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16화 (116/193)

116화 : 베니젤로스

“아테네에 온 것을 환영하네. 남작!”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왕세자 전하.”

1906년 4월, 나는 독일 제국 외교 사절단과 함께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의 성대한 환영 속에서 아테네에 발을 디뎠다.

올림픽은 그리스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행사였고, 이번 중간 올림픽은 제1회 아테네 올림픽 10주년을 기념하는 올림픽이었던 만큼 개회식이 열리기 며칠 전부터 아테네는 이미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이리 올림픽에서 그대의 얼굴을 보게 되니 기쁘군. 부디 올림픽이 진행되는 열흘 동안 즐겁게 지내길 바라네.”

“예.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 독일 선수들이 좋은 성과를 거뒀으면 좋겠군요.”

“하하, 우리 그리스 선수들도 만만치 않을걸세.”

아테네 중간 올림픽에는 독일과 그리스를 포함한 20개 국가에서 온 854명의 선수가 참가한다.

그만큼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는 만큼 독일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 금메달을 딸지는 모르겠지만,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올림픽은 파리와 세인트루이스의 추태를 만회하기 위해 여러모로 혁신을 시도했다네. 물론 자네의 도움을 받은 라디오 중계도 그중 하나이지.”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의 말처럼 이번 중간 올림픽은 미래 올림픽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 최초로 등장한 올림픽으로 올림픽 선수촌이 이때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메달 수여식 때 국기를 게양하는 것도 중간 올림픽이 최초다.

특히 올림픽 개회식 하면 떠오르는 선수들이 자국 국기를 따라 행진하며 경기장에 입성하는 퍼포먼스도 아테네 중간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괜히 아테네 중간 올림픽이 올림픽 역사에 있어 제1회 아테네 올림픽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행사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다.

“전하, 올림픽 위원회와의 회의에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음?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자네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니까.”

“하하, 동감입니다.”

“아, 그리고 아버지를 알현하는 것은 내일로 미루세나. 이제 막 아테네에 막 도착한 참 아닌가.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나, 그리고 소피아와 함께 부왕 폐하를 보러 가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그리스까지 오느라 피곤했는데 잘됐다.

나는 함께 온 외교관들에게도 오늘은 푹 쉬라고 말한 뒤, 호텔로 돌아갔다.

“한스 폰 초이 남작님?”

그러나 내가 호텔로 들어가려고 하는 찰나, 한 남자가 나를 향해 말을 걸었다.

머리가 슬슬 빗겨지기 시작해 미래에 훌륭한 반짝이가 될 것 같은 남자는 그리스인으로 보였는데, 분명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누구시죠?”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전 크레타 자치국의 정치인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라고 합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남자가 자신을 그리 소개하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인제야 그가 누군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엘레프테리오스 키리아쿠 베니젤로스(Ελευθέριος Κυριάκου Βενιζέλος).

훗날 그리스의 총리로 개혁을 통해 그리스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키고, 두 차례에 걸친 발칸전쟁에서 승리해 영토를 크게 늘린 현대 그리스의 국부라 추앙받는 인물이다.

‘처음에 금방 몰라본 것도 당연하네.’

전생 시절 보았던 베니젤로스의 사진은 머리가 완전히 빗겨진 켄터키 치킨집 할아버지 같은 노년의 모습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직 머리숱이 남아 있었던 데다가 머리카락과 수염도 하얗게 세지 않았던 젊은 베니젤로스를 내가 몰라본 것도 당연했다.

그나저나 여기서 베니젤로스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그가 말한 대로 그리스의 실효 지배를 받고 있긴 하지만, 명목상으론 아직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고향 크레타 자치국에서 활동하고 있었기에 아직 그리스 정계에 발을 들이진 않았다.

내가 알기론 그가 그리스 본토에서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 총리가 되는 1910년 이후였다.

‘아마 이 사람도 올림픽을 구경하러 아테네에 온 것이겠지.’

태평한 이유지만, 그렇다고 젊은 베니젤로스를 무시해선 안 된다.

그는 당장 작년에 테리소 반란을 주도해 열강들의 무력 개입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크레타를 장악하며 그와 대립하던 요르요스 1세의 차남이자 크레타 자치국의 최고 행정관, 요르요스 왕자를 행정관 자리에서 사임하게 만든 장본이었으니까.

크레타가 그리스 왕국과 통합되길 원했던 베니젤로스와 크레타인들과 달리 유럽 열강들은 그리스의 크레타 자치국 통합에 부정적이었는데, 요르요스 왕자가 이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요르요스 왕자가 무능한 데다가 측근들까지 부패해서 크레타인들의 지지를 잃은 것도 컸지.’

훗날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쟁이 동맹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음에도 중립을 지키던 친독파 콘스탄티노스 1세를 내쫓고 협상국 편으로 참전해 그리스를 승전국으로 만들었던 베니젤로스의 행보를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테리소 반란에서 보여 준 뛰어난 수완으로 베니젤로스는 이미 외교가에선 유명 인사였고, 나 또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과감하게 나서는 그의 행동력과 정치적 능력을 높이 사는 동시에 그를 경계했다.

앞서 말했듯이 베니젤로스는 원 역사에서 그리스가 중립을 걷어차고 협상국으로 참전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엔 그의 판단이 옳았다.

오스만이 동맹국으로 참전한 이상 협상국의 편을 드는 것이 그리스에는 이득이었을뿐더러 전쟁도 동맹국에 불리하게 돌아갔으니까.

하지만 이는 반대로 그리스에 이득이 된다면 독일 제국의 편을 들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게다가 지금은 원 역사와 달리 외교 상황도 달라졌으니까.

그리스가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아군으로 참전한다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발칸반도에서의 전쟁이 더 쉽게 풀릴 것이다.

‘적어도 오스트리아-헝가리보단 낫겠지.’

잊지 말자. 오헝은 불가리아가 참전할 때까지 세르비아 하나도 제대로 못 밀고 빌빌대던 얘들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독일과 동맹을 맺은 나라 중에 밥값은 할 것 같은 애들이 영국 말곤 없는 것일까.

이쯤 되면 삼국동맹이고 뭐고 그냥 협상국이라 자칭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남작님?”

“아, 실례했습니다. 베니젤로스 씨. 베니젤로스 씨의 이야기는 이미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예. 베니젤로스 씨가 크레타에서 보여 준 수완엔 저도 꽤 놀랐습니다. 이 기회에 깊은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고 싶군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베니젤로스는 웃음꽃을 터트리며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의 눈은 웃지 않은 채 과연 상대방이 나에게 이득이 될지를 가늠했다.

외교의 시간이었다.

* * *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자신의 눈앞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홀짝이는 그 유명한 카이저를 구한 소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다.

한스 폰 초이 남작은 그 누구도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은 독일과 영국의 동맹을 성사시킨 장본인이었으니까.

‘이미 외교가에선 암암리에 그를 ‘비스마르크의 후계자’라 부르고 있던가?’

대영제국과 독일 제국이라는 유럽 대륙을 주름잡는 열강들이 손을 잡은 만큼 그리스 왕국 또한 이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베니젤로스는 생각했다.

영국과 독일, 그리고 프랑스와 러시아로 양분된 작금의 유럽에서 발칸의 소국인 그리스 왕국은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일단, 세력의 균형추는 역시 독영협상 쪽에 쏠려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다만, 그리스가 독영협상과 친분을 쌓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국왕 요르요스 1세는 영국 알렉산드라 왕비의 남동생으로 에드워드 7세의 처남이었고, 콘스탄티노스 왕세자는 카이저의 매제였던 데다가 확고한 친독파였으니까.

하지만 베니젤로스는 영국은 몰라도 독일이 그리스보단 오스만 제국과의 우호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이런 독일의 외교방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까놓고 말해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과 비교하면 독일에 있어 그리 큰 가치가 있는 국가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무언가 콩고물이 떨어지는 것이 있어야 그리스도 확실히 입장을 정할 것 아닌가.

‘차라리 오스만 제국이 영독과 척졌으면 선택이 편했으련만.’

그렇기에 베니젤로스는 이번 중간 올림픽에 독일의 외교 사절로 한스 폰 초이 남작이 온다는 말에 그를 한번 만나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직책은 보좌관에 불과했지만, 그 영향력은 일개 보좌관을 넘어 사실상 현 독일 제국의 외교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만큼 그의 생각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마하니 아테네에서 아메리카노를 팔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선 남작님의 이름을 딴 ‘카페 초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립니다. 호불호는 갈리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더군요.”

호텔의 카페테리아에서 한스가 요즘 독일을 시작으로 유럽에 유행하기 시작한 카페 초이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베니젤로스가 넉살 좋은 얼굴로 대답했다.

다만, 싫어하는 사람은 끔찍이 싫어했다.

특히 이탈리아에선 카페 초이를 커피에 대한 모독으로 부르며 극렬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도 모자라 카페 초이 말고도 하와이안 피자,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 등을 이 세상에 탄생시킨 남작의 저주받을 미각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나저나 요즘 크레타는 어떻습니까?”

“아직 작년의 소란이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르요스 왕자는 크레타인의 지지를 잃은 것 같더군요. 당장은 버티고 있긴 하지만, 내년이면 집으로 돌아가야겠죠.”

“그리고 베니젤로스 씨는 크레타 자치국의 실권을 차지했고요.”

한스의 돌직구에도 불구하고 베니젤로스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정도는 놀랄 것도 없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전 그저 크레타가 그리스의 정당한 영토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개인적으론 독일을 포함한 열강들이 크레타가 다시 그리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만, 역시 쉽지 않더군요.”

“하하, 어차피 베니젤로스 씨는 열강이 반기지 않아도 크레타를 통합시킬 생각이시지 않습니까?”

“…….”

베니젤로스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벌써 거기까지 꿰뚫어 보다니, 역시 비스마르크의 후계자 다운 통찰이었다.

실제로 베니젤로스는 원 역사에서 2년 후인 1908년에 오스만과의 군사적 마찰을 걱정한 그리스 정부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청년 튀르크 혁명으로 오스만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일방적으로 크레타를 그리스 왕국에 통합시켰다.

“후, 아무래도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모양이니, 저도 더는 말을 돌리지 않겠습니다. 남작께서는 우리 그리스와의 우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시다시피 독일 제국은 오스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한스가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론 그리스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길 바랍니다. 전 그리스를 좋아하거든요. 누가 뭐라 해도 제2의 로마의 진정한 후계자 아닙니까.”

“오오, 그건 고마운 말씀이군요.”

베니젤로스는 한스의 말에 진심으로 감명받았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빈말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말해 주는 것 자체가 그리스인에겐 그 무엇보다 감사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베니젤로스 씨께서는 독일과의 우호가 과연 그리스에 어떤 이득이 될지 의문이시겠죠.”

“예. 아무래도 오스만 제국에 대한 양국의 견해가 다르니까요.”

“맞습니다. 그렇기에 독일 제국이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에서 그리스의 편을 들어드리진 못합니다. 하지만 발칸은 혼란스러운 땅. 그리스 말고도 오스만을 노리는 발칸 국가들은 많습니다.”

“호오?”

한스의 말에 베니젤로스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발칸반도에 대오스만 전쟁이 일어날 거라 보시는군요.”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오스만 제국이 하루하루 약해지는 상황에서 과연 그리스 못지않게 오스만에 원한이 깊은 세르비아나 불가리아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기회가 오는 순간 오스만을 공격할 게 뻔합니다.”

제1차 발칸전쟁이 그렇게 일어났다.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이 흔들리자 오스만을 팰 기회만 엿보던 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그리스가 발칸 동맹을 결성하여 오스만 제국을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발칸동맹은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마자 얼마 안 가 와해한다.

전리품 분배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가 그리스와 세르비아를 선제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거기다 루마니아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오스만까지 괘씸한 불가리아를 공격하면서 제2차 발칸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발칸반도의 익숙한 일상이다.

“마케도니아, 특히 테살로니키를 되찾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발칸 국가들이 집어삼키기 전에요.”

베니젤로스는 한스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베니젤로스로서도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독일이 전후 협상에서 은밀히 그리스를 지지해 주기만 해도 그리스 왕국에 큰 힘이 될 테니까.

‘게다가 독일로서도 어떤 식으로든 독일의 제일 중요한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부딪힐 수밖에 없는 세르비아를 견제할 수 있겠지.’

독일로서도 손해 볼 것은 없었고, 그리스로서도 독일 편에 서면서 얻어낼 이득이 있었다.

물론, 오스만이 전쟁에 승리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나날이 허약해지는 오스만 제국의 상황으로 따져봤을 때 오스만이 각성하지 않는 이상 가능성이 한없이 낮았기에 한스나 베니젤로스나 그 부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는 물론 저희 독일 제국의 공식적인 대답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만약의 경우를 가정한 것이니까요.”

“지금은 남작님의 생각을 들은 것으로 충분합니다.”

어차피 베니젤로스는 아직 그리스의 총리가 아니었고, 발칸전쟁은 6년 후에야 일어난다.

지금 베니젤로스에게 있어서 이 정도면 충분했다.

“슬슬 일어나 봐야겠군요.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다음 약속이 있어서요.”

베니젤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스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남작님, 부디 올림픽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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