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25화 (125/193)

125화 : 보스니아 위기 (1)

1908년 10월 6일, 평화로웠던 독일 제국외무청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어제 명목상 오스만 영토였던 불가리아 공국이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데 이어 오늘 아침 일찍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 제국과 그 어떤 논의도 없이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러시아와 독단적으로 맺은 협약에 의한 것이었고 동맹국이 멋대로 저지른 사고에 쇤 외무장관은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도 그렇고 머지않아 일어날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때 이탈리아도 그렇고 왜 우리에게 한마디도 없이 일을 저지르는 건지.

얘들이 대체 우리를 동맹국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호구로 여기는지 의심이 갈 지경이다.

‘난 솔직히 프랑스나 러시아보다 이 두 웬수 같은 동맹 놈들이 더 무서워.’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엄연한 자주국인 만큼 우리 독일이 그들의 외교 정책에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다.

독일 제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이해관계도 딱히 없었고.

그러나 이번 보스니아 위기는 결코 독일 제국과 무관하지 않았다.

보스니아 위기가 사라예보 사건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니 넘어가더라도 이번 합병 자체가 비스마르크 시절 체결된 흔히 베를린 회의라 알려진 1878년 베를린 조약을 위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회의는 본래 러시아 제국이 제1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쥐어패고 독단적으로 맺은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인해 열강 간의 대립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외교 회담이었다.

베를린 회의 당시 러시아 제국은 전쟁에서 이기고도 전리품 상당수를 뱉어 내야 했고 본격적으로 독일 제국과 갈등을 빚게 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베를린 회의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 제국의 공동통치령으로서 명목상으론 오스만 제국의 영토이지만 실질적으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관리를 맡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청년 튀르크 혁명을 틈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완전히 집어삼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행동은 명백한 조약 위반이었다.

‘물론 원 역사에선 보스니아 위기 당시 독일 제국은 그냥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했지만…….’

적어도 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역사가 크게 비틀어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까 봐 보스니아 위기가 일어나는 것 자체는 막지 않았지만, 그 결과로 우리가 피해 보는 일은 최소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발칸의 퉁퉁이 세르비아와 비실이 몬테네그로가 웃기지 말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진심으로 선전포고하려고 생각했을 정도로(다만 이건 러시아가 말렸다) 큰 분노를 터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넘어간다 치자.

하지만 문제는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본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에 동의하는 대신 트렌티노나 이스트리아반도 같은 오-헝이 점령하고 있던 미수복 영토 일부를 돌려받길 원했는데 매정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탈리아의 요청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 도중 삼국동맹을 탈주하고 협상국으로 갈아타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역시 웬만하면 막는 게 좋겠지?’

아무리 이탈리아가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동맹국이라지만 그래도 원 역사처럼 통수치고 적국이 되는 것보단 나았다.

게다가 이탈리아가 등을 돌리면 그 부담은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게 될 테고 원 역사를 생각하면 그 뒤처리는 결국 우리 독일이 해야 할 게 뻔했으니까.

‘쯧, 마음에 안 들긴 해도 썩어도 동맹국이니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줘야지.’

내가 그리스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리스가 못 싸우든 잘 싸우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리스를 아군으로 만들려고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까지나 혹시 모를 변수를 하나 줄이는 동시에 발칸 전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부담을 줄여 주려고 하는 것이니까.

‘물론 러시아와 세르비아를 견제하는 목적에서 그리스가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 외교적 위치가 나름 중요한 것도 있지만.’

게다가 사실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 시대 그리스는 그렇게 약한 국가가 아니었다.

당장 몇 년 뒤에 일어날 발칸전쟁 당시 그리스는 불가리아나 세르비아보다 동원한 육군 병력이 적긴 했어도 나름 수월하게 오스만 제국군을 무찔렀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는 발칸 소국 중 유일하게 현대화된 상당한 전력의 해군을 가지고 있는 국가.

실제로 그리스 해군은 발칸전쟁 당시 오스만 해군을 연달아 격파하며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고 에게해의 제해권을 성공적으로 장악해 유럽 오스만과 아시아 오스만을 단절시키는 대활약을 펼쳤다.

괜히 발칸 동맹의 주력을 맡았던 불가리아군이 그리스 해군 덕분에 전쟁에서 승리했다며 그 높은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를 인정했던 것이 아니다.

물론 그 후에 불가리아는 전리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스와 세르비아를 공격하며 제2차 발칸전쟁을 일으키지만.

‘어찌 되었든 한번 쇤 외무장관과 뷜로 총리에게 말을 해 봐야겠어.’

적을 줄이고 아군을 늘이는 것은 전략과 외교의 기본 중의 기본.

이탈리아가 삼국동맹에 남으면 우리의 부담은 줄고 프랑스의 부담은 배로 늘어날 것이다.

“……자네 생각은 잘 들었네.”

그러나 내 제안을 들은 뷜로 총리는 어째선지 영 탐탁지 않아 하는 얼굴이었다.

“이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으로 인한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 악화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게다가 삼국동맹 체결 당시 맺은 조약에 따르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발칸반도에서 영토 변화가 있을 시 이탈리아와 상호합의 하에 진행해야 하니까.”

비스마르크가 삼국동맹 설립 당시 이탈리아를 삼국동맹에 끌어들이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압력을 가하면서까지 만든 조항이었다.

괜히 이탈리아가 이번 보스니아 위기로 미수복 영토를 일부나마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설레발을 친 게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우리가 삼국동맹을 들먹이며 이탈리아에 양보하라고 한들 들을 리가 없다는 것이야.”

“그래도 노력은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우, 지금까지 남작 자네가 만난 유럽의 군주들과 왕족들은 자네에게 호의적이었지.”

뷜로가 말했다.

“전직 외교관으로서 말하자면 영국의 에드워드 7세는 인종이나 계급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네.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원래 사람이 착하고. 콘스탄티노스 왕세자는 소피아 전하 덕분에 자네를 좋게 보고 있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다르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겪어 보면 알겠지만 어떤 의미론 굉장히 골치 아픈 사람이네. 게다가 이번만큼은 카이저 폐하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어. 권위와 위상으론 우리 카이저 폐하조차 프란츠 요제프 앞에선 한발 물러나야 하니까.”

하긴 수 세기 동안 유럽에 군림해 온 합스부르크다.

현실이 어떻든 적어도 왕실로서의 위상은 호엔촐레른 이상이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해 보는 것보단 낫겠지.’

나도 솔직히 큰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보단 뭐라도 해 보고 실패하는 게 더 나을 뿐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이탈리아에 우리 오스트리아의 정당한 영토를 할양하라고? 그대는

그런 쓸데없는 소리나 하러 짐의 시간을 빼앗고 짐의 궁전에 들어온 것인가?”

그러나 빈에 도착한 나는 뷜로가 어째서 나를 만류하려고 했던 것인지 깨달았다.

프란츠 요제프 1세.

그는 꼰대 중의 상꼰대였다.

* * *

1908년 10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 쇤부른 궁전.

“……폐하, 이는 삼국동맹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일이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초대 황제이자 또 다른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는 눈앞의 젊은 청년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한스 폰 초이 남작.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소문은 익히 들은 바였다.

그 명성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늙은 황제를 불쾌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짐은 독일 제국이 우리 오스트리아를 지지할 줄 알았건만. 이것이 정녕 귀국 황제의 뜻인가?”

“폐하, 독일 제국은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존중하는 만큼 오스트리아도 다른 동맹을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한스가 말했다.

“삼국동맹의 상호합의 조항에 따르면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한 이상 이를 인정받으려면 이탈리아에도 어느 정도 양보를 하셔야 합니다. 최소한 트렌티노 지방의 일부라도 할양한다면 이탈리아도 만족하며 물러날 것입니다.”

“폐하, 남작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게다가 트렌티노의 일부 정도라면…….”

“그만.”

독일 제국의 경조사에 꾸준히 참석한 덕분에 한스와 안면이 있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한스의 말에 동의하며 숙부의 설득에 나섰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듣기 싫다는 듯 그의 말을 끊었다.

“더는 이 말도 안 되는 논의로 짐의 귀를 더럽히지 말라.”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한숨을 쉬었다.

숙부가 이렇게 나오는 이상 그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남작, 일단은 돌아가고 다음에 다시 오세나.”

한스와 같이 쇤부른 궁전을 찾은 전 외무장관이자 현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인 치르슈키도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며 후퇴를 권했다.

그러나 한스는 이대론 못 물러나겠는지 프란츠 요제프의 심기 불편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입을 열었고 프란츠 요제프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의 건방진 태도에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 독일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1878년 베를린 회의 당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인해 삼제동맹을 한번 깨트렸을 때도 끝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지했습니다.”

물론 당시 삼제동맹이 파탄 난 것은 비스마르크의 책임도 있었지만 한스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진 않았다.

“그리고 지금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우리 독일과 어떤 상의도 없이 베를린 회의를 위반했음에도 여전히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돕기 위해 나서고 있는데 정작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동맹에 대한 신의를 지키지 않는군요. 우리 독일은 오스트리아 때문에 또다시 러시아와 마찰을 빚게 생겼는데도 말입니다!”

“장관, 이번 일은 러시아와 협의가 이미 된 것으로…….”

“그 지켜지지도 않을 협의 말입니까?”

한스가 언성을 높이자 조용히 있던 에렌탈 외무장관이 변명하듯 입을 열었지만, 정곡을 찌르는 말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러시아에게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사이에 있는 예니파자르 산자크(Yeni Pazar sancağı) 지역에서 군대를 물리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열어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어째 예전에 러일전쟁 당시 한스가 한 일이 떠오르지만, 문제는 그때랑 지금이랑은 상황이 달랐다.

게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 제국과 달리 오스만 제국과 친하지도 않았고(오히려 보스니아 위기로 인해 관계가 나빠졌다) 무엇보다 해협이 열린 것 때문에 모로코에서의 그 난장판을 겪어야 했던 영국이 이를 두고 볼 리가 만무했다.

실제로 원 역사에서도 보스니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베를린 조약을 수정할 때 러시아의 해협 통행을 끝내 무산시킨 영국이다.

모로코 위기를 겪은 지금은 해협의 해자만 나와도 발작하는 치와와처럼 난리를 칠 것이 분명했다.

“러시아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사기를 쳤다는 것을 알면 참 좋아하겠군요.”

“……이에 대해선 우리도 나름대로 해결책이 있습니다. 러시아 제국이 분노하더라도 결국 합병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 당장은 그렇겠죠. 하지만 결국 러시아 제국과의 외교 관계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실제로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사기를 당한 것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때의 악감정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폐하, 부디 독일 제국이 신의를 지킬 수 있도록 오스트리아-헝가리 또한 동맹에 대한 신의를 보여 주십시오. 이탈리아에 조금만 양보하신다면 독일 제국 또한 이 문제에 있어 최대한 오스트리아를 돕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허허, 운 좋게 귀족이 되었을 뿐.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미천한 혈통 주제에 감히 짐을 가르치려고 드는 건가?”

“!”

“숙부님!”

“폐하!”

“이만 돌아가도록 하게.”

한스를 향한 모욕적인 언사에 페르디난트 대공과 치르슈키 대사가 경악하며 목소리를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냉랭한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예. 그럼 다음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스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까득─

그러나 늙은 황제에게서 등을 돌린 한스의 두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살벌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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