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만국평화회의 (2)
의친왕 이강(李堈).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이자 형들의 요절로 인해 사실상 차남이었던 인물.
또한 원 역사에서 국권피탈 이후 조선 왕족 대부분이 일본에 머리를 숙인 채 그들이 던져 주는 콩고물에 만족하며 살 때 일제에 저항하고 독립운동에도 가담했던 몇 안 되는 왕족 중 하나이다.
‘그런데 의친왕이 왜 여기 있냐고!’
미국으로 간 이상설이 의친왕과 안면은 물론 친분이 있는 것까진 이해가 간다.
의친왕은 1899년에 미국 유학을 떠나 버지니아주에 있는 로어노크 칼리지(Roanoke College)에서 수학했으니까.
그러나 의친왕은 원 역사에서 2년 전인 1905년에 조선으로 귀국했기 때문에 지금 그가 이곳 헤이그에 나타난 것은 말이 안 되었다.
아무래도 역사가 틀어지면서 또 무언가가 바뀐 모양이다.
“표정이 묘한 것을 보니,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군.”
“예. 전 전하께서 진작 조선으로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나도 그럴 생각이었지. 그러나 아바마마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내가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기지 않더군. 게다가 지금 나라 돌아가는 꼴도 마음에 안 들고. 그래서 그냥 미국에 눌러앉기로 했다네.”
의친왕의 넋두리에 내 머릿속에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이 떠올랐다.
일단 고종이 의친왕이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이었다.
왜냐하면, 1902년에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재일 유학생들이 고종을 몰아내고 의친왕을 황제로 추대하려고 한 일심회 사건(一心會事件)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사건의 주동자들과는 안면도 없었을뿐더러 사건이 일어난 일본과는 전혀 관계없는 미국에 있었던 의친왕은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지만, 아버지 고종의 의심을 사기엔 충분했다.
권력이란 것은 원래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못하는 것이고, 극단적인 사례이긴 했지만.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처박은 것처럼 효를 중시하는 조선조차 그 부분에선 예외가 아니었으니까.
결국, 고종은 일심회 사건 이후 의친왕을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1905년 3월 의친왕이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 경유지인 도쿄에 도착했을 때 귀국을 불허하고 다시 의친왕에게 미국으로 돌아가라 명령했다.
그러나 의친왕은 귀국을 포기하지 않았고, 같은 해 8월에 다시 도쿄로 오지만 이번엔 명성황후 사후,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황후나 마찬가지였던 황귀비 엄씨가 돈까지 쥐여 주며 조선으로 돌아오지 말고 미국에서 살라며 의친왕의 귀국을 방해했다.
황귀비 엄씨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李垠)의 친모였고, 순종 다음으로 계승권이 높았던 의친왕의 귀국은 제 아들을 차기 황제로 만들려던 엄씨의 야심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의친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조선으로 돌아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 역사의 이야기.
아무래도 이 세계의 의친왕은 식민지화는 피했더라도 일본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대한제국과 이에 저항할 생각도 하지 않는 아버지와 황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장 나 또한 포츠모스 조약 이후 민심이 고종과 황실을 완전히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였으니까.
덕분에 의친왕은 아직도 미국에 남아 있었고, 그 결과 이곳 헤이그에서의 만남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고향이 그립진 않으십니까?”
“그립기는 그립지만, 미국 생활도 나쁘지 않으니 걱정할 것 없네. 조선은 뭐랄까 갑갑한 나라 아닌가? 그에 비해선 미국은 너무나도 자유로워서 나와 잘 어울리더군. 그리고 그 무엇보다 미국엔 풍만한 미인들이 많다네. 하하하하!”
“전하!”
의친왕이 그리 농담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이상설이 제발 체통 좀 지켜 달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안중근은 이런 의친왕의 모습이 이미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나도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의친왕은 원래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탕아이자 풍류가로 유명한 인물이었으니까.
실제로 의친왕은 자동차 드라이브를 즐기며 지나가는 미인들을 감상하는 것을 즐겼고, 파티장에선 흥을 돋우기 위해 권총으로 샹들리에 등불을 쏘아 맞히며 논 사람이었다.
물론, 이런 방탕한 모습이 사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연기였다는 설도 존재했지만.
하지만 위의 사례나 미국 유학 시절에 사랑에 빠져서 이 여자를 위해서라면 황족이고 황위도 다 포기하겠다고 해 모두를 경악하게 한 것,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처첩을 두며 사생아들을 잔뜩 남긴 것을 보면 그냥 기질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선 아버지 고종보단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더 닮았다고 할 수 있겠네.’
흥선대원군도 야사에 따르면 안동 김씨의 눈을 속이기 위해 천하장안 같은 건달들과 어울리며 상갓집 개라 불릴 정도로 파락호처럼 지냈다니까.
이런 게 바로 격세유전이란 것일까?
“그나저나 저를 만나고 싶어 하셨다고요?”
“꼬마 남작의 이름은 미국에 있는 한인들에게도 자자하니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이젠 꼬마 남작이라 부르면 안 되겠군. 이젠 꼬마라고 하기엔 너무 자네가 자라도 너무 자랐으니.”
하긴 내 나이가 벌써 만15세다.
내년이면 고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였고, 키도 훌쩍 자라 170cm가 넘은 만큼 꼬마 남작이란 별명은 어울리는 시기는 지났다.
“그리고 여기 도산은 온 김에 같이 데려온 것이라네. 미국에서 지낼 때 피차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라 같이 어울리다 보니 친해졌거든. 이참에 유럽 구경이나 시켜 줄까 싶었지.”
“……전하, 그렇게 말하면 제가 그냥 헤이그에 놀러 온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아닌가?”
“절대로 아닙니다. 전 어디까지나 남작님의 얼굴을 뵐 겸, 이번 만국평화회의를 통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배울 좋은 기회라 여겨 헤이그에 온 것뿐입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이전부터 국제법으로 이름 높은 나라니까요.”
안창호가 성실해 보이는 인상답게 성실한 목소리로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물론, 범생이 같은 성격이랑은 거리가 먼 의친왕은 안창호의 대답이 재미없었는지 입을 삐죽였지만.
생각보다 재미있는 조합에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린 나는 안창호를 향해 말했다.
“시간 때우기에 친구와의 토론만큼이나 좋은 것은 없는 법이죠.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동안은 헤이그에 있을 예정이라 시간은 많으니, 원하시는 만큼 어울려 드리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 그러고 보니 소식을 들은 지 오래되었는데, 자유정부는 잘 돌아가고 있습니까?”
“예. 요즘은 연해주, 미국의 한인 조직들과 관계를 굳건히 하고 반석을 다지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민영환과 이용익은 내 도움을 통해 키아우초우를 근거지로 대한자유정부를 세워 조국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나 또한 직접적으론 아니지만, 은퇴한 독일군 장교나 부사관들을 교관으로서 소개해 주는 등 작게나마 자유정부를 뒤에서 은밀히 도와주었고.
‘지금은 이 정도 거리감이 적당해.’
아무래도 내가 자유정부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불필요한 관심을 물론 외교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독일 제국의 관료이자 카이저의 신하인 이상 자유정부 내에서도 말이 나올 수도 있고.
게다가 어차피 자유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나 중요성이 높아진다,
영일동맹이 아직 존속되고 있는 이상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이 독영협상 편으로 참전할 확률이 높으니까.
‘물론 여전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본이 뇌절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어쩌면 원 역사보다 더 심해질지도 모르는 것이 일본이 우리 아군이 되면 세계대전에서 아시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나 러일전쟁 때와 달리 빈집이나 마찬가지인 극동 러시아를 공격해서 그 일부라도 집어삼킬 확률이 너무나도 차고도 넘쳤다.
원 역사에서도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키아우초우를 포함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독일 식민지를 점령한 뒤 자신들의 전리품으로 챙겨 갔으니까.
전후 나리킨(成金)이란 벼락부자들을 양산했을 정도로 제1차 세계대전 특수를 통해 일본이 황금기를 누렸던 것을 생각해 보면 재기에 성공하는 것은 물론, 일본이 원 역사보다 강해져 더 골치 아프게 굴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나도 지금부터 미리미리 자유정부 같은 극동에서 써먹을 패를 쟁여 두는 것이고.
‘아무래도 일본의 세계대전 참전을 막는 건 좀 그러니까.’
우리도 당장 세계대전에서 이기는 급선무라 이건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세계대전이 벌어질 시 프랑스나 러시아와 달리 독일 제국이 극동에서 운용할 수 있는 유의미한 전력이라곤 동양함대 하나뿐이니까.
“그 때문에 나도 요즘 고민이 많다네.”
내가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의친왕이 한숨 쉬며 말했다.
“고민 말씀이십니까?”
“그것이 계정(민영환) 대감과 석현(이용익) 대감이 나보고 황제가 되라고 아우성이지 뭔가.”
“……예?”
황제? 고종이 멀쩡히 있는 상황에?
“지금 반정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겁니까?”
“왜놈들이 조정을 장악한 지가 몇 해인데 반정은 무슨. 그냥 대한의 정당한 황제를 자칭하라는 거네. 두 대감이 날 일본과 일본의 꼭두각시인 현 황실에 맞선 구심점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인가 봐.”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민영환과 이용익이 의친왕을 대립 황제로 만들려고 한다는 소리였다.
음, 혹시 지금이 20세기가 아니라 고대 로마나 중세시대였나?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라는 것은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내 표정을 읽은 듯 이상설이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현 조선 민중들에게 의회니, 민주주의니 하는 별세상 이야기보다 이런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가 더 와닿을 것이란 것도 사실입니다.”
“그건 확실히 그렇습니다만…….”
당장 이 유럽에서조차 공화제보단 군주정이 절대다수였던 시절이다.
민주주의란 것을 잘 알지도 못하는 조선인들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할 리가 없다.
게다가 고종의 인기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의친왕을 황제로 추대하면, 민중의 지지가 확실히 이쪽을 향하긴 할 것이다.
이미 앞서 언급했던 일심회 사건이란 전례도 있었고, 임시정부도 황제로 추대하려는 건 아니었더라도 선전 목적으로 의친왕을 임시정부로 탈출시키려고 시도했으니까.
‘게다가 이용익은 둘째 치더라도 민영환은 고종에게 민권을 신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로(받아들여지진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입헌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니.’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의 생각이 대립 황제 쪽으로 향한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었다.
무능한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세우자는 논리는 그 태생부터가 역성혁명을 통해 탄생한 조선에선 이미 익숙한 개념이었다.
“솔직히 나로선 기꺼운 소리는 아니네.”
하지만 의친왕은 자신을 황제로 세운다는 민영환과 이용익의 생각에 상당히 부정적인 모양이었다.
미국 유학의 영향 때문인지 원 역사에서도 황위나 복벽운동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니까.
“어떻게 변명하든 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책임은 우리 이씨에게 있다네. 그런데 과연 내게 대한의 새로운 황제를 자칭할 자격이 있겠나?”
“전하, 그 무슨 참담한 말씀이십니까.”
“보재(이상설의 호), 애초에 난 황제에 어울리지도 않는 인간이야. 그냥 하루하루 노는 게 제일 좋은 파락호지. 나보단 차라리 여기 있는 한수 동생이 황제 노릇을 더 잘할걸세.”
“크흠! 전하, 농담이 너무 심하십니다.”
내가 무슨 위안스카이처럼 황제병자도 아니고 참.
어쨌든 나는 의친왕의 질 나쁜 농담에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한마디 드리자면 이 문제에 대해 너무 부담 갖지 마시죠. 미래는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전하께서 무슨 선택을 할지 모르지만, 무슨 길을 가든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말이라도 고맙구만.”
내 말에 의친왕은 조금은 답답한 마음이 가신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미래의 한국이 어떤 모습이 될진 모르지만, 입헌군주제로 가든 공화국으로 가든 그것은 내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내 뿌리가 어찌 되었든, 나는 결국 독일 제국에 뼈를 묻어야 하는 부외자니까.
나로선 그저 옛 고향과 의친왕, 이상설을 비롯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이들이 원 역사보다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하기를 바랄 뿐이다.
* * *
“그럼, 우리는 이만 돌아가 보겠네.”
“예, 아무쪼록 건강히 지내십시오.”
며칠 후, 의친왕은 조금은 생각이 정리된 표정으로 이상설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아직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그래도 자신의 이름값은 쓸모가 있으니 조국의 자유를 위해 최대한 써먹겠다나?
다만, 안창호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동안 계속 헤이그에 남아 있었다.
그는 애초에 날 만날 겸 공부를 할 목적으로 헤이그에 온 것이니.
나도 덕분에 지루한 회의 속에서도 안창호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하루를 꽤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1907년 10월 18일
44개국 대표들이 회담의 결과에 따른 법안에 서명하면서 만국평화회의가 종료되었다.
법안은 러일전쟁 때 일본에 당한 기습공격을 잊지 않았던 러시아가 주장한 선전포고에 대한 협약을 비롯해 총 13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3년 후인 1910년 1월 26일에 실효될 예정이었다.
참고로 영국이 주장한 군비 제한은 결국 모두의 예상대로 기각되었다.
원인은 모두의 예상대로 프랑스의 극렬한 반대 때문이었다.
영국엔 미안하지만, 솔직히 우리 독일이나 다른 나라들로서도 군비 제한은 그다지 마음에 와닿는 주장은 아니었다.
“그럼, 저도 이만 미국으로 돌아가 봐야겠군요.”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안창호 씨. 부디 바다 건너에서도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만국평화회의가 끝나자 더는 헤이그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던 나는 마찬가지로 헤이그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는 안창호와 작별을 하고 독일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그러나 독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은 무거웠다.
원인은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신문 기사 때문이었다.
[무너지는 유나이티드 구리 회사, 월스트리트에서 뱅크런이 발생하다!]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공황이라 불리었던 세계적인 금융 위기.
1907년 공황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