 콧수염이 기어코 정치판에 기웃거린다?

그땐 나도 얄짤없다.

* * *

“그럼 장사 잘하십시오.”

“네, 안녕히 가세요.”

빈의 길거리 화가, 아돌프 히틀러는 그림엽서를 잔뜩 사 간 동양인 유학생을 미소로 배웅하며 생각에 잠겼다.

베를린 예술대학교라.

예술의 본고장인 파리에 비하면 손색이 떨어지긴 해도 그 독일 제국에서 가장 이름 높은 미술 대학이다.

정말 그곳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히틀러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꿈같은 일.

“역시 오스트리아가 잘 못 되었어. 독일에서도 내 그림이 먹힌다잖아.”

히틀러는 그리 지레짐작하며 자신에게 좋은 정보를 알려 준 동양인 유학생을 향해 속으로 감사를 전했다.

“그러고 보니 독일에서도 동양인인 한스 폰 초이, 그 유명한 카이저를 구한 소년이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고 하던가.”

어쩌면 그가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Übermensch)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인종적으로 게르만족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그의 활약을 보면 명예 아리아인으로 인정해 줄 만하다고 히틀러는 생각했다.

히틀러는 그렇게 한스에게 관심(본인은 전혀 원하지 않을)을 보이며 빈을 떠나 독일 제국으로 가는 날을 꿈꾸었다.

물론 그러려면 엽서를 더 많이 팔아서 여비를 마련해야겠지만 말이다.

“빨리 좀 오게, 코바. 그 달리기 실력으로 대체 은행 강도는 어떻게 했나?”

“헉…… 헉……. 시끄럽습니다. 트로츠키 동지.”

한편 히틀러와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카페에선 그와 마찬가지로 세계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이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탈출 후 1년 전에 빈으로 망명 온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와 그루지야 출신 혁명가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근처에서 그림엽서를 팔고 있는 히틀러의 영혼의 라이벌이자 강철의 서기장, 이오시프 비사리오비치 스탈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이었다.

본래 스탈린은 이 시기엔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어 바쿠에서 감방 생활을 하고 있어야 했지만, 혁명가 때려잡기가 취미인 스톨리핀이 원 역사 빨리 총리가 된 탓인지 역사가 바뀌어 이 세계의 스탈린 또한 트로츠키처럼 탄압과 추적을 피해 빈으로 잠시 망명을 온 상태였다.

물론 한스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오늘 사실 콧수염 정모 날이냐고 어이없어했을 테지만.

“주인장, 여기 카페 초이 두 잔 주시게나.”

“제기랄, 왜 멋대로 그 구정물을 시키는 겁니까? 전 그거 싫단 말입니다!”

“그야 내가 먼저 주문했으니까. 꼬우면 먼저 주문하지 그랬나?”

트로츠키가 깐죽거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주가슈빌리는 어째서인지 얼음송곳이 무척이나 마려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물론 혁명 동지를 고작 커피 하나 때문에 죽일 수는 없었기에 이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지만.

“그러고 보니 이 카페 초이를 만든 장본인이 이곳 빈에 와 있다는군. 한스 폰 초이, 카이저를 구한 소년 말이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얼마 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한 것 그 때문이겠지요. 명색이 비스마르크의 후계자 아닙니까?”

주가슈빌리가 그리 비꼬며 말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독일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이었고 또 이번 보스니아 합병은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베를린 조약을 위반한 것이기도 했으니.

그가 뒤처리를 위해 빈에 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후후, 비스마르크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지. 작금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라고. 그리고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그리고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이 그 폭발을 일으킬 것이라고도 했죠. 뭐, 이번 일로 제국주의 열강 간에 전쟁이 터지리라 생각하는 겁니까?”

주가슈빌리의 물음에 트로츠키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아니지. 하지만 내 생각엔 이번 일이 그 도화선이 될 것 같군.”

바야흐로 민족주의의 시대다.

그리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에 이해관계가 있는 세르비아는 특히나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악명높은 나라.

이로 인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트로츠키가 꿈꾸는 세계혁명이 일어날 기회가 될 것이다.

“전 유럽에 혁명이 다가오고 있네, 코바. 제국과 왕국들은 무너질 것이고 그 폐허 위에 노동자들의 붉은 깃발이 우뚝 설 것이야.”

트로츠키는 연극배우처럼 과장되게 팔을 벌리며 선언하듯이 말했다.

물론 주가슈빌리는 이 인간 또 시작이라는 듯 떨떠름한 얼굴을 지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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