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보좌관 (1)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장례식이 열리던 날.
하늘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듯 짙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왔나, 남작.”
“뷜로 총리님.”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장례식에 참석한 내가 인사하자 뷜로 총리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오늘만큼은 나도 뷜로도 악수할 기운이 나질 않았다.
“정말인지 아직도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
“그거 알고 있나? 오스발트는 내가 총리가 되었을 때부터 외무장관으로서 나와 함께 내각을 이끌었던 동료이자 친구였다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갑자기 그가 우리 곁에서 떠나 버리니 너무나도 견디기 힘들군.”
뷜로 총리가 어두운 얼굴로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그만큼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죽음은 나에게도, 뷜로 총리에게도, 그리고 그를 알았던 모든 사람에게 있어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사인이 무엇인지는 밝혀졌습니까?”
“의사의 말로는 지병 때문이라더군. 본인조차 모르고 있던 모양이야.”
그러고 보니 예전에 독영협상을 체결하던 날,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이 갑작스럽게 기침을 내뱉은 적이 있었다.
그땐 그냥 감기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틀렸던 모양이다.
‘그때 내가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병세를 눈치챘더라면, 그의 죽음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까?’
아니, 아니다.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저 나만 괴로울 뿐이지.
“자네도 여러모로 힘든 모양이군. 하긴 남작 자네와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은 친한 관계였으니. 그래도 기운 내게. 오스발트도 자네가 이 일로 힘들어하는 것을 원치 않을 거야.”
“총리님…….”
“여기 앉아 조금 마음을 추스르고 있게나. 나는 오스발트의 가족들에게 가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위로를 전달해야 하니.”
그리 말을 마친 뷜로 총리가 내 등을 토닥이고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가족들을 만나러 떠났다.
나는 장례식장이 열리는 교회의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 남은 사람들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지.”
장관님도 그것을 원하실 것이다.
조금 마음이 편해진 나는 속에 들끓는 응어리를 토해 내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흐아, 장례식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 근처에서 낯선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만프레트, 가문의 어른이 돌아가셨는데 의젓하게 있어야지. 너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잖니.”
“가문의 어른이라고 해도 멀고 먼 친척이잖아요. 전 얼굴도 본 적 없다고요.”
“어휴, 사관학교의 교관들에게 널 더 엄하게 가르치라고 해야겠구나. 대체 언제쯤 철이 들 거니?”
“아, 엄마 쫌!”
리히르호펜 외무장관의 친척일까?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어머니의 잔소리가 마음에 만드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하긴, 지금 내 나이대는 사춘기에 접어들어 한창 반항이 심할 때다.
당장 요아힘과 루이제만 해도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 따라 아우구스테 황후랑 사소한 일로 말다툼하는 일이 늘어났으니.
“저 애를 보렴. 너와 같은 나이로 보이는데, 얼마나 의젓하니?”
“?”
남자아이의 어머니 쪽이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그리 말했다.
아무래도 말없이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착각한 모양이다.
남자아이는 어머니에게 나와 비교를 당한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나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
“……황인종? 엄마, 우리 친척 중에 아시안도 있었어요?”
“그럴 리가 없잖니. 나는 누군지 알 것 같은데, 궁금하면 가서 직접 물어보렴. 이참에 친해지면 더 좋고.”
남자아이의 어머니는 나를 향해 그리 눈웃음을 지으며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아무래도 내 정체를 알고 이 기회에 아들에게 인맥을 만들어 줄 모양이다.
적어도 칭키 취급받는 것보단 나으려나?
‘다 좋은데, 그래도 내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말할 순 없나?’
가만히 있는데, 괜히 나만 무안해지잖아.
하여튼, 내가 일부러 두 사람의 대화를 못 들은 척하고 있는 사이, 어머니의 등쌀에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아이가 투덜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야, 너 뭐냐?”
이 새끼 보소?
“……남의 이름을 묻기 전에 자신을 소개하는 데 예의 아닌가?”
“나? 만프레트 알브레히트 폰 리히트호펜 남작이시다. 돌아가신 오스발트 폰 리히트호펜 외무장관님의…… 머나먼 친척이라 할 수 있지.”
“콜록?!”
예의는 어따 팔아먹었는지 참 꿀밤이 마려운 건방진 남자아이의 태도에 순간 짜증이 나 나도 모르게 공격적으로 대답했더니, 남자아이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나는 그만 사레가 들릴 뻔했다.
‘붉은 남작이잖아!’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Der Rote Baron, Manfred von Richthofen).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협상국 파일럿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하늘의 제왕.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파일럿이자 에이스 파일럿의 대명사가 지금 내 눈앞에 서 있었다.
물론, 이 녀석이 전설적인 파일럿이 되려면 아직 몇 년은 더 있어야 하겠지만.
“자, 내 소개를 했으니, 이젠 네가 누군지 말해.”
“한스 폰 초이 남작. 돌아가신 리히트호펜 장관님의 친구.”
“오.”
내 이름을 듣자마자 내가 누군지 드디어 깨달았는지 시시껄렁했던 리히트호펜의 얼굴이 흥미와 호기심의 감정으로 물들었다.
“카이저를 구한 소년이라. 하긴 이 독일 제국에 동양인 귀족이 너 말고 있을 리가 없지. 내가 왜 못 알아봤는지 몰라.”
리히트호펜이 그리 중얼거리며 대뜸 내 옆에 앉았다.
“나이도 같아 보이고 작위도 똑같은데, 말 놓아도 되지?”
“이미 놓고 있잖아.”
“하하하, 그랬던가? 신경 쓰지 마. 드디어 이 따분한 장례식에서 재미있는 일이 생겼는걸.”
“애도는 안중에도 없냐?”
“너야 외무장관님과 가까웠으니 슬픈 게 당연하지만, 난 그다지? 솔직히 외무장관님과 나는 같은 가문 출신이란 것만 빼면 접점도 없어.”
하긴, 리히트호펜 입장에선 모르는 사람이 돌아간 것이나 다름없을 거다.
우리나라식으로 따지면 촌수가 엄청 차이 나는 문중의 어른이 돌아가신 상황이라 보면 된다.
‘아마 그저 같은 리히트호펜 남작가니까 부모님 손에 이끌려 장례식에 참석한 것뿐이겠지.’
“그나저나 네 소문은 많이 들었어. 워낙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많아서 그 모든 소문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대체 무슨 소문을 들었길래?”
“예를 들면 네가 황제 폐하의 애첩이라는 소문 같은 거?”
“이런 씨…….”
순간 욕을 내뱉을 뻔해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여긴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장례식이다. 침착하자, 한스야.
“그 반응을 보니 역시 아니군.”
“당연하지!”
“하하, 그러면 그렇지. 친구들과 내기했었거든. 이걸로 꽤 짭짤하게 벌 수 있겠어.”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가지고 내기를 했다는 것에 화를 내야 할까, 아니면 적어도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 소문이 거짓말이란 쪽에 돈을 걸었다는 것에 미소를 지어야 할까.
내가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때 리히트호펜이 말했다.
“그나저나 소문엔 프랑크푸르트에서 비행기라는 것을 만들고 있다며?”
“그래. 그건 진짜야. 혹시 흥미 있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것이 진짜인지 벌써 비행기에 관심을 보이는 리히트호펜.
붉은 남작을 파일럿의 길로 일찍 인도할 좋은 기회다.
나는 은근한 기대를 품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흐음, 흥미가 있다 없다를 따지면 있는 쪽이지? 얼마 전 사관학교에서 외출 허가를 받았을 때 극장에서 친구들이랑 네가 찍었다는 비행기 활동사진(영화의 옛말)을 봤는데, 그게 참 멋져 보이더라고.”
지난번에 하인리히 왕자가 비행기를 탔을 때 비행기 홍보를 위해 찍은 영화다.
근데 이게 또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원한다면 친구들 데리고 프랑크푸르트로 구경하러 와도 돼.”
“오, 정말?”
“그럼, 이것도 다 인연인데.”
나는 낚싯바늘을 문 물고기를 바라보는 낚시꾼의 마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리히트호펜에게 그리 말했다.
리히트호펜의 친구들이라면 내 또래의 귀족 남자아이들, 그것도 사관학교 학생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비행기에 흥미를 느끼면 미래의 파일럿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비행기의 군 도입이 조금 더 원활해질 것이다.
군국주의 성향이 강한 독일 귀족의 특성상 그들의 부모 또는 친인척은 중 상당수는 현직 군 장성일 확률이 높고, 자식들이 비행기에 환장하는데 부모들로서도 이를 외면하긴 힘들 테니까.
자고로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다.
무엇보다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하고도 친해지면 내게도 여러모로 이득이 될 것이다.
붉은 남작이라는 이름값도 이름값이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명문가 출신인 리히트호펜을 통해 내 또래 귀족들에게 영향력을 퍼트릴 수 있을 테니까.
아직은 아이들일 뿐이지만, 미래 독일 제국의 권력층이 될 이들이다.
미리미리 인맥을 만들어 놔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너 생각보다 좋은 녀석이구나.”
“그래. 나도 네가 꽤 마음에 들어.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고.”
내가 만프레트와 그리 웃으며 대화를 나누자 멀리서 만프레트의 어머니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게 눈에 들어온다.
아마 만프레트의 어머니는 나와 만프레트가 친해지면 나를 통해 아들이 카이저의 눈에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미래를 생각해 보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녀석은 머지않아 독일 제국 내에서 카이저보다도 더 유명하고 사랑받는 인물로 될 테니까.
물론, 그 최후는 달라져야겠지만 말이다.
* * *
“그럼 다음에 보자. 만프레트.”
“그래. 그때까지 잘 지내. 한스. 나중에 내 동생 로타어랑 사촌인 볼프람도 소개해 줄 테니까.”
리히트호펜 외무장관의 장례식이 마무리되며 사람들이 하나둘씩 교회를 떠나기 시작하는 가운데 나 또한 만프레트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만프레트의 동생인 로타어와 사촌인 볼프람이라.
두 사람 다 나름대로 유명한 인물들이다.
로타어 폰 리히트호펜은 격추 수 40기에 영국의 에이스 파일럿이었던 알버트 볼을 격추한 형 못지않은 괴수였고,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훗날 게르니카 폭격으로 유명한 소이탄 성애자이자 유능한 공군 지휘관이었다.
어느 쪽이든 미래 독일 제국의 공군을 책임질 인재들이다.
이 기회에 그들도 일찍 파일럿의 길로 끌어들여 보자.
“허허, 장례식장에서 이별이 아닌 새로운 만남을 가졌나 보군.”
“뷜로 총리님.”
리히트호펜이 가족들과 함께 교회를 떠나는 것을 배웅하고 있을 때 뷜로 총리가 다가왔다.
“자네 또래로 보이는데 리히트호펜 가문의 소년인가?”
“예. 만프레트라고 같은 이름을 가진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대령의 오촌 조카입니다.”
“아, 작년까지 황제 폐하의 부관이었던 친구 말이군. 기억하고 있네. 명문가 자제들과 친분을 쌓는 건 좋은 일이지. 남작, 자네가 앞으로 맡을 일에도 큰 도움이 될 테고.”
“예? 앞으로 맡을 일이라니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뷜로 총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스발트의 후임 말일세. 외무장관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 둘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지요.”
영국과 동맹을 맺어 한숨 돌렸다지만, 미래에 벌어질 일들이 일인 만큼 여전히 외교는 독일 제국에 있어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그래서 난 자네를 차기 외무장관으로 삼을 생각이라네.”
“예???”
뷜로의 말에 내 얼굴에 물음표가 잔뜩 떠올랐다.
지금 날 뭐로 삼는다고?
“농담이시죠?”
“당연히 농담이지. 설마 그걸 믿었나?”
“…….”
난 말없이 뷜로 총리를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봤다.
에이, 괜히 좋다 말았네.
“크큭, 난 황제 폐하께 차기 외무장관으로 하인리히 폰 치르슈키(Heinrich Leonhard von Tschirschky und Bögendorff)를 추천할 생각이라네. 그런데 그가 자네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삼고 싶다는군.”
“이번엔 농담 아니시죠?”
“이번엔 아니라네.”
뷜로가 킥킥되며 말했다.
“물론 개인적으론 자네가 외무장관이 되도 잘할 것 같기는 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이가 너무 어려. 정 외무장관이 되고 싶다면 적어도 18세는 되고 오게나.”
뷜로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게다가 독일 제국 내에서 외무장관은 내각 장관 중에서도 큰 의미를 가진 자리였다.
비스마르크가 쫓겨나고 독일 제국의 외교 상황이 악화하면서 제국의 외교를 책임지는 외무장관은 그 위상과 책임이 매우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문인지 독일 제국에서 외무장관은 사실상 총리가 되기 위해 거쳐 가는 자리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눈앞에 있는 뷜로 총리 또한 총리가 되기 전엔 외무장관이었고, 뷜로의 전임인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 후작도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아직까진 급하게 굴 필요는 없겠지.’
“그러면 감사히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사양하지 않을 줄 알았네. 자네 뻔뻔함이 어디 그냥 뻔뻔함인가.”
뷜로 총리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드디어 공식적으로 외교계에 뛰어들 기회다.
게다가 언제까지고 카이저의 대리인이란 한계가 명확한 임시 직함을 달고 다닐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럼, 앞으로도 열심히 하게나. 자네가 이렇게 경험을 쌓고 빨리빨리 커야 앞으로 더 큰 일을 맡길 테니까.”
뷜로 총리가 내 어깨에 손을 짚으며 자상한 할아버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뒷말이 어째서 마치 일 잘하는 흑우가 빨리 크기 바라는 악덕 경영주의 말처럼 들리는 것은 내 기분 탓일까?