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카이저를 구했다-115화 (115/193)

115화 : 사민당

“베른슈타인 의원님과 카우츠키 씨?”

“아, 드디어 카이저를 구한 소년을 만나 보게 되는군요!”

내가 약속 장소인 맥주홀에 도착하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카를 카우츠키가 무뚝뚝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나를 향해 인사했다.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두 사람의 차이가 훤히 보이는군.’

같은 사회주의자이자 사민당의 지도자라도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의 성격과 사상이 다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선,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자 중에선 특이하게도 라이히슈탁의 제국의원이자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이론인 계급투쟁과 자본주의 부정 등을 비판하며 선거권 확대를 통한 평화로운 방식의 사회개혁을 주장하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베른슈타인의 사상은 훗날 사회민주주의로 이어지며 현재진행형으로 사민당의 주류의견이 되어 가는 중이었지만, 그로 인해 카우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 등 동료들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포기했다는 격렬한 비판을 당하며 수정주의자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사실 베른슈타인은 정말 수정주의자가 맞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심지어 베른슈타인 본인도 이를 부정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여겼다.

그리고 베른슈타인을 비판했던 카우츠키는 일명 ‘마르크스주의의 교황(Papst des Marxismus)’이라 불리는 당대 마르크스주의의 최고 권위자였다.

다만, 카우츠키는 타협적인 성격이라 베른슈타인을 비난하긴 했어도 베른슈타인과 갈라서진 않았고 보다시피 아직 사민당에 남아 있었다.

‘게다가 의외로 레닌과 볼셰비키엔 적대적이었단 말이지.’

그렇기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볼셰비키의 혁명이 불법적이라며 카우츠키는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물론, 레닌도 카우츠키를 혁명의 변절자라 욕했으니 적반하장이었다.

원래 그쪽 바닥에선 내 생각과 다르면 적이다.

‘그래도 카우츠키 정도면 양반이지.’

베른슈타인이 당내 우파, 카우츠키가 중도파를 대표했다면 당내 좌파를 대표하는 것은 훗날 독일 공산당 창립의 주역들인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Paul August Friedrich Liebknecht)였다.

이들은 그래도 말은 통하는 카우츠키와 달리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그야말로 혁명의 모든 것을 바친 자들이었다.

“우선, 보좌관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전부터 한번 남작과 만나고 싶었습니다만 남작께선 우리에게 거리를 두는 모양이더군요.”

“하하하, 제가 지내는 곳이 지내는 곳인 만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이해합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과 만나면 남작도 여러모로 곤란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니까요.”

베른슈타인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그리 말했다.

그의 말대로 내가 그동안 사민당과 거리를 둔 것은 맞았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멀어지기 시작했어도 여전히 사민당은 부정할 수 없는 ‘빨갱이’였으니까.

그들과 가까이 지내면 내 평판에도 흠집이 생기고 융커들도 잘됐다 싶어 날 물어뜯을 테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젠 만나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제가 사회주의자라도 제국의원인 이상 외무장관의 보좌관과 ‘업무’ 문제로 만나는데, 이것을 트집 잡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뭐, 복잡하게 생각하실 건 없습니다. 이 자리는 그저 남작과 친분을 쌓고 싶어서 마련한 자리이니까요.”

오히려 그게 더 무서운데.

차라리 거래 쪽이 마음 편하지.

“카우츠키.”

내 뚱한 얼굴을 읽었는지 베른슈타인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카우츠키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이에 카우츠키는 한숨 쉬며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이 친구 말대로 남작을 사민당에 끌어들이겠다거나 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 당은 혁명적이지만 정작 ‘혁명’은 하지 않으니 말이오.”

하긴 사민당은 베른슈타인의 영향으로 무력을 동반한 혁명이 아닌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니.

“네.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쪽에 완전히 무지한 것은 아니라서요. 개인적으론 베른슈타인 의원님의 사상이 그나마 방향성 면에선 낫다고 봅니까요.”

“아! 역시 포사도프스키베너 부총리께 들었던 대로군요. 봤나, 카우츠키? 남작은 이야기가 통할 거라니까.”

내 말에 베른슈타인이 눈을 빛내며 반색하자 카우츠키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작게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포사도프스키베너 부총리라.

베른슈타인이 왜 나를 우호적으로 대하는지 잘 알 것 같다.

그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노동자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한 덕분에 귀족이면서 사민당의 존중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고, 나도 그의 생각에 공감하고 있으니까.

아마 포사도프스키베너 부총리가 베른슈타인에게 나에 대한 칭찬이라도 한 모양이다.

“저 또한 부총리님처럼 노동환경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소모품이 아닌 사람이니까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물론, 독일 제국은 그래도 노동자들의 처우가 다른 나라들보다는 나은 편이긴 했다.

당장 빌헬름 2세도 재임 초기엔 아예 노동 황제 소리를 듣기도 했고.

“그렇다 해도 제가 혁명을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 가령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하는 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요?”

“그거야 모든 부가 균등하게 분배되고, 모든 이가 평등한 세상이 찾아오지 않겠소?”

내 물음에 카우츠키가 자신감 있게 답했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러했다.

“물론, 사람들은 평등해질 겁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등해질 겁니다.”

“!”

내 말에 카우츠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이런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하면서도 당장 나에게 달려들어 내 말을 논박하려 했지만, 그 전에 베른슈타인이 끼어들었다.

“혁명이 성공한다 해도, 결국 나폴레옹 같은 독재자가 나올 것이란 말입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마르크스주의에서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사실상 과두정 독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잡은 이들이 과연 스스로의 권력을 내려놓겠습니까?”

“흐으음…….”

난 그래서 개인적으로 미국의 국부인 조지 워싱턴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무슨 이유가 있었든 그는 왕이 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으니까.

이는 결코 말로 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혁명가 대부분이 손에 쥔 권력을 포기 못 하고 끝내 독재자로 타락했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그래서 차라리 베른슈타인 의원님의 수정주의 방향이 낫다고 하는 겁니다. 폭력을 통한 혁명보다는 사회적 제도를 통해 노동자들의 권익향상에 집중하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요.”

계급투쟁은 물론, 계획경제 등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도 포기하고 미래의 사민당이나 영국 노동당처럼 진보정당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역시나 아직 무리일 것이다.

게다가 내가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카우츠키와 온종일 논쟁을 벌여야 할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이라 불리는 사민당에서 제일가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와 정면에서 맞붙는 건 에바였다.

베른슈타인도 ‘아무래도 그건 좀…….’이라며 난색을 보일 테고.

하지만 어차피 사민당과 사회민주주의는 내가 말한 방향으로 변화한다.

물론, 사민당이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 이후였지만.

‘하지만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면 여러모로 독일 제국엔 이득이겠지.’

“역시 남작을 만나 보길 잘했다고 생각되는군요.”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베른슈타인이 말했다.

“앞서 말했듯이 남작께 저희 대의에 동참해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부총리님처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힘써 주는 분들이 늘기를 바랄 뿐이지요.”

나는 베른슈타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사민당과 친구까진 아니더라도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사민당은 1912년에 무려 원내 1당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걱정은 베른슈타인이나 카우츠키가 아닌 지금쯤 폴란드 사민당을 진두지휘하고 있을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이들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독일 제국의 붕괴요, 공산 국가의 건설이니까.

하지만 결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두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도 서서히 사민당의 빨간 물을 뺄 필요가 있다.

분열하여 정복하라는 비단 식민지에서만 사용되는 논리가 아니었으니까.

* * *

“자자, 모두 집중하도록.”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와 만남을 가진 뒤.

어느새 보좌관 일에 익숙해진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외무청 회의에 참석해 치르슈키의 외무장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모두 알다시피 올해 4월에 아테네에서 올림픽 1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중간 올림픽이 열리는 것을 알고 있을걸세.”

장관의 말에 나를 포함한 내각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 올림픽은 나와도 완전히 무관하진 않은 행사였다.

빌헬름 황태자의 결혼식 때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와 약속한 대로 DRR이 올림픽 최초로 라디오 중계를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독일도 올림픽에 참가할 것이라네. 저번 올림픽은 솔직히 양키들의 잔치였지만, IOC에서도 이번 중간 올림픽을 어떻게든 성공시키려고 칼을 갈고 있는 모양이니, 이번엔 그래도 지난번처럼 엉망이진 않겠지.”

치르슈키 외무장관의 말대로 아테네 중간 올림픽은 IOC에서 공식적으로 개최하는 올림픽 행사는 아니었지만, IOC는 이번 중간 올림픽에 자신들의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었다.

왜냐하면, 1896년에 치러진 아테네 올림픽 이후 개최된 1900 파리 올림픽과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이 성대하게 폭망하는 바람에 올림픽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일단, 파리 올림픽은 같은 해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의 부속품 취급당했을 정도로 운영이 막장이었다.

심지어 선수들은 자신들이 올림픽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그리고 파리 올림픽 다음으로 열린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은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렸는데, 막장이었던 그 파리 올림픽이 귀여워 보일 정도로 더 심각했다.

파리 올림픽이 어떻게 망했는지 똑똑히 지켜본 IOC 위원장 쿠베르탱 남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이 세인트루이스 만국박람회의 부속 행사로 열린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개회식은 물론 폐회식도 없었고, 경기장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선수들은 도시 골목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경기할 정도였으며 운영도 지나치게 졸속이었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러일전쟁까지 일어나 분위기가 뒤숭숭했던 데다가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미국에서 올림픽이 열린 탓에 유럽 선수들은 거의 출전하지도 못한 탓에 경기장엔 미국 선수와 캐나다 선수만 가득했다.

이건 이미 올림픽이 아니라 북미 전국체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1904 올림픽은 올림픽을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미국이 개최한 악명높은 인종 전시회, 인류학의 날(Anthropology Days)로 막장의 정점을 찍으며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은 파리 올림픽을 뛰어넘는 최악의 올림픽으로 남고 말았다.

이 때문에 올림픽 위원회 IOC는 비공식 올림픽이었던 중간 올림픽을 공식 올림픽 대회 수준으로 치를 정도로 낭떠러지에 몰린 올림픽을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는 중이었다.

그 결과, 1906 아테네 중간 올림픽은 대성공을 거두며 올림픽의 구세주가 되었고 올림픽이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 올림픽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올림픽으로 남았다.

‘2년 후 런던 올림픽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위태로웠던 올림픽이 완전히 자리 잡게 되지.’

사실 현재 1908 올림픽의 개최지는 이탈리아 로마로 정해져 있는 상태였지만, 올해 4월 7일에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나폴리가 큰 피해를 입는 바람에 영국으로 개최지가 바뀌었다.

‘아직 베수비오는 폭발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달라질 것은 없겠지.’

지난달 말, 독영협상으로 체면을 차렸음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경제 문제로 보수당과 자유 통일당 간의 연립 내각이 붕괴하면서 보수당은 총선에서 참패했고, 아서 밸푸어는 원 역사대로 눈물을 삼키며 총리 자리에 물러났다.

그리고 밸푸어 대신 새롭게 영국의 총리가 된 자유당의 헨리 캠벨배너먼(Henry Campbell-Bannerman)은 독영협상을 기념하고 독일과의 우호를 공고히 하기 위해 1908년에 독일-영국 전시회(German-British Exhibition)를 개최할 것이라 선언했다.

사실상 원 역사의 프랑스-영국 전시회(Franco-British Exhibition)에서 프랑스가 빠지고 독일이 들어간 것과 다름없었다.

런던 올림픽은 본래 이 프랑스-영국 전시회와 함께 영국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개최되었던 만큼 이번에도 이탈리아 대신 영국이 1908 올림픽을 개최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하여튼 요점을 말하자면 뷜로 총리께서는 그리스와의 우호 증진을 위해 이번 올림픽 때 아테네에 특사를 파견할 생각이시라네. 그리스 왕실은 황실의 인척이기도 하니까.”

“그럼, 누구를 아테네에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자넬세.”

“예?”

치르슈키 외무장관의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눈을 끔벅거렸다.

“콘스탄티노스 왕세자와 조피 왕세자비께서 자네가 왔으면 좋겠다는군. 올림픽 구경이나 할 겸 다녀오시게나.”

“네. 알겠습니다.”

약간 놀라긴 했지만,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스라.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반도에 있는 국가인 만큼 확실히 어느 정도 친분을 유지할 필요는 있다.

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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