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24화 (124/193)

124화 : 영턱스

전차 경합이 벤츠 사와 다임러 사의 공동우승으로 결정 난 뒤, 두 회사는 곧바로 프로토타입을 기반으로 전차를 양산할 준비에 들어갔다.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예산 문제가 발목을 잡아 본격적인 생산은 1912년으로 밀렸지만 말이다.

‘덕분에 뷜로랑 아이넴이 한바탕했지.’

게다가 전차를 두고 군부 내에서도 소란이 일어났다.

아이넴 전쟁장관이 전차는 당연히 기병이 가져가야 하지 않겠냐며 기병 편제 아래 넣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이 양반, 아버지부터가 기병대장 직위에 있던 뼈대 있는 기병 가문 출신이거든.

“몰트케 참모총장, 평가회에서의 보았던 것을 잊으셨소? 다임러 전차는 딱 봐도 흉갑기병 같은 중기병, 벤츠 전차는 후사르 같은 경기병을 대체할 수 있소. 전차야말로 새 시대의 기병대란 말이오!”

“이 무슨 마하트마도 분노할 천인공노할 헛소리인지. 전차는 보병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만큼 보병이 가져가는 게 맞소!”

물론 몰트케를 비롯한 보병 출신 장성들이 기병에게 전차를 빼앗기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그리고 여기에 대포 달린 것은 무조건 우리 것이라는 포병까지 끼어들면서 졸지에 전차를 두고 보병, 기병, 포병 간의 끊임없는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그냥 기갑 병과를 새로 창설하고 장교 TO를 늘리는 게 낫지 않나?”

“그거다!”

결국 이 대립을 멈춘 것은 지혜로운 현자같이 나타난 은퇴한 슐리펜이었다.

물론 이는 사실 다 큰 아저씨들이 애들처럼 전차를 두고 싸우는 한심한 꼴을 보기 힘든 나머지 내가 뒤에서 나선 것이지만.

그래도 그 과정이야 어쨌든 전차를 도입한다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일단은 여기서 만족하자.

트랙터 프로젝트의 중요한 부분은 끝났고 이제 남은 것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뿐이니까.

게다가 올해부터는 나도 상당히 바빠질 예정이었다.

1908년은 유럽에 세계대전의 전운이 본격적으로 드리우기 시작한 해였고 그만큼 중요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해였으니까.

당장 전차 경합이 일어나기 며칠 전인 2월 1일엔 포르투갈 국왕 카를로스 1세와 루이스 필리프 드 포르투갈 왕세자가 공화주의자들에게 암살되면서 사실상 포르투갈 왕정의 끝을 고했고 4월 22일엔 헨리 캠벌배너먼 영국 총리가 건강 악화로 인해 사망했다.

그리고 그 후임으로 영국 총리가 된 인물이 재무장관이었던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Herbert Henry Asquith)였다.

그에 대해선 아는 것은 많이 없지만, 재임 중 제1차 세계대전을 맞이한 인물로 전시 총리로서 능력 부족을 지적받아 1916년에 총리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들었다.

그리고 새롭게 영국의 전시 총리가 된 인물이 바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로 조르주 클레망소, 우드로 윌슨, 비토리오 오를란도와 함께 흔히 ‘빅4(Big four)’라 불리는 원 역사의 협상국 사황 중 한 명이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전시 총리로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승리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베르사유 조약으로 유명한 파리 강화회의, 아일랜드 독립 승인 등 여러모로 세계사의 굵직한 발자국을 남긴 거물 중의 거물.

그러나 말년에는 나치당과 히틀러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데다가 프랑스 침공 당시에는 아예 독일과 강화하자고 주장까지 하는 바람에 처칠에게 ‘페텡 같은 노인네’라고 욕을 먹기도 했다.

‘어째 페탱도 그렇고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들은 2차 세계대전 시기가 되면 추해지는 것인지.’

이래서 사람은 늙어도 곱게 늙어야 한다.

난 저렇게 되기 전에 그냥 일찍 은퇴하고 루이제랑 오순도순하게 손주들 재롱 잔치나 보며 유유자적 살련다.

“쇤 장관님, 큰일 났습니다!”

머릿속으로 아직은 머나먼 꿈만 같은 노후 생활을 그리던 도중 직원 하나가 노크도 없이 쇤 장관의 집무실로 들이닥쳤다.

어지간히도 급한 일인지 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고 온몸은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덕분에 평화롭게 커피를 즐기던 쇤 장관은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내뱉었기에 옆에서 서류 정리를 하고 있던 내가 대신 입을 열었다.

“일단 진정하세요. 그러다 숨넘어가겠습니다.”

“헉……헉……. 죄, 죄송합니다. 워낙 급작스러운 일이라.”

“쿨럭쿨럭! 크흠…….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리 호들갑인가?”

쇤 장관이 살짝 불쾌한 얼굴로 묻자 숨을 고른 직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스만, 오스만 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뭐?!”

“주오스만 독일 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청년 장교들과 오스만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해서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고…….”

청년 튀르크 혁명(Young Turk Revolution).

연합진보위원회(CUP, Committee of Union and Progress), 흔히 청년 튀르크당으로 알려진 오스만 제국의 젊은 장교들이 붉은 술탄 압뒬하미트 2세를 몰아내기 위해 일어났다.

전 세계에 급진적인 청년 저항 운동을 뜻하는 영턱스(Young turks)란 단어를 유행시킬 정도로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었던 만큼 나 또한 잘 알고 있는 사건이었지만 속으론 의문이 들었다.

내가 알기론 청년 튀르크 혁명은 원래 영러협상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이 흔들린 것으로 촉발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합진보위원회 자체는 이미 1906년에 탄생한 지 오래였고 그들의 목적 자체가 폭군인 압뒬하미트 2세를 몰아내고 오스만 제국을 개혁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혁명이 터진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반대로 독영협상에 영향을 받아서 일어난 것일 수도.’

원인이야 어쨌든 결과는 바뀌지 않았기에 내가 해야 할 일도 달라지지 않았다.

“장관님, 우리는 여기에 끼어들면 안 됩니다.”

“음? 남작 자네는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가 성공할 것이라고 보는가?”

쇤 장관의 의문 섞인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압뒬하미트 2세의 능력으론 군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청년 장교들의 반란을 절대 막지 못한다. 실제로도 그랬고.

“하긴 오스만 제국의 현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지. 비버슈타인(Adolf Hermann Freiherr Marschall von Bieberstein) 주오스만 대사에게 연락해서 오스만 제국 내 군사고문단과 독일 외교관에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중립을 지키라고 해야겠어.”

쇤 장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쿠데타 세력이 정권을 잡을지라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독일 제국의 스탠스를 바꿀 필요는 없다.

오히려 어디까지나 ‘지금까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제1차 세계대전 때라면 모를까 지금 오스만 제국이 우리 독영협상에 숟가락을 올려 러시아와 친러 성향의 발칸 국가들로부터 지나가 버린 옛 영광이라도 되찾으려고 한다면 나로선 무척이나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청년 튀르크 혁명 때문에 일어날 일이 일이니.’

오히려 내겐 청년 튀르크 혁명보다 오히려 그 ‘사건’이 문제였다.

잘못하면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 반도의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 * *

“이제 다 끝났습니다, 술탄이시여. 이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여기에 서명하시는 것뿐입니다.”

“이 반역자 놈들이……!”

퉁구스카 폭발로 호사가들이 수다를 떨고 런던 올림픽이 한창인 1908년 7월 24일.

압뒬하미트 2세의 진압 시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연합진보위원회 지도부와 함께 콘스탄티니예에 입성한 이스마일 엔베르는 왕좌에 앉아있는 압뒬하미트 2세를 향해 빈정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한때 두려움의 상징이었던 붉은 술탄은 엔베르의 무례에 분을 참지 못하고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미 수도 콘스탄티니예가 쿠데타군에게 넘어간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압뒬하미트 2세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어 올렸다.

이들이 지금 원하는 것은 탄지마트 시기 탄생한 오스만 제국 최초의 헌법이자 자신이 1878년에 의회를 해산하고 전제 정치를 부활시켰을 때 같이 정지시킨 1876년 헌법을 복원하겠다는 제국령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소위 ‘젊은 튀르크’들이 원하는 것이 그것뿐일 리가 없다.

이들은 언젠가 자신을 폐위시키고 오스만 제국을 온전히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너희들의 뜻대로 돌아가리라는 것은 오산이다. 아직 나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남아 있다. 그들이 너희 반란군을 몰아내고 다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리라!’

압뒬하미트 2세는 제국령에 서명하면서도 그리 속으로 되뇌며 분노를 불태웠다.

실제로 청년 튀르크당이 압뒬하미트 2세의 절대 통치를 종식한 이후에도 3월 31일 사건(31 March Incident) 같은 이슬람주의자들과 절대왕정 지지자들에 의한 반혁명 시도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실제로 1909년 4월, 압뒬하미트 2세를 지지하는 보수파는 기어코 청년 튀르크당을 콘스탄티니예에서 몰아내고 일시적으로 정권을 되찾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콘스탄티니예를 되찾았을 뿐, 나머지 지방과 군대는 여전히 청년 튀르크당이 장악하고 있었고 결국 압뒬하미트 2세의 마지막 반격은 그가 퇴위당하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흠, 되었군.”

자신의 운명을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는 압뒬하미트 2세가 헛된 희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복수를 다짐하며 서명을 마치자 이스마일 엔베르는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폭군의 시대가 끝났다.

이제 오스만 제국은 이스마일 엔베르 자신을 비롯한 연합진보위원회가 이끌어 나가며 과거 전 유럽을 벌벌 떨게 했던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다시금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품은 것은 비단 이스마일 엔베르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청년 튀르크들도 자신들이 오스만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더욱 위대하게 만들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아직 기뻐하기엔 이르오, 형제들.”

모두가 술탄에게 거둔 승리로 기뻐하고 있을 때, 연합진보위원회의 지도자 중 하나이자 청년 튀르크 혁명을 주도한 아흐메드 니야지 베이(Ahmed Niyazi Bey)가 말했다.

“아직 혁명은 끝나지 않았소.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지.”

청년 튀르크 혁명이 엘리트 장교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일어난 것인 만큼 아직 자신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태였고 무엇보다 압뒬하미트 2세를 따르는 이슬람주의자 같은 보수 세력들이 남아 있었다.

대중의 지지를 얻고 이들을 쓸어버려 오스만 제국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는 한, 혁명은 끝났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혁명에 대한 독일과 영국의 반응은 어떤가.”

“일단은 양국 다 쿠데타를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넌지시 지금 이상의 관계를 맺는 것은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꺼내니 둘 다 말을 빙빙 돌려 가며 거절하더군요. 독일이나 영국이나 사실상 ‘지금까지의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고 봐야겠지요.”

“쯧, 지금까지의 관계라.”

이스마일 엔베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혀를 찼다.

사실 한스가 짐작했던 것처럼 청년 튀르크당은 정말로 독일 제국, 그리고 영국의 지지를 받아 독영협상과 대립하고 있는 러시아와 그런 러시아의 영향 아래 있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 국가들로부터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싶어 했다.

청년 튀르크당 내에서 친독 성향과 친영 성향을 지닌 이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도 그렇고 영국도 그렇고 오스만 제국과는 그냥 우호적인 관계로 남고 싶어 했다.

잘못했다간 러시아가 꿈틀거리는 것은 물론 물론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 반도에 불을 붙이는 꼴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이스마일 엔베르는 아직은 자신들의 입지가 불안하니까 독일 제국과 영국도 아직 자신들과 손잡을 생각이 없을 뿐이라 생각했다.

자신들이 오스만 제국을 완전히 장악하고 위치를 공고히 하면 분명 독일과 영국도 생각이 바뀔 것이다.

이스마일 엔베르는 그리 믿어 의심치 않으며 동료들과 함께 술탄의 궁전을 나섰다.

새로운 시대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측의 제안은 잘 받았습니다.”

청년 튀르크 혁명으로 오스만 제국이 어수선한 사이.

오스만의 혼란을 틈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모라바의 부흘라흐(Buchlau) 성에선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니콜라이 2세 폐하께서는 귀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시기로 했습니다.”

“오오, 그것이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우리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을 인정하겠습니다. 그 대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약속을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러시아 제국 외무장관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이즈볼스키(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Изво́льский)의 말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무장관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Alois Lexa von Aehrenthal)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보스니아 위기(Bosnian Crisis).

한스가 청년 튀르크 혁명보다 더 우려하던 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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