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18화 (118/193)

118화 : 트랙터 프로젝트 (2)

“루덴도르프 중령님, 전차 주포 구경의 최소 기준에 대해 군부에서 상정하고 있는 바가 있습니까?”

“참모본부에선 충분한 위력을 내려면 적어도 30mm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자동차면 모를까 대포 같은 화기에 대해선 문외한인데, 이 부분에 대해선 따로 기술 지원이 있습니까?”

“예. 크루프 사를 비롯한 군수 회사들이 여러분께 필요한 모든 도움을 제공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부분에 대해선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음, 남작님. 전차에 주포 탑을 꼭 하나만 달아야 하는 겁니까? 전차를 더 크게 만들어서 여러 개를 달면 더 강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전차 위에 백화점을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그리 추천하고 싶지는 않군요. 전 비용과 무게, 명중률 등을 따져 봤을 때 웬만하면 전차 하나에 주포 하나, 그리고 보조 무장으로 기관총 2, 3정 정도가 가장 적절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엔진을 차체 전면이 아닌 후방에 부착하자는 건…….”

다들 오랜만에 자동차 개발자의 혼이 불타오르는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질문에 나와 루덴도르프의 진땀을 흘릴 시간도 없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원래라면 쉴 새 없이 손을 드는 엔지니어들의 질문 세례는 루덴도르프에게 맡기고, 나는 뒤에서 커피나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 영감님들처럼 구경만 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세계 최초의 전차를 어떻게 만들지 방향성을 잡는 중요한 과정인 만큼 내가 빠질 수는 없었다.

이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우리가 아는 전차가 탄생하기까지 온갖 삽질과 우여곡절이 이어졌던 원 역사가 다시 한번 반복될 뿐이니까.

내가 나서서 저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알려 주지 않으면 A7V 정도가 아니라 니키의 움직이는 성인 차르 전차나 누가 테트리스 원조 국가 아니랄까 봐 사각사각한 멘델레예프 전차 같은 괴작이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장 지금도 내 앞에서 다포탑 전차가 탄생할 뻔하지 않았나.

물,론 나 개인적으론 T-29이나 T-35 같은 다포탑 전차의 디자인은 좋아하지만, 그게 그래서 좋은 전차였냐고 물으면 도저히 할 말이 없다.

‘그러고 보니 든 예시들이 죄다 러시아-소련 전차들이네,’

물론, 독일도 마우스 같은 걸 만든 전적이 있어 러시아 보고 뭐라 할 자격은 없지만, 그건 솔직히 괴작이라기보단 야마토급 전함처럼 스펙은 최강인데 정작 실전에서 활약은커녕 아무것도 못 해 보고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 것에 가까웠으니 좀 다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남작님, 혹시 다른 회사와 협력해서 전차를 개발해도 됩니까?”

내가 잠시 딴생각에 잠긴 사이 누군가가 나를 향해 그리 질문했다.

저 사람의 이름이 분명 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였던가?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롤스로이스, 벤틀리와 함께 3대 명차로 유명한 마이바흐의 설립자다.

다만, 마이바흐가 마이바흐사를 세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훗날의 일이고, 지금은 다임러사의 기술이사직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마이바흐는 옆에 앉아있는 벤츠사의 설립자이자 현재는 경영에서 물러나 이사직에 머무르고 있던 카를 벤츠(Karl Friedrich Benz)와 속닥거리며 은밀한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아무래도 벤츠사와 힘을 합쳐볼 생각인 것 같다.

‘다임러와 벤츠라. 유명한 조합이네.’

왜냐하면 그 유명한 메르세데스-벤츠가 다름 아닌 다임러와 벤츠의 합병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1926년에 제1차 세계대전 패전의 여파를 이기지 못한 다임러와 벤츠가 경영 악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퓨전한 결과 다임러-벤츠 AG가 탄생했고, 그 산하 자동차 브랜드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메르세데스-벤츠였으니까.

“네. 협력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저희로선 어디 까지나 결과만 좋으면 되니까요.”

물론, 양사가 이익을 나눠 가져야겠지만, 솔직히 그건 내 알 바 아니었다.

나야 전차만 잘 만들면 장땡이니까.

‘근데 미래의 일은 제쳐 두고라도 마이바흐가 벤츠와 협력하려는 걸 과연 다임러가 받아들이려나?’

내가 알기론 현재 마이바흐는 다임러 경영진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괜히 그가 내년에 다임러를 나가 마이바흐사를 설립하는 게 아니다.

카를 벤츠를 비롯한 벤츠 관계자들 또한 그 사실을 아는지 마이바흐의 협력 제안에 흥미를 보이면서도 그리 큰 기대는 품지 않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벤츠로선 다임러와 협력해도 이득이고, 혼자 전차 개발에 나서도 딱히 상관없을 테니까.

왜냐하면, 벤츠는 현재 독일 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자동차 회사이자 기술력 면에서도 전 세계 자동차 회사 중 가장 손꼽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벤츠는 세계 최초로 내연 기관 자동차를 만들었고, 세계 최초로 자동차 장거리 운행에 성공했으며 1894년에 제작된 벤츠 펠로(Benz Velo)는 세계 최초로 대량 생산된 자동차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나 또한 벤츠를 이 경합에서 승리할 가장 유력한 후보로 보고 있다.

마이바흐도 이 때문에 벤츠에 접근한 것일 테고.

실제로 원 역사에서도 다임러-벤츠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3호 전차를 비롯해 나치 독일의 주력 전차 생산을 담당한 군수 기업이었으며 위에서 언급한 마우스도 벤츠에서 개발했다.

물론, 이 때문에 벤츠는 나치 독일에 군수품을 납품하고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다는 죄목으로 전범 기업 리스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지.

“시간이 예정보다 길어졌으니, 질문은 여기까지 받는 거로 하겠습니다. 이후에 궁금하신 점이 있으면 여기 있는 루덴도르프 중령에게 문의하시면 됩니다.”

내가 루덴도르프를 가리키자 사람들이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전차는 미래 독일 육군의 핵심 병기이고, 이에 걸맞게 양산을 위한 지금 이상의 대량생산 체제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는 전차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미래를 생각하면 군에서 트럭이나 장갑차 등 자동차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고, 또 그래야 하니까.

“이는 지금보다 자동차 산업이 더욱 발전을 이루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위해 자동차가 상류층의 전유물에 벗어나 일반 시민들 또한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을 내리고 많이,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 하지만 현재 자동차의 제작 비용이라든지 인건비, 생산 환경 등을 생각하면 그건 무리가 아닐까요?”

내 말을 경청하고 있던 마이바흐가 손을 들고 질문했다.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한 답을 이미 준비한 상태였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컨베이어 벨트?”

“그러고 보니 남작이 보유한 DRR이 컨베이어 벨트란 것으로 얼마 안 되는 시간에 라디오를 대량으로 찍어 내 전 세계에 공급했다는데…….”

“네, 그 말대로입니다. 지금까지 자동차는 소규모 팀 단위로 며칠에 걸쳐 제작되는 물건이었지만,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하면 생산 속도가 극적으로 향상될 것입니다. 계산상 한 시간에 1대, 수십 초당 1대의 자동차를 생산이 가능할 정도로요.”

“수, 수십 초?!”

이름 모를 누군가가 경악한 얼굴로 그리 외쳤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그와 딱히 다르진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대량생산에 미친 포드는 1914년에 포드 모델 T를 24초당 1대씩 뽑아내었으니,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미 라디오로 컨베이어 벨트의 효용성은 증명되었습니다. 실제로 DRR은 컨베이어 벨트의 도입으로 인건비와 생산비를 크게 줄이고, 생산 속도를 크게 향상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원하신다면 나중에 통계 자료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남작님의 말을 못 믿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워낙 말도 안 되는 생산 속도라 그게 정말 컨베이어 벨트만 있다고 되는 건지…….”

“물론 그건 아닙니다. 여기엔 제품의 규격화, 단일화, 그리고 부품의 최소화 등이 선행되어야 하니까요.”

“흐음…….”

“하지만 대량생산은 이미 시대의 부름입니다. 이미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은 컨베이어 벨트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자동차를 대량으로 뽑아내며 시장을 선점하기 전에 자동차 산업의 선구자인 우리 독일이 먼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미 경제, 산업부문에서 유럽을 뛰어넘기 시작한 미국을 거론하자 사람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독일은 자동차 산업의 첫걸음을 떼고, 그 기반을 다진 나라.

그렇기에 다들 자부심 넘치는 독일인으로서 후발주자에 불과한 양키들에게 뒤처지긴 싫은 모양이다.

물론, 미국에서도 컨베이어 벨트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지금으로선 아마도 포드 정도이겠지만, 딱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니까 괜찮다.

“생산 속도와 인건비를 생각하면 시범적으로 도입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군.”

“확실히 지금보다 시장이 커지면 우리의 이익도 커지니까.”

내 말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게 들렸는지 상당수의 자동차 회사 관계자들이 그리 중얼거리며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중엔 카를 벤츠와 마이바흐도 있었다.

“짧게 말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길어졌네요. 그럼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다들 이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각 기업 관계자들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아무래도 최대한 빨리 본사로 돌아가 임원, 그리고 기술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생각에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후, 드디어 끝났군.”

“나도 이만 가 보지. 자연주의자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남작, 자네도 관심이 있으면 우리 회합에 참여해 보게.”

“하.하.하. 마음만 받겠습니다. 몰트케 총장님.”

나는 자연스럽게 나를 나체주의 모임에 끌어들이려는 몰트케를 향해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거기에 가느니 차라리 내 발로 사관 학교에 들어가고 말겠다.

“그럼, 저도 영국 대사와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루덴도르프 중령님, 보안에 최대한 신경 쓰는 거 잊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시지요. 육군 정보부는 물론 프로이센 비밀경찰과도 협력하고 있습니다. 기밀이 새어 나갈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과연, 세계 최초의 전차가 어떤 모습일지 기대를 품으며.

* * *

아쉬운 이별과 새로운 만남이 교차했던 1906년이 끝나고 1907년이 찾아왔다.

그리고 유럽은 언제나의 유럽이었다.

영국 런던에선 여성 참정권자들이 진흙 행진을 하고 루마니아에선 중세 시대 마냥 농민 반란이 일어나 11,000여 명이 사망했으며 불가리아에선 무정부주의 시즌이 돌아와 불가리아 총리가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 일론 벨 에포크란 평화와 낭만의 시대를 깨트리긴 어려웠다.

유럽인들은 러일전쟁 당시 모로코 위기로 전쟁이 일어날 뻔한 것은 이미 머릿속에 지웠다는 듯 언제나처럼 평화를 찬양했다.

물론, 유럽이 조용하다고 내 일상까지 조용한 것은 아니었다.

외무청 업무 말고도 내가 신경 써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우선, 트랙터 프로젝트는 성황리에 진행 중이었다.

결국, 이야기가 잘 안 됐는지 벤츠와 다임러가 이십 년 빨리 힘을 합치진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들은 각자 총력을 기울여 전차 개발에 매진했다.

물론, 시제품이 나오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또한, 벤츠와 다임러를 비롯한 일부 자동차 회사에서 시범적으로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상당한 효과를 보았고, 독일 자동차 회사들은 이참에 유럽 자동차 시장을 다 먹어 버리겠다는 것인지 대량 생산 경쟁에 돌입했다.

덕분에 요즘 신문들은 자동차 가격이 곧 크게 내려갈 것이며 곧 가정 당 자동차 한 대를 보유할 수 있을 거라 호들갑을 떨며 시민들의 기대감을 부풀렸다.

‘그러고 보니 자동차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나중에 아우토반도 만들어야지.’

내가 알기론 카를 벤츠도 이미 이 시기에 아우토반의 건설을 제안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이건 급한 건 아니었으니 나중으로 밀어두기로 하자.

“그럼, 오늘 회의는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지. 아, 한스 군. 네덜란드에 갈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나?”

“물론입니다. 우리 외무청에 있어 올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회담이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죠.”

내 말에 임기가 몇 달 남지 않은 치르슈키 장관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6월엔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도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원 역사에서 고종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 이준을 밀사로 보낸 그 회의 맞다.

물론, 현재 이상설은 미국에 있고, 일본은 아직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진 않았기에 헤이그 특사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은 제로였으니, 그 문제에 대해선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어쨌든 만국평화회의는 전 세계에서 총 44개국이 참가할 예정이었고, 나는 치르슈키 외무장관의 추천으로 다른 외교관들과 함께 대표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물론, 전쟁을 준비하는 내가 평화를 논하는 회의에 가서 할 게 있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원래 이런 자리에 참석하고, 이름도 올리고 해야 내 명성도 올라가고 그런 것이다.

그렇게 1907년 6월, 나는 나름의 기대를 품고 헤이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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